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작은 체구의 환관
“너희는 모두 내 아들이다. 형제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 절대 서로의 생명을 위협해선 안 된다. 만약 너희 중 누가 형제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놈이 누리는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옷을 입고 나가 봐라. 며칠째 두통이 가시질 않는구나. 태의들은 짐을 위해 약을 만들고 있으니 괜히 태의를 성가시게 굴지 마라.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물러가라.”
월왕은 옆에 놓인 옷을 걸치고 예를 갖춘 후 밖을 향해 나갔다. 그의 등은 완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저절로 땅에 널브러진 피 묻은 회초리로 향했다. 황제는 몸을 숙여 회초리를 집어 들었다.
“……누님, 짐이 잘못한 것입니까?”
그가 장공주에게 질문하며 힘껏 회초리를 쥐었다. 회초리의 가시가 황제의 손바닥에 박혔다.
그러자 장공주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손을 폈다.
“왜 또 사서 고생을 해요? 비록 매질은 황자들에게 내렸지만, 황상의 가슴에도 그 고통이 박히지 않았습니까? 아비 된 사람이 자식을 훈계하는 건 틀린 일이 아닙니다.”
“제 말뜻은 누님도 아시잖습니까? 군월이……. 그 아이를 월서로 보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려서 어미를 잃었는데 아비라는 사람은 제 노릇도 하지 못했으니……. 월서에서 지내는 동안 분명 많은 고생을 했겠지요. 저렇게나 차가운 사람으로 자라지도 않았을 겁니다.”
“과거의 잘못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조금씩 고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제는 차가운 월왕의 얼굴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마음이 미어졌다.
“누님, 짐이 미안한 마음을 보였는데 군월이 무시하면 그땐 어찌합니까?”
“군월이 감히 그런다면 이 누이가 대신 혼내 주겠습니다. 하지만 군월은 언제나 황상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매년 황상의 생일에만 골라서 서릉으로 돌아왔겠습니까?”
황제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군월이 효심이 있어요. 다만 이번에는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형제들과 함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장공주가 빙긋 웃었다.
“황상께서 금위군들에게 네 사람을 때리는 세기를 달리하라고 미리 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이건 삼황자에게 내리는 훈계이니까요. 한 번의 잘못으로 삼황자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고자 했습니다.”
장공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육체의 고통은 잠깐뿐이라 상처가 나으면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지요. 진심으로 삼황자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다른 방향에서 방법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도 대단한 생각이 있는 건 아닙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황상 스스로 찾으셔야 합니다.”
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육체의 고통은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태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지만, 곁에 시중드는 자가 많으니 며칠이면 금방 상처가 나을 것이다. 정말로 황자들이 고통스러워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손안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리라.
* * *
진왕이 막사로 돌아오자 곧장 시녀들이 다가와 약을 발라 주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진왕은 탁상 위의 약병을 모조리 바닥에 던지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나가라!”
시녀들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신속히 물러났다.
표정을 일그러트린 진왕은 한참 후에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과연 부황은 부황이시군.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모두 조사해 내시다니.”
다시는 오늘처럼 경솔해선 안 되었다.
* * *
월왕의 막사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왕이 월왕을 잡고 나무랐다.
“넷째야, 바보처럼 부황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아라. 태의야 부황 밑에서 바쁘다 해도, 태의의 제자들은 지금 한가할 것이다. 등을 좀 봐 달라고 해도 문제 될 것 없다.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 좋을 게 없어.”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형님도 돌아가셔서 상처를 치료하시지요.”
“그래, 조심히 가거라.”
막사에 도착한 월왕이 막 문을 젖히고 들어가려는데 한쪽 그늘 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월왕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냐?”
그에 작고 가냘픈 몸의 환관 한 명이 걸어 나오더니 인사를 올렸다. 모자 때문에 환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월왕의 눈빛이 이내 은은한 온기를 띠었다.
“일어나라. 마침 내가 상처를 입었으니 들어와서 치료를 좀 해 다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우항이 서둘러 약상자를 들고 왔다.
“전하, 제가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환관은……? 앗, 목……!”
환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우항이 놀라 소리를 지르려다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목 소저?’
환관 모자를 벗자 땋아 올린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진주 비녀가 없으니 얼굴이 더 가냘파 보였다.
