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불운을 앞둔 소씨 가문
소우의가 돌아오자마자 온 집안이 떠들썩했으니 그 소식이 노부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한참 동안 염주를 굴리던 노부인 손 씨가 입을 열었다.
“목운요……. 내가 그것을 너무 쉽게 봤어. 어린 것이 감히 상서부에 도전장을 내밀다니. 온 마마, 자네는 오랫동안 내 옆에서 시중을 들었지. 내가 어찌하면 좋을 것 같나?”
“저는 부인만큼 지혜롭지 못하여 함부로 아뢸 수 없습니다.”
입 안을 씹는 건지 노부인의 볼이 씰룩였다.
“가서 의원을 불러오라고 하게. 나는 두통이 도져서 이틀간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고. 가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게 알릴 필요는 없네. 가문이 떠들썩하니 괜히 성가시단 말이지.”
“네, 노부인.”
동원의 대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우의야, 네 할머니의 뜻을 보렴. 당분간 가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어미 마음대로란다. 두고 보렴. 이번엔 목운요를 지켜 줄 사람이 없을 거다!”
* * *
보화사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황상은 장공주의 안위가 걱정되어 곧장 호위병을 보냈다.
이로써 보화사 화재 사건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적지 않은 관료 집안의 여식들은 보화사로 향했다. 설령 장공주를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자신의 존경심을 보일 기회였다.
곡 마마는 들고 온 찻잔을 내려놓고 낮은 소리로 장공주에게 아뢰었다.
“전하, 목 소저가 왔습니다. 불경 필사를 끝마쳤다고 합니다.”
장공주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가서 불경을 받아 와라. 내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퍼졌으니 목운요는 만나지 않겠다. 괜히 그 아이만 피곤해질 테지.”
“네.”
마당에서 기다리던 목운요는 곡 마마가 나오는 것을 보고 예를 차렸다.
“곡 마마께 예를 올립니다.”
“목 소저, 이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마세요. 공주 전하께서 불경을 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전하셨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곡 마마는 불경을 건네받고 목운요에게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애초에 장공주의 눈에 들 생각이 없던 터라, 그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에 미련이 없었다.
곡 마마는 그런 목운요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고는 장공주에게 그대로 전달하였다.
“모두 내 눈에 들려고 안달인데, 목운요는 그러지 않으니 흥미롭군. 그보다 사황자는 어떠한가?”
“월왕 전하께선 괜찮으십니다. 태의에게 물어보니 목 소저가 건넨 약의 효능이 꽤 괜찮다더군요.”
장공주는 불경을 집어 들던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그럼 됐다.”
* * *
곁채에서 지내던 월왕은 시도 때도 없이 문어귀를 바라봤다.
월왕의 곁을 지키던 우항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전하, 목 소저는 장공주께 불경을 전하러 갔으니 이따 올 겁니다. 등에 난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우선 푹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항상 냉기만 뿜던 월왕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항의 말에 월왕은 돌연 차가워진 눈을 했다.
“그동안은 우의가 월서와 경릉성을 바삐 오갔지. 그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난 정작 우의를 푸대접한 것 같군. 우의를 서릉으로 불러 한동안 푹 쉬라고 전해라. 서신을 주고받는 일은 네게 맡기려고 하는데, 어떤 것 같으냐?”
우항은 쓸데없는 말을 한 제 입을 책망했다.
“하하, 우의가 어디 저만큼 똑똑하고 약삭빠르답니까? 우의를 옆에 두면 불편하실 겁니다.”
“우의는…….”
월왕은 말을 이으려다가, 문어귀에 진 그림자를 발견했다.
“전하, 목 소저가 왔습니다.”
우항은 냉큼 밖으로 뛰쳐나갔다. 때마침 찾아와 준 목운요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자신은 우의처럼 전서구 꼴이 났을 것이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목운요는 방으로 들어가 월왕에게 예를 갖췄다.
“사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쁘게 웃으며 인사하는 목운요를 보자 월왕은 괜히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 고모님을 만나러 갔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리 빨리 온 것이냐?”
월왕의 말을 들은 목운요는 더욱 짙게 웃었다.
“공주 전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바로 전하를 찾아온 것이랍니다.”
“고모님이 보화사에 계신 것이 알려져 서릉의 수많은 여인들이 이곳에 찾아왔지. 고모님이 만남을 갖지 않으신 건 널 위해서일 거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공주 전하를 만났다면 수많은 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겠죠.”
