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보화사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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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목운요와 소청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 이부인 척 씨가 환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운요, 네가 근래 불경 필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내게 최고급 계지향(桂芝香) 먹이 있어서 네게 주려고 왔지.”
이부인은 시녀가 들고 온 자그마한 목함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목함 안에는 흑옥색을 띠는 고급스러운 먹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목함을 건네받은 목운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너무 귀중한 선물이에요.”
“선물이 아무리 귀중한들 사람보다 중요하겠니? 우리 우를 돌봐 주어 고맙구나.”
어제부터 갑자기 부드러워진 소우의 태도에 이부인은 마치 꿈속에 있는 듯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잠들었을 때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소우의 변화가 목운요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니 감격이 물밀 듯 밀려왔다.
“우 언니도 저에게 잘해 주시는걸요. 서로 보살피는 거죠.”
“그래. 자매지간이니 서로 왕래하며 돌봐 주는 거 아니겠어?”
목운요는 살짝 놀라더니 곧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부인의 얼굴에 드리운 웃음기가 점점 더 깊어졌다.
“먹만 전해 주러 온 거다. 더는 네 시간을 빼앗지 않으마. 그 많은 불경을 베껴 쓰려면 얼마나 힘들겠니?”
“외조부를 향한 효심이니 많이 쓸수록 좋지요.”
이부인은 목운요의 손을 감싸고 가볍게 두드렸다.
“난 이런 네 성정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그래,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 어서 쓰렴.”
목운요는 이부인의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은 채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 * *
목운요는 며칠을 꼬박 공들인 끝에, 외조부의 기일 하루 전에 불경 필사를 겨우 마쳤다. 금란에게 필사본은 상자에 잘 보관하라고 분부했다.
이제 막 휴식을 취하려는데, 금교가 소아한이 왔다고 아뢰었다.
목운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아한이 찾아온 이유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
얼마 전, 소우의는 병으로 몸져누웠다. 하지만 사실은 문을 걸어 닫고 대부인이 구해 온 여인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소우의가 ‘몸져누워’ 보화사에 갈 수 없으니, 그 자리를 소아한 등이 대신해야 했다.
소아한은 들어와 예를 갖춘 후 바로 입을 열었다.
“운요 동생, 어머니께서 내게 고모와 동생을 데리고 보화사로 가라고 하셨어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 말고 또 누가 가나요?”
“아버지와 둘째 숙부는 공무가 있어 시간을 낼 수 없으시고, 큰오라버니가 휴가를 내서 저희를 보화사로 데려가실 거예요. 원래는 큰언니도 함께 가야 하지만 아직도 몸 상태가 좋지 않나 봐요.”
목운요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올해는 저와 어머니가 가문으로 돌아온 첫해이니 외할아버님을 위해 경을 읊고 기도를 드려야지요.”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목운요 일행은 마차 옆에서 기다리는 소청오를 보았다.
소청오는 앞으로 다가와 소청에게 예를 갖추었다.
“고모께 인사 올립니다. 보화사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조금 인내해 주십시오.”
“괜찮다.”
말을 마친 소청은 목운요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준비된 마차는 총 두 대였다. 한 대에는 목운요와 소청이 타고, 또 다른 한 대에는 소아한 자매가 탔다. 마차 안은 쾌적하고 넓어서 각자 데리고 온 시녀들을 태우고도 자리가 남았다.
소청오가 말에 올라타자, 이내 마차들이 출발했다.
사금이 차를 우려 소청과 목운요에게 내밀었다.
“부인, 소저. 보화사까지는 한 시진 정도 걸리니 그간 좀 쉬세요. 게다가 도착하면 삼 일은 꿇어앉아 계셔야 하니 무척 힘드실 겁니다.”
목운요는 순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화사에서 기도를 드릴 때 조금이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순식간에 불효녀라는 평판이 퍼져 나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나저나 월왕의 말로는 대부인이 사람을 매수했다는데, 그들이 대체 언제 일을 벌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목운요는 요 며칠 불경을 필사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터라 소청의 어깨에 기댄 채로 금세 잠들어 버렸다.
목운요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보화사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오래 잠들어 버렸네요. 꽤 오래 잔 것 같은데 어깨가 저리지는 않으셨어요?”
소청은 웃으며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난 괜찮단다.”
그에 목운요는 곧장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주려 했다. 한데 소청이 목운요의 손이 닿자마자 참지 못하고 숨을 훅 들이켰다.
목운요는 너무 곤히 잠들어 버린 자신을 탓했다.
