326화 믿음
“그때의 참상을 보고 마땅히 화가 나야 하는데, 정작 난 아무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사야께서 증거를 찾아 진실을 밝히셨잖아요…….”
“증거를 찾은 건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왕을 없애서 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월왕은 목운요의 손가락에서 전해져 오는 약간의 떨림을 느꼈다.
“요아. 이게 바로 내가 황위에 마음이 없는 이유다. 부황께서는 한평생을 나라에 바치시고 지금도 한결같이 근면하시지만, 난 모든 백성을 등에 지고 갈 자신이 없다. 너를 마음에 둔 이후로 내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가 않기 때문이다.”
목운요가 손을 거두며 복잡한 표정으로 월왕을 바라보았다. 단호한 그의 눈빛은 진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월왕이 목운요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얹어 심장 소리를 느끼게 했다.
“요아, 이런 말을 들으면 두려운 마음이 드느냐?”
냉궁에서 지낸 십여 년 동안, 그의 곁에는 성 공공뿐이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네모난 하늘을 쳐다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도 마치 이 한눈에 다 보이는 하늘과도 같았다. 어쩌다가 새가 지나가고 꿀벌과 나비가 머물다 가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떠나갔다.
그러다 목운요를 만난 후,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음속의 네모난 하늘에 여러 가지 색이 그려져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준 이 손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늘 보이는 곳에 두고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길 바랐다.
목운요가 한껏 긴장한 월왕을 바라보며 머리를 그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릇이 작다고 하셨죠? 얼마나 작은데요?”
“너 하나밖에 담지 못한다.”
“좋아요. 황제가 안 되더라도 저희는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월왕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승낙한 것이냐?”
“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제가 되어 봤자 좋을 게 딱히 없는 것 같아요. 매일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혹시나 후궁에 소우의 같은 자가 있으면 더 바람 잘 날이 없겠죠. 차라리 모든 걸 가진 왕야로 사는 게 더 편하겠어요.”
월왕이 고개를 내려 그녀의 코끝을 살며시 비볐다. 낮고 매력적인 웃음소리에 목운요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요아, 걱정 말거라. 제왕이 되지 않더라도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 줄 것이다.”
홀로 커 가면서 후궁의 음모를 수도 없이 봐 온 그는 권세를 장악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권세가 없다면 그 자유로움도 일장춘몽에 불과할 것이다.
“전 사야를 믿어요.”
월왕이 제왕 자리를 포기한다고 하니 계획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릉왕과 진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유일하게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자는 유왕뿐이었다.
목운요의 입가에 살며시 입맞춤을 한 월왕은 가슴 벅찬 달콤함에 저도 모르게 혀끝을 내밀어 부드러움을 느꼈다.
깜짝 놀란 목운요가 몸을 움츠리며 부끄러움 가득한 눈을 했다.
“사야, 선을 넘으시면 안 되죠.”
월왕이 억울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쳐다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요아,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한 번만 일으켜 주거라.”
그에 목운요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부축해 주었다.
그에 월왕은 일부러 힘을 빼고 있다가 그녀를 침대 위로 밀쳤다.
“요아, 힘이 정말 세구나.”
목운요가 눈을 깜빡이더니 월왕의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
“사야, 참 뻔뻔스럽군요!”
월왕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목운요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빠르게 밖으로 사라졌다.
목운요는 볼을 감싸며 웃었다.
마침 눈여우가 다가와 애교를 부리자, 그녀가 눈여우를 품에 안고 볼을 비볐다. 이 순간 마음속에서 나비 떼가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후궁 내, 이 귀비가 소식을 퍼뜨린 탓에 덕비와 월빈은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덕비가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데, 궁녀가 조심스레 다가와 아뢰었다.
“마마, 월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덕비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번쩍 떴다. 눈빛에선 냉기가 흘렀다.
“들이거라.”
“네.”
곧 소우의가 안으로 들어서며 바닥에 무릎을 꿇어 덕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덕비 마마를 뵙습니다.”
소우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덕비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친정집이 풍비박산 난 마당에 후궁에서 배 속의 아이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덕비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그때, 덕비가 궁녀한테 호통쳤다.
“월빈이 무릎 꿇고 있는 걸 못 보았느냐? 폐하의 자식을 품고 있는 몸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희들이 책임질 것이냐? 어서 일으키지 않고 뭐 해!”
소우의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제 욕심 때문에 후궁 사람들의 오해까지 받게 해서 너무 송구하옵니다. 이렇게 무릎이라도 꿇어야 마음이 편한걸요.”
그제야 덕비 마음속의 화도 약간 가라앉았다.
“됐다. 이만 일어나거라. 무엇보다도 배 속의 아이가 우선이다. 네 몸이나 잘 챙기거라.”
