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하운방과 불선루의 개업
깊은 밤, 정신을 잃었던 제명이 깨어났다. 그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문가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릉왕이 걸어 들어왔다.
제명은 대경실색했다.
“릉, 릉왕 전하…….”
“날 알아보는 것 같은데, 그것참 신기하군. 자네는 상인이 아니던가? 어찌 나를 알고 있지?”
제명은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장소임을 깨닫자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잡히고 말았으니, 저를 죽이십시오.”
“내가 자네를 죽여서 화를 풀 생각이었다면 왜 의원을 불러 자네를 치료하라고 했겠나?”
제명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가, 심한 통증을 느끼고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저를 죽이려 하셨다가 다시 살리라 하시다니……. 설마 제게 은혜를 베푼 후에 매수하실 생각입니까?”
릉왕이 인상을 썼다.
“난 자네를 죽이라고 명한 적 없네. 오히려 자네를 죽이려고 쫓아오던 자객 놈을 죽이고 자네를 살리라 명했지. 진정으로 자네를 죽이려 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나?”
“그럼…… 릉왕 전하가 아니셨단 말씀입니까?”
제명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설마…… 아닐 겁니다……!”
릉왕은 그런 제명을 보며 웃었다.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군. 자네를 죽이려 한 사람은 바로 자네 주인인 진왕일세.”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진왕 전하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했사온데……!”
제명이 이를 악물고 분통을 토했다. 지혈이 덜 된 가슴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릉왕 전하……. 일부러 저를 떠보시는 건 아닙니까?”
“보아하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것 같네만?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던진 질문 하나에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리 없지.”
이에 제명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릉왕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릉왕은 옆에 서 있는 총관에게 분부했다.
“제 선생을 잘 돌보게. 제 선생이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 * *
이틀 후,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릉의 백성들은 너도나도 하운방의 개업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가, 문 앞에 세워진 높은 무대를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무얼 하려는 걸까요?”
“잘 모르겠네요. 가무를 선보일 것 같기도 하고…….”
“여기는 자수방이잖아요? 가무와는 안 어울리지 않나요?”
이 층에 서 있던 목운요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인 것을 확인하자 고개를 돌려 채의을 바라보았다.
“시작해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돌연 관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눈처럼 새하얀 병풍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하운방 맞은편 주루의 이 층에는 유왕과 월왕이 앉아 있었다. 하운방의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유왕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대를 봤다.
“텅 빈 병풍을 내왔군.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건 병풍이 아니라 자수대로군요.”
유왕의 두 눈이 커졌다.
“자수대라고? 설마 즉석에서 저렇게 큰 곳에 자수를 놓는 건 아니겠지?”
저 규모에 수를 놓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걸릴 터였다.
아래 있던 백성들도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무대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몸매가 고운 열 명의 여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여인들은 오색찬란한 자수 실을 손에 걸고 손끝에는 반짝이는 자수바늘을 쥔 채 음악 소리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췄다. 비단 치마가 선율에 따라 휘돌며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
그때, 누군가 놀란 듯 소리쳤다.
“다들 저 비단을 봐요!”
여인들이 눈처럼 하얀 비단을 소매로 한번 훑어 내자 그 위에 빠르게 색이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온갖 색이 다소 난잡하게 번져 무슨 모양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서히 그림의 모양새가 또렷해져 갔다.
“비천미인도(飞天美人图)로군…….”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춤을 추는 미인의 모습, 봄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꽃을 따는 미인의 모습, 물가에 고요히 서 있는 고고한 미인의 모습, 창가에 기대어 처연하게 눈물을 떨구는 미인의 모습까지……. 그림이 한 폭, 한 폭 선명해져 갈수록 미인들도 점차 늘어났다.
사람들은 서서히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 소리가 느려지자 사람들의 말소리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비단 속 미인들의 처연함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무대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자수대가 무너지고 비단이 땅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치기도 전에, 땅에 떨어진 비단 뒤로 한 여인의 그림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등지고 섰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풍성하고,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와, 선녀가 속세에 내려왔어…….”
