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월왕의 기준
“완벽하게 변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예리하십니다.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추수 때 양식을 사들였습니다. 진 총관께 필요할지도 몰라서요.”
그러고 보니 곧 겨울이라 월서에서 생강차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그래, 잘했어.”
“모두 소저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목운요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제명에게 물었다.
“습보헌은 요즘 어떠하지?”
“순조로운 편은 아닙니다.”
목운요의 주도면밀한 계획 덕분에 제명은 소금세 사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습보헌은 윗선의 이목을 크게 끌었기에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사실 너와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어. 어쩌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나와 함께할 생각이 있느냐?”
제명은 냉큼 무릎을 꿇었다.
“소저의 분부라면, 전력을 다하여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 네 충성심은 믿고 있어.”
목운요는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은 아니나, 유독 육냥과 그가 데려온 자들에겐 믿음이 갔다.
“제명, 습보헌을 대황자 릉왕에게 진상하여 그분의 사람이 되어라.”
제명은 고개를 들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였지만, 눈빛과는 달리 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소저.”
“이번에 다행히 소금 사건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언젠가는 대황자가 네 신원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습보헌을 키우고 싶다면 대황자에게 붙는 수밖에 없어. 대황자의 습보헌을 향한 미움을 없애야 발전할 기회를 얻을 테지.”
“알겠습니다. 하오나 일전에 제가 강남의 소금 사건에 개입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대황자께 붙어도 되겠습니까?”
목운요가 옅게 웃었다.
“릉왕에게 붙으라고는 했지만 다짜고짜 찾아갈 순 없지. 네가 접근하는 걸 의심받지 않을 만한 핑곗거리를 찾아야 해. 요즘 삼황자 진왕이 세력을 키우는 추세라, 릉왕도 마음이 조급하여 인맥 싸움을 하려 들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재물이 필요하겠지.”
제명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운요는 말을 이어 갔다.
“강남 소금 사건으로 릉왕은 막심한 손해를 입었어. 그러니 너는 우선 진왕의 사람으로 위장하여 릉왕에게 접근하는 거야. 네가 진왕의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반쯤 훼손된 진왕의 친필 서신과 십만 냥이 넘는 은자를 주마. 그럼 릉왕도 완전히 널 믿을 거야.”
목운요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그녀의 눈빛은 보는 이도 마음이 놓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제명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온 힘을 다하여 습보헌을 키워 가겠습니다.”
“그래.”
대화가 끝나자마자 문어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가로 시선을 돌리니 월왕이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눈치 빠른 제명은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운요는 미소 지으며 간단히 예를 올렸다. 깍듯하게 예를 지키며 거리를 두던 예전보다는 훨씬 편해진 모습이었다.
그에 월왕의 눈이 반짝였다.
“네가 소씨 가문에서 나왔다기에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다.”
“소식 한번 빠르군요. 하지만 이곳의 시공이 끝나지 않아 차 한잔 대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월왕은 미소 짓는 목운요를 눈에 담았지만, 봐도 봐도 모자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제 심장에 넣어 둘 순 없는 노릇이라 그저 자세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나간 건 제명인가?”
“맞습니다. 제명에게 습보헌을 릉왕 전하에게 바치고 그의 사람이 되라고 하였어요. 그러면 습보헌이 발전할 기회를 얻을 테니까요. 혹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월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목운요는 정도를 알며 제 의견 없이도 스스로 잘할 아이였다.
“그럴 리 있겠느냐? 내 도움이 필요하진 않고?”
“도움은…….”
목운요는 곧장 거절하려 했으나, 문득 좋은 제안을 거절하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마침 사람을 죽여 증거를 입막음하려는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도와주시겠어요?”
“이 일을 누구에게 덮어씌우려는 것이냐?”
“진왕입니다.”
목운요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월왕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사실 월왕이 저를 도우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조정의 황자들이 서로 사납게 싸우고 있었지만, 그 기세가 월서에 있는 월왕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어쩌면 월왕이 황자들을 자신의 형제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월왕은 긴장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목운요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목운요의 미간을 ‘톡’ 하고 쳤다.
놀라 넋을 놓은 목운요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손으로 제 이마를 가렸다.
“그래, 알겠다. 사람을 준비하마.”