궁녀가 곧장 소우의를 일으켜 세우며 의자를 가져다줬다.
“태의가 처방한 약은 잘 먹고 있느냐?”
“네. 빠짐없이 먹고 있습니다만, 헛구역질이 더 심해졌습니다.”
창백한 소우의의 얼굴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마마, 온한 군주 쪽은…….”
“아직 당할 망신이 남은 게냐?”
덕비가 힘껏 탁자를 내리치자 깜짝 놀란 소우의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덕비는 화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됐다. 돌아가거라. 화과차는 우리가 감히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까다로운 재료들을 다 모은다 한들, 그때쯤이면 이미 출산했을 것이다. 온한 군주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야.”
덕비의 귀찮다는 듯한 말투에 소우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눌렀다.
“네. 마마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시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소우의가 떠난 뒤, 덕비가 깊게 숨을 몇 번 들이마시며 말했다.
“날이 점점 더워지니 폐하께 갈증 해소에 좋은 단국(甜汤, 단맛이 나는 탕)을 가져다드리거라. 그리고 진비한테 줄 다과도 준비하거라.”
진비가 여러 차례 아부의 뜻을 보였지만 그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귀비의 견제가 더욱 심해지고 있고, 또 소우의 배 속 아이의 성별도 모르는 마당에, 일단은 진비와 연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 * *
닷새간 고민한 끝에 목운요는 드디어 불선루를 새로 단장할 도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불선루로 도면까지 보내고 나자 간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눈여우를 품에 안고 시녀를 거느린 채 정원으로 향했다.
정자에 앉으니 정원에 활짝 핀 서부해당화에 눈길이 갔다. 눈여우는 나비를 보더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목운요의 손가락을 비비적거렸다.
목운요가 눈여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서 놀거라. 아무거나 먹지 말고.”
눈여우는 곧장 쌩하고 달려 나갔다.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흰 비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휴식을 만끽하는데,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악, 사람 살려!”
나비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나타난 눈여우가 목운요의 앞에 나비를 내려놓으며 애교를 부렸다.
“어디서 온 망할 짐승이 감히 월빈 마마를 놀라게 하느냐!”
궁녀 두 명은 달려오면서 호통을 치다가 목운요를 보는 순간 굳어 버렸다.
“온한…… 군주…….”
목운요가 손수건을 꺼내 꼼꼼히 눈여우의 발을 닦은 다음 품에 안았다. 그러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우의를 보며 말했다.
“월빈 마마를 뵙습니다.”
소우의가 화가 잔뜩 난 눈으로 목운요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온한 군주. 아무리 날 미워한다 해도 일부러 여우를 시켜 놀라게 하는 건 아니죠. 난 괜찮지만 혹여나 배 속의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가자 한쪽에 서 있던 궁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군주. 마마께서 크게 놀라 태의가 오고 계십니다. 쉽게 움직일 수 없으니 너무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비록 오월 하순이라지만 바닥의 한기는 여전하지요. 임산부가 바닥에 오래 앉아 있으면 출산 후에 온몸이 심하게 붓고 아플 겁니다. 물론, 심할 경우 아이한테도 영향을 미치지요.”
목운요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여유롭게 말했다.
그에 소우의는 다급히 궁녀에게 눈치를 줬다.
궁녀가 바로 눈치채며 말을 꺼냈다.
“마마, 정자로 가서 태의를 기다리시지요.”
“그래.”
궁녀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난 소우의가 천천히 목운요가 앉아 있던 정자로 갔다. 그러다 탁자 위에 놓인 죽은 나비를 보고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당장 치우거라!”
목운요가 정자에 들어가려 하자 궁녀들이 앞으로 나서며 말렸다.
“온한 군주, 월빈 마마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무엄하구나!”
목운요를 뒤따라온 곡 마마가 앞을 막아선 궁녀 두 명의 따귀를 힘껏 내려쳤다.
소우의는 가까이 다가오는 목운요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목운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소우의는 그 모습에 더욱 겁이 났다.
“목운요, 난 폐하께서 직접 봉한 월빈이다. 감히 나한테 무슨 짓을 한다면 폐하께서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목운요가 천천히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웃어 보였다.
“월빈 마마,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저는 그저 오랜만에 뵈어 반가워서 이야기 나누려는 것뿐이에요.”
“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있어? 분명 날 해치려는 속셈이겠지. 네 음흉한 본심을 폐하께서도 분명 알아차리실 것이다!”
목운요가 품에 안은 눈여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월서에서 왔는데 온몸이 새하얗고 몸짓이 가벼우며 눈길에서도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지요. 독충과 뱀, 개미를 주로 먹는데 전에는 살무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먹었지요. 제가 진정 마마를 해하고 싶었다면 마마께서 과연 이렇게 무사히 제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