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무너지는 소씨 가문
황제가 벌컥 성을 냈다.
“무엄하다! 아무래도 짐이 너를 너무 아껴서 버릇을 잘못 들여 놓은 것 같구나. 경중을 가려서 말하는 법도 모르다니. 짐의 여식이자 공주인 네가 그런 말을 하느냐?”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압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를 외부인이 본다면 뻔뻔하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소청오가 마음에 들고, 그 사람에게 시집갈 생각입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머리를 밀고 비구니가 되어 이번 생엔 절대로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제정신인 게냐?”
“소청오는 부황께서 직접 봉하신 일품 시위입니다. 아직 나이도 젊고, 서릉의 수많은 공자 중 으뜸가는 사내로서 앞길이 창창합니다. 반면 부황께선 출신이 비천한 목운요와 넷째 오라버니의 사이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소청오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황제 옆에 앉아 있던 장공주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냉기를 뿜어냈다.
“회양, 혼인은 어린애들 놀이가 아니다. 황가의 명성은 하늘도 뚫을 정도로 자자한데, 넌 말끝마다 소청오에게 시집간다고 하는구나. 이래서야 앞으로 네 생각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너와 혼인하려는 공자가 없을 텐데, 잘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고모님,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 이번 생에는 소청오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소청오가 이미 대학사의 적녀인 장완과 약혼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느냐? 장완의 중상이 아직 낫지 않았다. 소청오가 파혼하고 너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장완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지. 만약 네 말대로 소청오가 그렇게 좋은 사내라면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너는 이미 소청오밖에 없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으니, 앞으로는 어쩌면 좋으냐?”
“장완은 병세가 깊습니다. 게다가 의원이 말하기를 복부를 심하게 다쳐서 앞으로 아이를 낳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였습니다. 이건 둘째 치고, 요 며칠 장완이 소씨 가문에 파혼을 요구했다는군요. 장완이 직접 정혼을 포기한 것이니 소청오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장공주는 작게 웃었지만, 봉황을 닮은 눈에는 차가운 빛이 맴돌았다.
“모두 계획하고 찾아온 것이구나.”
“고모님, 저와 소청오의 사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장공주는 황제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장공주가 말 한두 마디만 잘해 주면 육공주는 바로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몰랐다.
“부황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쩔 것이냐? 넌 소청오를 위해 무슨 일을 얼마만큼 할 것이지?”
육공주가 이를 악물었다.
“만약 부황께서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윤허하실 때까지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겠습니다. 소청오에게 시집갈 수 없다면 저는 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꿇어앉아 있다가 죽는 편이 나아요.”
황제는 더 크게 노했다.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
“제가 어찌 부황을 협박하겠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소청오를 좋아할 뿐입니다. 전에 사냥터에서 소청오가 저를 늑대 무리에게서 구해 줬지요. 그때 제 옷이 찢어져 있었기에 소청오와는 살갗까지 맞댄 사이입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것……! 넌 육공주다. 짐이 가장 아끼는 딸인 네가 염치를 모르고 입을 놀리는구나! 짐을 화나서 죽게 만들 셈이냐?”
장공주는 차가운 눈초리를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자식은 부모가 전생에 진 빚이라더니……. 황상, 너무 화내지 마세요. 회양은 이미 소청오와 함께하려고 굳게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두 사람을 허락해 주세요.”
회양 육공주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육공주는 고개를 들어 기대하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부황,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허락해 주세요.”
황제는 탄식했다.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니 소청오가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도 시집갈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게다가 누님께서도 저렇게 말씀하시니, 일단은 허락하마. 훗날 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소녀의 청을 윤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문원은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소씨 가문은 목숨을 부지한 셈이었다. 어쨌든 육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공주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벌하진 않을 터였다.
그때, 장공주가 소문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 대인, 육공주를 소씨 가문에 시집보낼 것이기는 하지만, 소씨 가문은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소. 맹 씨가 누군가를 모함하여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 충분하오. 맹 씨는 아주 악질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그런 품행으로는 공주의 시어머니가 되기에 부족하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거요. 내 말을 이해했소?”
장공주의 말을 들은 소문원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제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에야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누님의 말이 맞소. 육공주를 봐서라도 소씨 가문의 체면은 남겨 주리다. 맹 씨는 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겠으나, 절대로 공주의 시어머니가 될 자격은 없소. 또한 그대는 조정의 관원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으니 오늘부터 이부 상서의 직위를 박탈하고, 내각(内阁)의 시독학사(侍读学士)로 강등하겠소. 앞으로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땐 짐이 매정하다고 탓해도 소용없소.”
