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갚아 주어라
황제는 흔들거리는 찻잎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돌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백학이 날아가는 듯했다. 하나 아직 놀라긴 일렀다. 안개가 사라지니 백학도 종적을 감추었지만, 찻잔 속 찻잎에선 강렬한 생기가 느껴졌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들고 멍하니 살폈다. 찻잔이 흔들리자 찻잎이 신기하게도 연꽃 모양을 이루었다. 잠시 후 연꽃은 점점 흩어지고 맑고 깨끗한 차향만 남아 은은히 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연꽃 하나를 통째로 입 안에 머금은 듯한 향취가 느껴졌다. 황제는 생생한 향을 느긋하게 배 속 가득 삼켰다.
“네 다도 솜씨가 참으로 비범하구나.”
목운요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에 밝은 미소가 어렸다. 매우 기쁜 얼굴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는 차를 두 모금 마시더니 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네가 경릉성에 있을 때 십만 냥을 기부했다고 들었다. 경릉성 염운사 이목년이 글로 적어 보고하였지. 하운방과 불선루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을 모두 내놓았다고?”
목운요는 고개를 살며시 가로젓더니 사실대로 고했다.
“수익 전부를 내놓진 않았고, 오만 냥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중 삼만 냥은 자금을 회전하는 데 쓰고 있고, 일만 사천 냥은 외할머니와 친지들께 드릴 선물을 사는 데 썼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을 대비하여 어머니가 보관하고 계시고요.”
“참 소상하게 말해 주는구나. 어찌 됐든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게 훌륭한 것이지. 짐이 네게 상을 줘야겠다. 오늘 차 맛도 일품이고 말이야. 나중에 맹씨 가문을 찾아가서 널 때린 자에게 그대로 갚아 주어라.”
순간 목운요는 얼떨떨하여 한참을 꼼짝하지 못했다.
서립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주의를 주니 그제야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목운요의 강경한 자세는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 아래에서 자라는 생명력 강한 새싹 같았다.
목운요는 절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야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소인, 황상께서 공명정대하게 일을 해결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목운요의 목소리에는 언뜻 울음이 섞여 있었다. 공명정대함이 얼마나 만나기 어려운 것인지 성토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럼 돌아가 보거라.”
“네, 소인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린 채 대전을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감정에 북받친 탓인지 두어 번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대전인지라 그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목운요가 떠나자 황제는 참지 못하고 찻잔을 다시 들어 음미했다.
“차를 우리는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군!”
서립은 옆에서 웃음 짓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목 소저의 다도 솜씨가 크게 발전한 것 같습니다.”
황제는 찻잔을 내리고 가볍게 웃었다.
“참으로 발랄한 소녀로다.”
순간 서립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황상께서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황상의 칭찬을 받다니 목 소저의 복이 큰 것 같습니다.”
‘칭찬 한마디 했을 뿐인데 복이 크다고?’
황제는 문득 목운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황제가 눈빛 하나로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이치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서립이 감개무량하는 모습을 보자 친누이인 장공주의 말이 생각났다.
“황제는 검을 쥔 셈입니다. 만물을 학살하여 모든 생명을 도탄에 빠뜨릴 수도 있지만, 악귀를 물리쳐 이 나라 강산의 안녕을 지킬 수도 있지요.”
“서립, 이번 추석에 장공주를 궁궐에 모실 준비는 잘되어 가느냐?”
서립은 서둘러 대답했다.
“장공주님의 옥화궁은 매일같이 청소하고 있습니다. 전각의 휘장과 융단도 새것으로 바꾸었지요. 궁중의 화초와 수목, 정자 또한 모두 다시 보수하고 정리해 놓았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께서 이번에는 오래 머무실지 모르겠군. 누님께선 짐의 권력에 해가 갈까 염려하여 황궁으로 돌아오기를 마다하시지 않느냐? 이번에도 짐이 몇 차례나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절대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서립은 옆에서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의덕 공주는 황상께 특별한 존재였다. 한 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간 황상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었다.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짐이 당초 황자였을 때는 총애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출신이 좋지 않아 형님들께 매를 맞고는 했지. 누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시면 꼭 그대로 갚아 주시곤 했다. 짐을 괴롭힌 자들은 매번 울면서 도망쳤다. 그러다 나중에 부황께서 연로하시어 쇠약해지시자 형제간의 다툼이 잦아져서…….”
