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소씨 가문의 결백
대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밖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지기들은 계단 아래서 통곡하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며 대문 양쪽에 서 있었다.
목운요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가, 바닥에 꿇어앉은 두 부부와 아이들, 그리고 두 구의 시신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감히 소씨 가문을 모함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요.”
울려 퍼지던 통곡 소리가 뚝 멈추었다.
“저희는 소씨 가문을 모함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고,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돈도 없기에…….”
목운요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어 말허리를 잘랐다.
“모함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돈을 갈취하러 온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어머니께서 소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하인으로 계셨으니 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두 노파께선 우리 가문에 오랜 세월 몸담으셨죠. 그런데 아들이라는 분이 돌아가신 모친을 묻어 드려 명복을 빌지는 못할망정, 상서부 대문 앞까지 오다니요? 돌아가신 모친의 영혼이 간밤에 찾아올까 두렵지도 않습니까?”
왕 노파의 아들 왕주(王柱)는 목운요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등에서 한기가 느껴졌으나 염치 불고하고 대답해야만 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소씨 가문의 소저신 듯한데, 소씨 가문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인정도 없이 팍팍하답니까?”
“저는 소씨 가문의 외손녀 목운요입니다. 그때 제가 왕 노파와 유 노파를 매질한 후 가문에서 내쫓으라 명했죠. 저는 두 사람에게 시중을 받아 본 적은 없고, 매를 맞아 본 적만 있으니 정이랄 게 없군요. 그러니 여기서 가련한 척 어쭙잖은 동정을 구걸하지 말고,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지나 말해 보시죠.”
“소, 소저…….”
왕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본래 하는 일 없이 왕 노파가 벌어 오는 돈으로만 살다가 처를 맞고 자식을 낳았다. 그러다 얼마 전 왕 노파가 소씨 가문에서 쫓겨나면서 돈줄이 끊겨 버렸다. 술 마실 돈도 없었고, 운에 기대 보고자 노름방에 갔으나 도리어 거액의 노름빚만 졌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 왕 노파에게 따로 챙겨 놓은 돈이 없냐며 난동을 피우던 중, 왕 노파가 갑자기 혼절하여 세상을 떠났다. 한데 어머니와 같이 쫓겨난 유 노파도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주는 두 노파가 노부인을 도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실패해서 쫓겨났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노부인은 그 후에 사람을 죽여 입막음하려던 게 아닐까?
소씨 가문에서 정말로 어머니를 죽이고 증거를 없앨 생각이었다면, 거액의 돈을 갈취할 수도 있을 터였다.
결국 왕주는 유 노파의 아들 일가도 끌어들여 함께 울고불고 난동을 부려서 일을 키우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소씨 가문도 마냥 태연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목운요가 떳떳하게 굴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목 소저께선 워낙 지체 높은 분이라 사람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으시겠지만, 어머니와 유 씨 아주머니는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울분에 차서 소리치는 왕 노파의 아들은 퍽 억울해 보였다.
큰 소란이 일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소씨 가문의 손녀가 월궁 선녀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에, 아리따운 선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만하세요!”
목운요는 큰 소리로 제지했다.
“우리 소씨 가문은 청렴결백한 가문입니다. 그때 두 노파를 때린 이는 제 바로 뒤에 서 있는 두 시녀였고, 당시 사용한 곤장은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열흘 전에 일어난 일이었죠. 이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으니 하나하나 조사해 봐도 좋습니다.”
왕주는 점점 심장이 떨려 왔다. 처음엔 그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정도였으나 목운요가 분명하게 내뱉는 말에 더욱더 자신이 없어졌다.
시녀 둘의 가냘픈 모습을 보아하니 열 대는 고사하고 스무 대, 쉰 대를 때린다 한들 사람이 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설마 자신의 추측이 틀린 걸까?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도 영 곤란했다. 노름빚을 진 터라 조만간 빚쟁이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빚쟁이들에게 빼앗길 목숨이었다.
“사실 어머니와 유 씨 아주머니가 소씨 가문에서 오랜 세월 일한 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해도 좋다고 하시니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운요의 눈이 반짝였다.
“말해 보시죠.”
왕주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을 목숨이 아닌가?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면 혹시라도 살아남을지 모를 일이었다.