미소를 지은 목운요가 월왕의 곁으로 향했다.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가까워질 때마다 옅은 향기도 함께 느껴졌다. 목운요의 은은한 향은 월왕의 가슴에 더욱 불을 지폈다.
하지만 목운요는 그런 월왕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그의 등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확실히 어제보다 호전되어 있었다.
“회복이 빠르네요. 다른 약으로 바꿔 드릴게요. 며칠 더 요양하시면 상처가 잘 아물 겁니다.”
목운요가 무슨 말을 하든 월왕의 정신은 그녀의 향기를 맡는 코끝에 몰려 있었다.
목운요는 제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월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얼 생각하세요?”
월왕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네가 무슨 향을 뿌리고 왔는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월왕은 멍청히 말을 내뱉은 후 곧장 자신의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속으로 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어쩌자는 거냐!’
얼이 빠진 건 월왕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멍해 있던 목운요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 그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나 차가웠던 월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 보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운요의 가벼운 웃음소리를 들은 월왕은 더욱더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는 또다시 주먹을 입가에 대고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내상(内伤)을 입은 것 같다. 정신이 자주 오락가락한단 말이지.”
꽤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는 월왕을 보자 목운요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께름칙함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느리게 월왕 옆 의자에 앉아 소매를 들고 향을 맡았다.
“요 며칠 보화사에서 기도를 드리며 정성을 보이기 위해 매일같이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그래서 향이 나는 겁니다.”
월왕은 우항을 손봐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다 그놈이 헛소리를 지껄여서 마음이 흐트러진 탓이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꼴이라니…….
“하오나…….”
목운요의 입에서 세 글자가 흩어지자 월왕은 더욱 초조해졌다.
“제가 조향하는 법을 알긴 합니다. 사황자께선 어떤 향을 좋아하시나요?”
“내가 좋아하는 향을 말하면, 그 향을 뿌리고 다닐 것이냐?”
목운요는 장난기 짙은 웃음을 내보였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못 할 것도 없죠.”
돌연 월왕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환한 눈빛이 일순간 햇살처럼 목운요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일전에 네게서 나던 훈향(薰香)이 정말 좋았다.”
“마음에 드신다면 나중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목운요는 예전처럼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친근한 투로 말했다. 그에 월왕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상처가 많이 나으셨으니 앞으로는 잘 쉬시기만 하면 될 겁니다. 저는 불경을 다 베껴 썼으니 짐을 정리하고 내일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목운요가 ‘소씨 가문’이라는 말을 꺼내자 방 안의 화목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월왕은 크게 낙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운요와 좀 더 친해지길 바란다면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 되었다.
“소씨 가문에서는 너를 호되게 벌하려고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인은 수완이 만만치 않은 분이시지요.”
“대처할 방법은 생각해 놓았느냐?”
“보화사에 오기 전, 소씨 가문 문 앞에서 소란이 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벌을 주었던 두 하인이 쫓겨난 후 비슷한 시기에 죽어서 그 가족들이 찾아와 소동을 피웠지요.”
“그래. 네가 그 가족들에게 은자를 주었다면서?”
“네. 유 노파의 아들은 그나마 착했지요. 하지만 왕 노파의 아들은 완전히 그 지역의 무뢰한이라서 제가 나중에 사람을 시켜 은자를 도로 빼앗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노름빚이 쌓여 생활이 무척 궁핍할 겁니다.”
월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왕 노파의 아들을 이용해서 소씨 가문에 일을 만들려는 것이냐?”
“소씨 가문은 이제껏 제게 해를 끼치려는 수작을 부렸습니다. 그러니 저도 소씨 가문의 위대한 공적을 응당 널리 알려야지요. 이제 왕 노파의 아들이 순천부(顺天府)까지 일을 퍼뜨릴 겁니다.”
“순천부? 좋은 생각이군. 순천부의 부윤(府尹, 부의 우두머리) 심병괴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기에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 크고 작은 사건을 가리지 않지. 부황께서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실 정도이니, 소씨 가문도 한동안 골치가 아플 거다.”
“이건 첫 번째 방법이고, 다른 계획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인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대부인을 현혹할 미끼는 이미 던져졌다. 한번 물고 나면 발버둥 칠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서신을 보내어라.”
보아하니 목운요는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자신도 한두 가지 방비는 해 놓아야 했다. 그래야 빠른 협조가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