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93화 (293/442)

293화 각별한 마음

황제가 진노하자, 사람들이 전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성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 시국을 틈타 잔꾀를 부리는 이가 있다면, 그 누가 됐든 간에 손모가지를 전부 잘라 버릴 테다! 알아들었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호부 상서, 지금 당장 구호 방법을 상주서에 적어 올리거라. 명일부터 짐의 분례(份例, 녹봉)를 삭감하고 궁 내 여러 지출을 줄일 것이다. 의덕 장공주를 제외한 황자, 비빈, 관원 전부 품급 순서대로 삭감하도록 한다.”

저택으로 돌아간 진왕은 크게 화를 내며 모든 하인의 월급을 삭감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곤 심복을 불러 다음 수를 상의하느라 급급했다.

하지만 마땅한 수를 찾아내기도 전에, 순천부에 있던 소근이 임강 강둑이 무너진 내막을 알고 있다고 자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근은 누군가가 일부러 강둑을 폭파해, 소금세를 실은 배를 임강에서 가라앉게 함으로써 소금세 사건의 모든 증거를 없애려 한다고 주장했다.

소식을 들은 진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 서재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

“소근, 그 여자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을까?”

한쪽에 서 있던 책사가 난처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심병괴가 순천부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데다, 소근이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보니 밤새 사람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진왕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 소금이 커다란 위험인 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뛰어들었으니, 이제 빠져나오려면 누군가를 발밑에 깔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구나. 릉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거라. 절대로 부황 앞에서 내 험담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임강성 지부에 월왕의 생사를 확인하라고 전하거라. 유왕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어떻게든 구호 작업을 망쳐 놔야 해.”

“네, 왕야.”

진왕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짜릿한 술 향이 입 안을 감싸자, 저도 모르게 눈이 찌푸려졌다.

* * *

유왕은 임강성으로 떠나기 전, 내시 공공을 심방원으로 보내 목운요에게 소식을 전하게 했다. 혹여나 월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대신 전달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심부름 보낸 내시 공공은 목운요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유왕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그는 곧장 길을 나섰다.

* * *

그 후 꼬박 엿새가 지났다.

장공주는 심신이 피곤해 보이는 황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이젠 옥체가 예전과 다릅니다. 이렇게 밤낮없이 바삐 지내시면 안 되지요. 조정에 관원이 차고 넘치는데, 이때 써먹으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님, 군월이…….”

“군월의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십시오.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했습니다.”

황제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한참 뒤에야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누님. 군월의 사고 소식을 들은 뒤로 짐은 하루도 편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죽었다면…… 황후를 볼 면목이 없어요……. 유아가 저를 원망할 겁니다. 내 마음속의 미안함 때문에 그동안 군월에게 모질게 대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유아가 바랐던 건 그게 아닌데…….”

장공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후회막심해하는 모습이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황후 위유(韦柔)는 황제의 조강지처였다. 늘 일편단심으로 황제를 보살폈고, 심지어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

“유아라면 분명 황상의 고초를 헤아려 주고,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누님. 이번 일을 겪고 나서야 짐도 이제 나이가 들었음을 느꼈어요. 군월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제대로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황제는 그제야 장공주의 걱정 어린 표정을 눈치챘다.

“누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무 일 없습니다. 다만 운요가…….”

장공주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아이가 월왕을 찾으러 임강성으로 갔습니다.”

“뭐라고요?”

황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운요의 신분을 모르고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한 거지만, 지금은…….”

장공주가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황상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사람 마음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요. 마치 예전의 황상과 황후처럼 말입니다.”

목운요가 마음을 굳혔으니, 외할머니로서 최대한 그녀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고 싶었다. 황제의 허락만 받는다면 더 이상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공주의 말에 황제의 마음이 흔들렸다.

황실은 겉으로 보이는 만큼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월왕과 목운요의 사랑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투성이였다.

다만 황제가 걱정되는 건 두 사람의 앞날이었다.

황제의 흔들림을 눈치챈 장공주는 말을 아꼈다. 말은 하면 할수록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누님, 운요 혼자서 임강성에 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운요에게 황상한테서 받은 금패를 주었습니다. 운요가 의술과 호신술도 익혔기에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장공주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운요와 월왕 두 사람은 성격이 참 많이 닮았더군요. 두 사람 다 힘든 과거를 겪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한번 준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지요. 손윗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황제도 월왕의 성격을 떠올리며 공감했다.

“누님. 운요가 아직 어리니 천천히 두고 보시죠. 두 사람 사이가 깊지 않다면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고,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장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말에서 충분히 타협할 가능성이 보였다. 이제 모든 건 두 당사자에게 달렸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강제로 떼어 내려 압박을 주면 반항 심리가 생겨 더 고집부릴지도 모르지요.”

평소 한없이 연약해 보이던 목운요의 모습을 떠올린 황제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여인의 몸으로 연인을 위해 기꺼이 위험에 나서는 걸 보니,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 마음은 충분히 높이 살 가치가 있었다.

* * *

한편, 목운요 일행이 탄 배가 동릉성(铜陵城)에서 멈췄다.

“소저, 물길이 막혀 이제부터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임강성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말을 타고 가면 사흘, 마차로 가면 엿새 정도 소요됩니다. 물론 중간에 길이 막히거나 할 경우,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서가 목운요에게 물을 건넸다.

“소저, 물 좀 드시지요.”

목운요는 두어 모금 마시고 난 뒤 입을 열었다.

“말을 타고 임강성으로 가자.”

“소저, 아직 기마에 능숙하지 않으신데…….”

“시도는 해 봐야지. 정 안 되면 사금이랑 동승할 테니 어서 준비하거라.”

“네, 소저.”

말이 준비되자 목운요 일행은 길에 올랐다. 다행히 순한 말을 잘 골랐는지 목운요 혼자서도 어려움은 없었다.

임강성에 가까워질수록 이재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초라한 모습에 표정에는 절망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잘 차려입은 행인이 지나갈 때마다 다가가서 구걸했다.

목운요 일행은 미리 발급받은 노인(路引, 여행 허가증) 덕분에 빠른 길로 가다 보니, 다가와 구걸하는 사람이 많진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목운요 일행은 객잔에 머물렀다.

사금과 사기가 목운요를 부축해 말에서 내렸다. 땅을 밟자마자 목운요가 크게 휘청거렸다.

“소저, 괜찮으십니까?”

“다리가 좀 아플 뿐이니 연고를 바르면 돼.”

사서는 그런 목운요가 너무 안타까웠다. 그 연약한 몸으로 잘 이겨 낼지 심히 걱정됐다.

그사이 사화가 세면할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에 손을 넣은 순간, 목운요는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촛불에 비춰 보니 고삐에 쓸려 손바닥이 전부 까져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물로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상처에 약을 발랐다. 다 하고 나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음식을 갖고 올라온 사금은 힘겹게 옷을 정리하고 있는 목운요를 보고 얼른 와서 도왔다.

“소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저희에게 시키세요.”

목운요가 사금의 부축을 받아 탁자 옆에 앉았다.

“같이 먼 길 오느라 고생했잖아.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불선루에선 아무 소식 없니?”

사금이 쟁반 아래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소저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내용을 읽은 목운요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임강성 피해 심각, 백성 대거 사상, 월왕 무소식…….]

그녀의 표정을 본 사금은 좋은 소식이 아님을 눈치챘다.

“소저, 하늘이 월왕 전하를 도와주실 겁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목운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서신을 촛불에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사금이 가져다준 죽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하는 건 체력을 키워 무사히 임강성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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