소문원은 덜덜 떨며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 황상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강등당하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가문을 지킬 수만 있다면, 훗날 반드시 재기할 기회가 오리라.
“그리고 진왕, 넌 짐이 시키는 일에만 신경 쓰도록 해라. 종일 이 일 저 일 생각하지 말고.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월왕, 너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명색이 황자인 네가 조정 관원의 저택에 쳐들어가? 물론 이유야 있었다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반년간 녹봉을 감봉받고, 열흘간 근신하며 잘못을 반성해라. 다른 의견이 있느냐?”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황공합니다.”
“모두 물러가라. 시끄러운 것이 아주 꼴이 말이 아니구나.”
“네.”
사람들이 물러간 후, 황제는 급격히 피곤을 느꼈는지 미간을 문질렀다.
“어느 한 놈도 짐의 근심을 덜어 주는 자식이 없군요.”
“원래 근심은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합당한 처사를 내렸으니 황상도 계속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게다가 자신의 복은 하늘에서 정하신 것이니, 각자 알아서 하게 두면 됩니다.”
“짐도 더는 아이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회양에게는 실망이 큽니다. 짐이 그렇게 아꼈거늘, 그깟 소청오 하나 때문에 불효를 저지르다니…….”
“소문원의 됨됨이는 모자라지만, 아들인 소청오는 꽤 괜찮습니다. 어쩌면 훗날 두 사람이 아주 행복하게 잘 살지도 모르기는 해요.”
“휴……. 이미 알겠다고 했으니 한 번은 소원을 들어주렵니다.”
“그럼 가서 환복하고 오세요. 요 며칠 입맛이 영 없어 보이셔서 특별히 약이 되는 식사를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가서 함께 드시죠.”
“좋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황상, 제가 황궁으로 돌아온 지도 꽤 됐습니다. 그런데 공주부가 계속 비어 있어서 꼴이 말이 아니더군요. 잠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어찌 갑자기 나간다고 하십니까? 혹 누가 누님을 언짢게 했습니까?”
“궁궐 사람들은 저를 무척 공손하게 받들어 모십니다. 누가 감히 저를 성가시게 굴겠어요? 한동안 서릉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돌아가서 집을 살펴보기도 하고, 허연을 위해 향을 피우며 위패를 닦을 생각이에요.”
그 말은 들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공주부는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누님이 그리울 때마다 만나기는 수월할 것이었다.
“좋습니다. 사람을 보내 공주부를 확인하라고 하죠. 언제 이사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빠른 것이 좋겠죠. 이틀 안에 가겠어요.”
“그렇게 급하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사람을 보내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 * *
목운요는 이틀 동안 여러 집의 도면을 자세히 살펴보다 마침내 집 하나를 골랐다. 경릉성 집의 구조와 비슷했고 앞뒤에 뜰이 있었다. 경치가 들쭉날쭉했지만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특히 앞마당에는 큰 연못 하나가 있었는데, 분명 여름이 오면 연잎이 만개하고 연꽃이 흐드러질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곳 같았다.
목운요와 소청은 정원을 한 바퀴 훑어본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면 두 사람과 함께하던 곡 마마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부인, 소저, 이곳의 정원은 너무 작지 않습니까?”
“저와 어머니 두 사람만 살면 되니 작지 않습니다. 정원의 경치도 아주 빼어나, 연못 옆에 붉은 계수나무를 심으면 신선이 사는 곳처럼 경치가 멋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침 공주부도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소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를 따라다닌다고 곡 마마께서 고생이 많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소인이 전생에 덕을 쌓아 부인과 소저를 모시나 봅니다.”
집을 고른 후, 소청과 목운요는 곧장 하운방에서 나올 준비를 했다.
한편 서릉 사람들은 소문의 주인공인 소씨 가문과 목운요를 주목하고 있었다.
소씨 가문은 육공주의 간청 덕분에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소문원은 이품 이부 상서에서 사품 내각 시독학사로 강등되었다. 노부인은 몸져누워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독사 부인 맹 씨는 소씨 가문 대부인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비록 맹 씨의 몸뚱이는 소씨 가문에 있을지언정 지위는 첩보다 못하게 되었다.
이번 일로 소씨 가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앞으로 큰 공을 세우지 못하면 마음 놓고 살기 어려울 것이었다.
반면 소청과 목운요는 소씨 가문을 떠난 후로 어떤 문제도 겪지 않았다. 특히 목운요는 장공주의 눈에 들어 외손녀로 내정되고 정식으로 봉해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벼락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