목운요는 눈을 깜빡였다. 생경한 손이 제 미간을 누른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것을 보니 내상이 회복되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에 월왕은 정말로 내상이 회복되지 않은 것처럼 여상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네 말대로 한동안 몸조리에 신경을 써야겠다.”
그런 월왕을 보고 목운요는 괘씸함을 참지 못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몸이 다 낫기 전까진 다른 여인에게 괜히 가까이 가지 마시고요. 다른 여인에게도 지금처럼 멋대로 구셨다간 호색한으로 몰릴 겁니다.”
“내가 가까이하는 여인은 오직 너뿐이다.”
그저 월왕을 골려 줄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목운요의 두 뺨에 살포시 홍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젠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아시는군요. 예전에는 매번 말을 아끼셨으면서.”
“이런 말도 사람을 가려서 하는 거다.”
목운요는 빤히 월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멋대로 요동치는 가슴을 있는 힘껏 억누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럼 전하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가리십니까?”
조금 전엔 목운요가 부끄러워하고 월왕의 안색이 태연했던 반면, 이번에는 목운요가 월왕을 긴장하게 했다.
월왕은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너와, 남이다…….”
목운요는 월왕의 말에 멍하니 넋을 놓았다. 너와 남……? 월왕에게 목운요가 아닌 나머지는 모두 말도 섞지 않는 남이란 말인가?
가게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목운요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어 화제를 돌렸다.
“제명을 어떻게 도울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목운요의 모습에도, 월왕은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쪽에 심어 놓은 첩자들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철수시킬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써먹을 수 있겠구나.”
“첩자요? 전하께서는 월서에서 지내셔서 서릉의 일에 신경 쓰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황가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형제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언가는 있어야지. 게다가 조사해야 할 과거의 일이 있어 반드시 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목운요는 살짝 눈을 치켜떴다. 월왕을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정에 전하의 인맥이 있는지요?”
월왕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 이름이라도 써서 보여 주리?”
“제가 다른 사람이 보낸 첩자여서 일부러 전하를 떠보는 거면 어떡해요? 두렵지 않으세요?”
“전혀. 난 너를 믿는다.”
월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목운요를 보는 그의 눈빛은 확고하기만 했다.
목운요는 의심이 많았기에 천천히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속을 갈라 드러내고, 궁금해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줘야 혼자서 끙끙거리며 의심할 일이 없을 것이다.
목운요는 월왕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알아서 잘 준비해 주세요. 그보다 릉왕 전하가 제명을 믿게 만들려면 많은 은자가 필요한데, 제가 쓴 은자만큼의 돈을 다시 벌어들여 주세요.”
월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깊은 두 눈에 별이 부유하는 것 같았다.
“알겠다. 잘 준비해 보마.”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목운요는 귓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테니 전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잠깐.”
월왕은 옆에 놓인 외투를 들어 목운요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가을 사냥에 나가면 맹씨 가문 사람들을 조심해라. 그들은 맹 태사와 청녕 공주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지. 사냥터에서 그들이 너를 괴롭히는 건 아닐지 걱정되는구나.”
목운요는 두어 걸음 물러나려 했으나, 괜한 꼴을 보이는 것 같아 일부러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그리고 대부인이 매수한 건달들의 정보를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놈들이 죽어 버렸으니 대부인을 단죄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청녕 공주도 중간에서 중재하려고 할 게 뻔하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원래는 진 총관을 서릉으로 부를 생각이었다만, 그가 오면 강남의 불선루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성 공공을 대신 부를 생각이다. 성 공공도 나를 오랫동안 돌본 사람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니 나중에 보고 놀라지나 말아라.”
목운요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렇게 겁많은 사람 같던가요?”
월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목운요의 붉은 미간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든 너무 강한 척은 하지 마.”
맑고 찬 기운이 가게 안을 감쌌다. 목운요는 긴장한 탓에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하?”
월왕이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내가 무례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 봐라.”
목운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간 후에야 마음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곧 금란과 금교가 냉큼 다가왔다.
“소저, 다 돌아보셨나요?”
“네, 이만 돌아가요.”
마차에 오른 후, 금교는 의아한 얼굴로 목운요를 바라봤다.
“소저, 미간 근처가 붉습니다. 어디 부딪히셨어요?”
목운요는 손을 들어 미간을 만졌다. 서늘한 손끝이 닿았을 때의 짜릿함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별일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