“됐어. 요아, 네가 잘 자는 모습을 보니 이 어미도 기분이 좋더구나.”
목운요는 이내 눈으로 반달을 그리며 소청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계단 위 높은 곳에 서 있는 보화사를 바라보았다.
보화사는 몇백 년의 역사를 지닌 사찰이었다. 또한 두 번의 전쟁을 겪고, 수많은 백성을 지킨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항상 향불이 끊이지 않았다.
절문을 통과하자 승려 하나가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목운요는 사람을 시켜 가져온 짐을 곁채에 두게 하곤, 마당 옆에 있는 은행나무 숲을 응시하였다.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고, 바람이 불자 노르스름한 은행잎이 떨어졌다. 목운요는 살짝 고개를 들어 손가락으로 은행잎 하나를 받아 들고 미소 지었다.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구나.”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선 소청오가 그런 목운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부의 제사를 위해 보화사에 온 것이라 목운요의 옷차림은 상당히 점잖았다. 청백색 비단 치마를 입은 그 모습이 마치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백옥처럼 보였다.
소청오의 시선이 느껴지자, 목운요는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를 한순간에 지워 버렸다.
“오라버니, 분부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불경은 다 베끼어 썼소?”
“물론입니다. 큰외숙모께서 보내 주신 불경이 많긴 했지만, 효도를 행하는 일이니 며칠 잠을 못 자더라도 다 써 내는 게 마땅하지요.”
부드럽게 웃으면서도 온몸으로 저를 경계하는 목운요를 보며 소청오는 극도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목운요가 쓴 가면을 부수고 진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서릉에 도는 우의의 소문을 알고 있소?”
목운요는 미간을 약간 구겼다.
“온 서릉이 그 소문으로 난리가 났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 일이 운요 동생과 관련이 있소?”
소문이 퍼진 후, 이상하게도 소청오는 가장 먼저 목운요를 의심했다.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 서릉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런 일을 꾸밀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더군다나 전 매일을 평안하게 보내고 싶지, 성가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께선 까닭 없이 저를 모함하시네요. 저와 어머니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속이 후련하신 건가요?”
목운요가 말을 마칠 때쯤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바닥에 있던 모래가 시야를 가렸다. 목운요는 얼른 소매를 들고 눈을 감았다.
그에 소청오는 깜짝 놀라 재빨리 다가와서 목운요를 부축했다.
“괜찮으시오?”
“상관하지 마세요!”
목운요가 소청오를 밀쳤지만, 그는 되레 목운요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조급함이 섞인 투로 말했다.
“모래가 눈에 들어갔을 땐 함부로 눈을 비비면 안 되오. 내가 불어 주겠소.”
앞을 볼 수 없는 와중 갑작스레 소청오의 입김이 느껴지자, 목운요는 크게 당황했다.
“괜찮습니다, 오라버니. 사금, 사금아……!”
그러나 사금은 소청을 도와 물건을 정리하느라고 목운요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소청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운요의 경직된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받쳐 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소청오는 숨을 고르며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러고는 다시 목운요의 눈에 부드럽게 바람을 불었다. 목운요는 놀라서 눈이 아픈 것도 잊고 소청오를 재차 옆으로 밀쳤다.
“오라버니, 자중하십시오.”
붉어진 눈을 힘겹게 뜨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소청오는 그런 목운요의 모습을 보며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아까 그렇게 물어봐선 안 되는 거였다. 운요는 서릉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무 섣불렀어.’
“나는 도와주려던 것뿐이오.”
소청오는 미간에 힘을 준 채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께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목운요는 곧장 몸을 돌려 아슬아슬하게 곁채로 걸어갔다. 그제야 사금이 그녀를 서둘러서 부축하더니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 이게 무슨 일이에요?”
목운요는 아픔이 가라앉은 눈을 깜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별일 아니야. 곁채는 잘 정리해 두었니?”
“네, 정리를 다 마쳤습니다. 우선 좀 쉬시겠어요?”
“그래야겠어.”
조금씩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소청오의 꽉 쥐어져 있던 주먹이 느슨해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아직도 목운요의 뺨을 만지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백옥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무척 따스했다.
소청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을 기어코 억누르고는, 땅에 떨어진 은행잎 하나를 주웠다.
“세간 만물은 모두 변화하는 심상이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만물이 움직이지 않고…….”
불경 한 소절을 다 읊은 후에야 그는 등을 돌리고 떠났다. 그러나 손에 쥔 은행잎 한 장만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