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창문으로 드나드는 월왕
* * *
목운요는 그 뒤로 며칠 동안 매일 불경을 필사하면서 수시로 동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화가 난 소우의가 아끼던 다기를 깨뜨렸다거나, 대부인이 함부로 입을 놀린 하인들을 처벌했다는 둥이었다.
동원의 근황을 들은 목운요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일련의 일들을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반면 의외로 소우의 행동이 예상 밖이었다. 소우는 이튿날 정말로 베낀 불경을 보내왔는데, 불경의 글씨체가 자신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편 대부인 쪽은 아주 정신없이 바빴다. 보통 소문이란 것은 잠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지나가기 마련이거늘, 어찌 된 영문인지 소우의가 월궁 선녀라는 소문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저잣거리 소문의 열기는 며칠째 펄펄 끓는 물처럼 영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월궁 선녀를 대신할 사람도 찾으려 했으나, 짧은 시간 내에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단 소우의와 체격이 비슷해야 했고, 높은 수준의 춤을 출 줄 알아야 했다.
게다가 시아버지의 기일이 가까워지면서 웬만한 인력은 보화사에 보낸지라 대부인은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부인, 큰 도련님이 웬 여인과 함께 오셨습니다.”
대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어서 청오를 들라 해라.”
소청오는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춘 후, 뒤에 있는 여인을 눈짓하였다.
“제가 구해 온 사람입니다. 믿을 만하고, 몸집도 우의와 비슷하니 배월무를 추는 법만 배운다면 서릉의 소문에 대응하기 충분할 겁니다.”
대부인은 소청오가 데리고 온 여인을 한참 훑어보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괜찮구나. 고생 많았다.”
소청오는 여인에게 이만 나가라고 손짓하고는 대부인에게 말했다.
“원래 다른 나무보다 늘씬하게 높이 자란 나무는 어김없이 바람에 부러지기 마련이죠. 모든 이들이 장공주의 눈에 자기 여식이 들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의는 궁중 연회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니 자연히 사람들에게 견제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소청오의 말을 들은 대부인의 표정은 살벌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이번 소문이 너무 빠르게 퍼지기도 했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지 찾아냈느냐?”
“찾지 못했습니다.”
소청오의 표정이 사뭇 무거워졌다. 환채각 포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기만 했다.
“내가 우의의 명성을 널리 떨치려던 계획을 그자가 무참히 짓밟았으니, 나중에 정체가 밝혀지면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
소청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머니, 우의는 이미 충분히 빼어나니 일부러 명성을 떨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어쨌든 네가 저 여인을 데리고 와 큰 도움이 되었어. 앞으로 우의는 저 여인에게 초선배월무를 가르쳐 줘야 하니, 보화사에 가서 경을 읊고 기도드리는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소청오는 더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대부인은 이미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서 우의에게 이 소식을 전해 줘야겠다. 요 며칠 어찌나 수척해졌는지 몰라. 참, 소청과 목운요는 우리 가문에 온 첫해니 어쨌거나 아버님께 효심을 보여야 한다. 내 목운요에게 불경을 필사하고, 모녀가 함께 보화사로 가라고 했다.”
“고모와 목운요도 간다고요?”
“그래. 소청은 딸이니 당연히 가야 하고, 목운요는 외손녀긴 해도 소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효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대부인의 눈에 서늘하고 음산한 빛이 번뜩였다.
제 체면을 여러 차례 짓밟은 원수에게 갚아 줘야 할 시간이었다. 경릉성에서 성공했다고 정말 소씨 가문에 발 디딜 틈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목운요처럼 괜히 한자리 차지하려 하다간 결국 죽음을 맞이할 뿐이었다.
소청오는 결국 입을 다물고 대부인이 걸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목운요의 방 촛불은 여전히 환한 빛을 뿜고 있었다.
눈여우는 목운요의 다리 부근을 빙빙 돌다가 목운요가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자 탁자 위로 뛰어올라 꼬리를 흔들었다.
“끼잉, 끼이잉…….”
목운요는 붓질을 멈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혼자 놀아. 베껴 쓴 불경을 망가뜨리면 털을 다 뽑아서 모피 옷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눈여우는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목운요가 벼루에 붓을 찍어 먹물을 묻히는 것을 보고 앞발로 벼루를 톡톡 건드렸다.
그에 목운요는 동작을 멈추고 붓으로 여우의 앞발을 살짝 찍었다. 새하얀 털에 까만 점이 생겼다. 깜짝 놀란 눈여우는 자기가 다친 줄 알고 탁자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낑낑 울어 댔다.
목운요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하늘이 무너진 듯이 구는 꼴이 귀여워서 손가락을 뻗어 눈여우의 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이제 말 잘 들을 거지?”