“소저의 말씀대로 곤장 열 대로는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유 씨 아주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죽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옆에 있던 유 노파의 아들은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제 분수를 지킬 줄 알던 그가 소씨 가문에 찾아온 것은 왕주의 부추김과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왕주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이번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목운요는 인상을 찌푸리며 전에는 볼 수 없던 엄숙한 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에 왕주는 갑작스레 이마를 땅에 찧어 댔다. 돌계단에 이마를 세게 부딪치자 금세 피가 솟구쳤다. 피가 이마를 따라 눈과 뺨으로 흘러내리자 순식간에 섬뜩한 몰골이 되었다.
“정말로 소씨 가문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가문의 뜻대로 저를 처분하셔도 좋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이 느닷없이 죽어 버렸는데, 아들 된 도리로 어찌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머리를 박고 죽으면 양심의 가책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활시위는 이미 당겨졌으니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모친이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목운요는 양쪽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에 이미 많은 백성이 모여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소씨 가문은 세찬 파도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문에서 쫓겨난 두 하인이 동시에 죽어 버린 데다, 그 식솔들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으니 추측이 난무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옆에서 현장을 살피던 주 마마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감지하고 대부인에게 아뢰고자 부랴부랴 동원으로 달려갔다.
* * *
월궁 선녀를 대신할 적합할 인물을 찾느라 바쁜 와중, 주 마마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대부인, 대문 앞이 소란스러워졌으니 속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운요가 가지 않았습니까? 하인 둘이 죽었다면 돈을 좀 내주고 위로 몇 마디 건네면 되지, 소란을 피울 일이 뭐가 있답니까?”
주 마마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왕 노파의 아들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데, 멀리서 봐도 교활함이 철철 흐르는 것이, 간사하게 남을 등쳐 먹는 게 버릇인 작자 같습니다. 이러다 소씨 가문이 그놈의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
대부인이 미간을 구겼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왕 노파의 아들 말로는, 왕 노파와 유 노파가 쫓겨난 후 동시에 급사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인이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무엄하도다! 이곳이 어디라고 그런 허튼소리를 했답니까? 혀가 잘릴까 걱정도 되지 않나 보군요! 목운요는 무어라 대답했습니까?”
“거기까지만 듣고 부인께 소식을 전하러 왔기에 목 소저의 대답은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마마도 쓸모없군요!”
대부인은 울화통이 터졌다.
안 그래도 다 된 계획에 재가 뿌려진 판국이었다. 그런데 하인 둘이 죽은 일로 소씨 가문에 오물을 뿌리려 하다니!
“가 봅시다.”
대부인이 목운요에게 이 일을 떠넘긴 것은 어쨌거나 두 노파를 목운요가 때렸고, 그들의 가족이 필시 목운요에게 원한을 갖고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목운요의 명성을 깎아내리려 했거늘, 뜻밖에도 화가 소씨 가문으로 넘어올 줄이야.
* * *
대문 앞에서는 목운요가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왕 노파와 유 노파는 확실히 이곳의 하인이었기에, 여러분께 돈을 주어 장례 준비를 도와줄 수 있죠. 하지만 돈은 줄 수 있어도 소씨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일단 두 노파의 사인을 조사해 본 후 다시 논하도록 하지요.”
왕주는 돈 얘기에 극도로 신이 났다가, 두 노파의 사인을 조사하겠다는 말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저도 더 따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저 어머니를 하루속히 매장하고 명복을 빌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에 목운요는 차게 웃었다.
“황당하군요. 그런 마음이면 어머니를 하루속히 묻어 드리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시신을 소씨 가문까지 끌고 왔습니까? 은자를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평안히 매장하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니, 당신이 여기 온 건 은자 때문이로군요? 정말로 그렇다면 단 한 푼도 줄 수 없거니와, 당신을 관아로 보낼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어머니와 유 씨 아주머니의 사인을 조사하셔도 좋습니다!”
왕주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의원을 불러오죠.”
“기다려라!”
막 대문에 도착한 대부인은 의원을 부르겠다는 목운요의 말을 냉큼 가로막았다.
“운요야,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럽지?”
목운요는 뒤돌아 예를 갖추었다. 일말의 아쉬움이 마음속을 스쳤다.
‘대부인이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소씨 가문이 사람을 죽이고 입막음했다는 평판을 씌웠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