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가면을 벗다
“큰외숙모, 오셨어요?”
대부인의 표정은 유독 경직되어 보였다. 가장 총애하는 딸의 명성에 흠집이 간 터라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을 살피고 대충 위로를 해 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이리 소란스럽게 의원을 부르겠다는 것이야?”
목운요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왕 노파의 아들은 왕 노파와 유 노파의 사인이 석연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을 확실히 조사하지 않는다면 우리 소씨 가문이 오물을 뒤집어쓸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저는 두 노파가 견디지 못할까 봐, 연약한 이 두 시녀에게 매질을 시켰습니다. 그러니 저는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며, 저들이 친 덫에 걸려들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신랄하고 정당한 말이었기에 대부인의 논리는 완파되었다.
하지만 목운요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한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모두 소씨 가문에서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늘의 바람과 구름을 예측할 수 없듯, 사람의 행운과 재앙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절대 장담해선 안 돼.”
그때, 왕주가 땅에 엎드렸다.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자 돈 몇 푼이라도 뜯어내기 위함이었다.
“인자하신 부인, 소인은 왕 노파의 아들입니다. 제가 감히 소씨 가문을 흉사에 연루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 어머니와 유 씨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제 생각엔 너무 공교롭습니다…….”
대부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여기까지 말이 나왔으니 어떻게 해도 소씨 가문은 이미 덫에 걸린 셈이었다.
“그럼 의원을 불러 조사를 해 보지요. 하지만 만약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오늘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소씨 가문에 인정을 베풀어 주십사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제발 장례만 치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떠난 후에는 소씨 가문에 폐를 끼치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잖아도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던 중에, 왕 노파의 아들에게조차 억지 궤변에 말꼬리를 잡히자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그때, 목운요가 다정히 말을 걸어왔다.
“큰외숙모,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큰외숙모께서는 하인들에게 무척 너그러우시니 지난날의 정에 몹시 마음이 쓰이실 만도 하지요. 묵옥아, 가서 이백 냥을 가져와 두 집에 각기 백 냥씩 나눠 주어라. 사람이 죽은 것은 큰일이니 계속 들볶을 순 없지.”
묵옥이 대부인의 안색을 살피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사금이 소맷자락에서 백 냥짜리 은표 두 장을 꺼내 쥐여 주곤 묵옥을 계단 아래로 떠밀었다.
“소저께서 말씀하시는데 빨리 가지 않고 뭐 하는 것이야?”
왕주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입장에서 백 냥은 빚을 완전히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몇 년쯤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왕주는 곧장 문 앞에서 절을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운요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서 모친의 장례를 준비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어머니의 시신을 신속히 챙겼다.
대부인이 왕주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곧바로 떠나 버렸다.
그에 대부인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서 분노가 끓는 눈빛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때, 목운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부인의 팔을 잡았다.
“이제 해결되었네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오늘처럼 좋은 날에 저런 사람들 때문에 집안의 경사를 망치면 안 되지요.”
대부인은 목운요의 손을 탁 뿌리쳤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지만 않았다면 목운요의 뺨이라도 한 대 때렸을 것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왜 일을 이렇게 처리했지?”
“큰외숙모, 왜 이렇게 화가 나셨나요? 분부하신 대로 문 앞에서 소란 피우던 사람들을 처리했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목운요의 태연한 표정을 보며 대부인은 차갑게 웃었다.
“네 교활한 심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돈을 거저 줬으니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겠니?”
“말씀이 좀 이상하네요. 아까는 잘 위로해 줘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이백 냥이면 큰돈도 아닙니다. 이런 일에 가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으신 것이라면 제 사비로 내겠습니다.”
“너…….”
대부인은 목운요가 정말 바보인지, 바보인 척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우의의 명성을 회복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오늘 소란을 피운 자는 언제라도 사람을 시켜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이틀 뒤면 네 외할아버지의 기일이다. 매년 이때 우리 집안의 자식들은 불경을 필사하며 복을 기원하고, 그 필사본을 보화사(宝华寺)에 헌납하지. 너도 이제 우리 식구이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표해야 하지 않겠니?”