촛불 아래서 물기를 머금은 눈여우의 눈을 보고 있자니 몹시 사랑스러웠다.
“끼이이잉…….”
목운요는 붓을 내려놓고 눈여우를 품에 안아, 앞발에 남은 까만 자국을 지워 주려 했다.
하지만 손수건으로 닦으면 닦을수록 눈처럼 새하얀 앞발은 더욱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결국, 눈여우의 앞발이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그에 눈여우는 제 앞발을 부여잡고 낑낑거리며 울어 댔다.
목운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겠다, 알겠어. 이따가 잘 씻어 줄게. 그럼 분명 깨끗해질 거야.”
그러나 상심에 빠진 눈여우는 할짝할짝 앞발을 핥다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바닥에 엎드릴 뿐이었다.
한참 웃던 목운요는 그제야 눈여우를 안아 들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비볐다.
“착하지? 이따가 육포 줄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녀는 창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곧장 경계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엔 월왕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차가운 얼굴이었으나 눈에는 웃음기가 잔뜩 어린 채였다.
“월왕 전하, 이건 너무 예의 없는 행동이 아닌지요.”
목운요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월왕이 언제 왔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데다, 이곳은 다름 아닌 상서부였다. 이러다 들키기라도 한다면 필시 조정과 재야가 소란스러워질 것이었다.
창문 아래로 뛰어 내려온 월왕은 느린 걸음으로 목운요 앞으로 다가가서는, 눈여우를 옆으로 내던졌다.
“이리 싸고돌면 안 돼.”
바닥에 내던져진 눈여우는 곧장 월왕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월왕이 차갑게 노려보자, 겁에 질려 목운요의 다리 옆으로 숨으면서도 끝까지 월왕을 경계했다.
“그르르…….”
목운요는 허리를 숙여 눈여우를 안아 올리고는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옆에서 놀고 있어.”
눈여우를 달랜 목운요는 고개를 돌렸다가, 베껴 쓴 불경을 뒤적이는 월왕의 모습을 보고 화가 더욱 치밀어올랐다.
“월왕 전하, 이제 돌아가셔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많은 양을 다 베껴 쓸 수 있겠느냐? 불경을 다 베끼지 못하면 분명 뒷말이 흘러나오겠어.”
“월왕 전하!”
“그리고 소씨 가문 대부인이 몇몇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아마 보화사로 가는 길에 어떤 움직임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목운요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떤 사람들에게 연락했나요?”
“온갖 잡놈들에게 다 했겠지.”
월왕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미리 사람을 보내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대부인께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시겠다니 저는 그걸 이루도록 도와 드리면 그만이지요.”
목운요의 눈에 한기가 스쳤다.
월왕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히 말을 이어 갔다.
“중요한 소식이 하나 더 있다. 며칠 후 장공주께서도 보화사로 가실 것이다.”
목운요는 두 눈을 치켜떴다.
“그게 사실인가요?”
월왕이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네게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느냐? 고모님은 서릉에 계실 때면 매년 보화사에서 향을 올리고 기도를 드리셨다.”
“지금은 서릉에 있는 모든 가문의 소저들이 장공주를 주시하고 있어요. 장공주께서 보화사로 가신다면 보화사 문턱이 닳아 없어졌을 텐데, 어째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걸까요?”
“이번에 기도를 드리러 가시는 건 고모님의 잃어버린 딸을 위해서거든. 그래서 떠벌리지 않는 것이지.”
목운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어찌 보답할 것이냐?”
월왕이 웃음기 어린 눈길로 목운요를 응시했다.
그에 목운요는 살짝 미간을 꿈틀했다. 오늘따라 왠지 월왕이 이상해 보였다.
“늦었으니 이제 정말 돌아가세요.”
“그래야겠지.”
월왕은 고작 몇 마디를 전하려고 온 사람처럼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으로 향하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침상에 앉은 은여우를 바라보았다.
“월서 지역의 여우에겐 벼룩이 있다고 하니 절대 침상에 올리지 마라. 그리고 너무 안고 있지도 말고.”
목운요의 눈이 커다래지는 사이, 월왕은 곧장 창턱을 밟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눈여우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제 주인을 올려다보고는 옷자락에 살살 얼굴을 비볐다.
그에 목운요는 눈여우를 안아 들며 맥이 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네게 어찌 벼룩이 있겠어?”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말 벼룩이 있나 확인하려고 한참 동안 여우를 뒤적이다 깨끗하단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자신이 침상에서 쫓겨날 뻔한 것도 모르는 눈여우는 주인이 놀아 주니 기분이 좋아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