“전하의 치료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시위들에게 막사 앞을 지켜 달라고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항이 눈치 빠르게 밖으로 물러났다.
월왕의 옷 뒤에 비치는 핏자국을 보고 목운요는 속상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황상께서 너무 심하게 벌하셨습니다.”
“겉보기에만 심해 보이는 것이다. 아무래도 부황께서 우리는 세게 때리지 않도록 지시하신 것 같다. 아마 셋째 형님께선 며칠 동안 침상에 누워 몸조리하셔야 할걸.”
“황상께선 이런 벌로 진왕을 다스리신 겁니까?”
월왕을 모함하려고 맹한동을 죽인 죄는 절대 작지 않았다. 만약 결백함을 밝히지 못했다면 월왕은 큰 손해를 당했을 터였다.
“곧 부황께서도 다른 방법을 마련하실 거다. 곁에서 고모님이 조언해 주실 테지.”
“공주 전하께서요?”
“그래.”
월왕이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바라보더니 점차 몸을 기울였다. 그에 목운요가 급히 월왕의 어깨를 잡아 바로 앉혔다.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먼저 피를 닦은 후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차가운 손이 어깨에 닿자 월왕은 심장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고모님께서는 수년간 서릉을 벗어나 계셨지만, 그간 조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잘 알고 계시지. 이번에 서릉에 오신 건 잃어버린 딸을 대신할 여자아이를 찾으시려는 것도 있지만, 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려는 다툼의 징후를 파악하기 위함도 있으실 거야.”
목운요의 손이 멈칫했다.
“그랬군요. 공주 전하께선 세속의 분란에 전혀 관심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나만 아니었다면 고모님께서도 서릉의 일에 개입하진 않으셨을 거다. 말하고 보니 정말 송구스럽구나.”
순간 목운요는 장공주께서 월왕이 황좌에 앉는 것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자 월왕의 눈에 웃음기가 배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목운요가 고개를 들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제 예상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번 들어나 보자.”
“아닙니다. 제 예상이 틀리면 전하께 웃음거리만 되지 않겠습니까?”
월왕은 따뜻한 눈길로 목운요의 얼굴을 응시했다. 촛불의 따스한 빛이 비치니 더욱 아름다웠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의 얼굴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사이 목운요는 신속하게 월왕의 등에 난 상처를 모두 치료했다.
“전하, 몸 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지금껏 자주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부터 주의하시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하실 겁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하겠다.”
월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기꺼이 응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맹씨 가문 손해가 막심하겠네요. 맹언연은 사약을 받았고, 맹한동은 암살당했고, 맹우는 관직을 박탈당했잖아요? 서릉으로 돌아가면 맹 태사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시겠지요.”
“부황께서 이렇게 하신 데는 맹씨 가문에 경고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으셨을 거다. 맹씨 가문이 스스로의 위치를 잘 헤아려서 가문의 명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셨겠지.”
“황상의 깊은 뜻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이렇게 철저하지 않으셨다면 백성들이 떠받드는 성군이 될 수 없으셨을 거다.”
좀 더 대화를 나눈 뒤, 목운요가 일어나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번에 저희 어머니를 구해 주시다 얻은 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이번에 또 다치셨으니, 며칠간은 몸조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그래, 데려다주마.”
목운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전하께서 데려다주시면 너무 눈에 띌 겁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서가 기다리고 있으니 위험하지 않습니다.”
“오늘 부황께서 진노하셔서 신하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쯤 다들 막사 안에서 숨죽이고 있겠지. 감히 헛소리를 떠벌릴 자는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월왕은 곧장 일어나서 막사 입구에 걸린 장포를 목운요에게 직접 둘러 주었다.
“어서 가자. 널 데려다줘야 나도 얼른 쉬지.”
머리 위에 따뜻하고 묵직한 감촉이 전해지자, 목운요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녀의 볼에 홍조가 번졌다. 아무리 완강히 거절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서둘러 밖을 향해 걸었다.
월왕은 목운요를 막사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돌아갔다.
목운요가 돌아오자 금란이 서둘러 맞이했다.
“소저, 무슨 일 없으셨죠?”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었다. 금란이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월왕 전하의 옷이야. 내일 돌려드려야 해.”
금란은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네. 그러면 따뜻한 물을 받아 와 세면을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