목운요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록 외할아버지를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언니들과 오라버니들도 모두 하는 일이라면 저도 응당 그래야지요.”
“그래. 그럼 이따가 사람을 시켜 베껴 쓸 불경을 보내도록 하마.”
“큰외숙모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목운요는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대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목운요를 훑어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떠났다.
목운요는 천천히 제월각으로 향하다, 옆에 선 묵옥을 바라보았다.
“묵옥아, 나를 따라다니게 되어서 억울하니?”
묵옥은 순간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구나. 정말 억울하다는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옅은 웃음소리까지 뒤따랐지만, 묵옥은 그 소리가 귀에 닿자 까닭 없이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생각은 결단코 한 적 없습니다.”
목운요가 싱긋 웃었다.
“날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으면 조금은 우둔했으면 하는 바람이구나. 되었으니 이만 가 봐.”
묵옥은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목운요의 눈을 바라보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인이 불경 한 무더기를 보내왔다. 꽤 두꺼워 보이는 책이 스무 권이나 되었다.
“이건 대부인께서 소저를 일부러 괴롭히시려는 것 아닌가요? 책 한 권도 이렇게 두꺼운데, 어떻게 이걸 다 베끼라는 건가요?”
외할아버지의 기일까지는 여드레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걸 다 필사하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릴 터였다. 게다가 제사 이틀 전까지는 필사본을 보화사로 보내야 한다는데, 이건 명백히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아닌가?
목운요는 책상 근처로 가서 가볍게 불경 위를 쓸었다. 하얗게 빛나는 손끝이 먼지에 물들었다.
“과연 큰외숙모께서 각별히 신경을 쓰시는 것 같네. 불경이 이리 많으니 며칠은 고생해야겠어.”
“소저, 정말 이걸 다 베끼시려고요?”
며칠 내에 다 베껴 쓰려면 손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할 건 해야지.”
옅은 미소를 띤 목운요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했다.
금교가 불만스럽게 얘기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불경을 스무 권이나 베끼라는 게 말이 되나요? 필사를 완성하지 못하면 분명 그것을 트집 잡아 효심이 부족하다고 야단치시겠지요.”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금교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사람을 단련시키기는 하나 보네요. 이 짧은 기간 내에 금교가 많이 발전했어요.”
금교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소저, 저를 놀리시는 거지요? 여기 오래 머물진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지켜봤다고요.”
목운요는 다소 흥미가 생겼다.
“그럼 무얼 배웠는지 말해 볼래요?”
금교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저 제 생각일 뿐이니 만약 틀리더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용기 있게 말해도 돼요.”
“소인이 생각하기에, 소씨 가문 사람들은 소저에게 선의를 가진 것 같진 않습니다.”
금교가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분명 소씨 가문에서 먼저 부인과 소저를 모셔 왔으면서, 되레 괴롭힐 궁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방금도 소저께서 나가서 사람들을 겁주지 않으셨다면 왕 노파의 아들은 그 일을 소저께 덮어씌웠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인께선 서릉에 처음 와서 모든 게 익숙지 않은 소저의 등을 떠미셨죠. 분명 선의로 보이진 않습니다.”
목운요는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 가족이 아닙니까? 아무리 소씨 가문에서 소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못살게 구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소청 부인께서 주워 온 자식이라도 된답니까?”
금교가 별 뜻 없이 한 말에 목운요는 순간 놀라 멍해졌다.
금란은 그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소저, 왜 그러십니까?”
목운요가 정신을 번뜩 차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금교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말이에요. 두 사람이 보기엔 어머니께서 소씨 가문 사람들과 닮은 것 같나요?”
금란과 금교는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저께서 말씀하시기 전엔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닮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설마…… 소씨 가문에서 사람을 잘못 찾았다는 말씀인가요?”
목운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은 차차 얘기하도록 하죠. 아무리 그래도 소씨 가문에서 사람을 잘못 찾았을 리는…….”
본능적으로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상한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목운요는 시선을 들어 옆에 놓인 불경을 바라보다 한 권을 집어 들고 책상 위에 펼쳤다.
‘어떤 음모가 있든 간에 그건 그들의 계획일 뿐이다. 이번만은 소씨 가문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