뒷모습만 내비쳤을 뿐인데, 사람들은 눈앞의 여인이 비단 속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이, 여인은 느리게 몸을 돌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인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꽃잎이 흔들리며 옅은 향기가 퍼졌다. 기다란 비단이 곁에서 펄럭이니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한편, 주루에서 구경하던 유왕은 아예 창가에 몸을 기댔다.
“저 여인의 춤추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궁중의 무희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목 소저는 어디서 저런 미인을 찾아온 것이냐?”
월왕의 눈에는 옅은 웃음이 스쳤다. 이 정도면 하운방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때, 음악 소리가 멈추고 바닥에 떨어졌던 비단이 천천히 솟아오르며 무대 위 여인의 모습을 가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봤으나, 미인은 사라져 버리고 눈앞엔 비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아름답군요…….”
사람들이 넋을 잃어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이, 하운방 문 앞의 무대가 철거되었다. 일꾼들은 바닥까지 말끔히 치우고 나서야 사라졌다.
“끝난 걸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할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왠지 허전하네요.”
이 층으로 올라온 채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유난히 반짝였다.
“소인이 소저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아 다행이에요.”
“오늘부터 당신은 하운방의 점주예요. 그러니 내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낮춰 부를 필요 없어요.”
목운요가 칭찬의 뜻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으나 채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인의 몸이지만,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는 갑절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소저께서 저를 고통 속에서 구제하셨으니, 저는 응당 소저의 노비입니다.”
그에 목운요는 어쩔 수 없이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릉의 부인들 성정에 대해선 이미 자세하게 알려 줬죠? 당신의 지혜와 재능이라면 접대에도 큰 무리가 없을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억울한 일을 참으면서까지 입을 닫을 필요는 없어요. 괴롭힘을 당하거나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언제든 소씨 가문에 와서 나를 찾아요.”
“알겠습니다. 부디 염려 놓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찾아왔다. 목운요는 채의가 제법 꼼꼼하게 손님을 맞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한편 불선루는 폭죽만 터뜨리며 조용히 개업했다. 부두와 성문, 저잣거리에도 몇 개의 노점 찻집이 열렸다.
노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모두 노인이거나 장애가 있는 자들이었다. 불선루에서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 노점 찻집을 열게 해 주고, 필요한 모든 비용을 대 준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목운요가 자선 사업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긴 했지만, 개업 첫날부터 백성들을 도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불선루의 명성이 온 서릉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하운방의 명성도 덮어 버릴 정도였다.
* * *
황제는 붓을 들고 높이 쌓인 상소문을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밑에는 목운요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에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오늘 아침, 목운요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궁으로 찾아오라는 명을 전해 듣고 입궁하여 예를 올렸는데,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목운요를 반 시진이나 그대로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탁상의 상소문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지막 상소문을 덮은 후에야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라.”
목운요는 고개를 들며 웃었다.
“황송하옵니다, 황상.”
하지만 그녀가 일어나진 않자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일어나라고 했는데 일어나지 않는 것이냐? 짐이 너를 벌했다고 원망하는 것이냐?”
목운요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 다리가 저려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황제의 두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서립, 어서 목운요를 부축하지 않고 뭐 하느냐?”
“네, 황상.”
서립은 재빨리 아랫사람에게 목운요를 부축하라고 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목운요는 잠시 휘청였다. 두 다리가 마비되어 아무 감각이 없다가, 조금 지나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장장 반 시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황제가 목운요의 안색을 살폈다.
“짐이 왜 입궁하라고 했는지 아느냐?”
목운요는 진심으로 그 이유를 몰랐기에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모르겠사옵니다.”
“네 죄를 묻고 너를 벌하라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는지, 목운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전 그저 보잘것없는 일개 백성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장사치에 불과한데 저를 벌하라뇨?”
목운요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황제는 그 모습에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너의 어떤 죄를 책망하라 했는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