서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황상의 입에서 나온 그 사건은 황가의 기밀이었다. 아무리 환관이라고 해도 들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황제는 이것이 불온하다는 걸 깨닫고 뒷말을 삼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운요가 자리를 떠날 때의 표정을 보니 힘들었던 옛일이 생각났다.
‘나와 누님은 힘을 합쳐 큰 흐름에 맞서 싸웠다. 주변에는 모두 적들뿐이었지. 고립무원 상태로 전전긍긍했고……’
“서립, 장공주의 궁을 다시 한번 정밀하게 살펴다오.”
장공주는 사실 딸을 잃어버린 후, 여자아이 하나를 입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릉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예, 황상.”
* * *
한편 목운요가 궁에서 나오자, 금란과 금교가 서둘러 맞이했다. 둘의 긴장한 기색이 한껏 풀렸다.
“소저.”
목운요는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시울이 여전히 살짝 붉었다.
옆에 있던 제 마마는 목운요의 안색을 살핀 후 돌아가 대부인에게 보고할 준비를 했다.
길을 안내해 준 소 공공이 목운요에게 인사를 올렸다.
“목 소저, 그럼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에 목운요는 금란에게 눈짓하여 주머니를 건넸다. 그리고 옅은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건 공공께서 두 번씩이나 제 길을 안내해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선물입니다.”
소 공공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옷소매에 주머니를 넣는 동작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목 소저,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목운요는 마차에 올라 소씨 가문으로 향했다.
* * *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소 공공은 조금 기다린 후에야 이덕을 볼 수 있었다.
“이 공공, 목 소저께서 제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궁중에선 쓸 곳이 없으니 이 공공께 대신 드리려 합니다.”
하급 환관은 쉽게 궁에서 나갈 수 없기에 은자를 받은들 소용이 없었다.
이덕이 주머니를 열어 보자, 안에는 오십 냥가량의 은표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 공공은 주머니를 다시 소 공공의 품에 던졌다.
“목 소저께서 일부러 감사를 표한 것이니 네가 갖고 있어라. 지금은 쓰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궁을 나갈 기회가 생길 때 쓰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래. 선의의 선물을 받았으니 다음에 길을 안내할 땐 더욱 공경히 모시도록 해라.”
“네, 당부대로 하겠습니다.”
‘다음? 목 소저께서 궁에 또 오시는 것인가?’
이덕이 방으로 가니 스승 서립이 한쪽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덕은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가서 서립의 어깨를 주물렀다.
“스승님, 목 소저는 정말 맹 소저에게 보복할까요?”
서립이 그런 이 공공을 바라보았다.
“목 소저께서 말씀하시는 것 못 들었느냐? 게다가 그게 맹 소저 한 사람만 때리는 것이겠느냐? 맹 태사 본인이 맞는 것과 같지.”
이덕은 서립의 말을 듣고 살짝 탄식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덕비 마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이번 일로 덕비의 친정인 맹씨 가문은 체면을 제대로 깎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덕비는 성격이 매우 다혈질이었다.
“눈물? 아니, 웃어야지.”
황제가 대노하지 않고 맹씨 가문에 경고만 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래도 눈치를 못 챈다면 다음번엔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을 것이었다.
그에 이덕은 몇 번 ‘하하’ 웃더니 서립의 어깨를 좀 더 부드럽게 안마했다.
“스승님, 아까 덕비 마마께서 탕국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땐 황상께서 목 소저를 만나고 계셔서 일단 보관만 해 두었습니다.”
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신선 싸움에 귀신이 화를 당한다는데, 이 일은 우리 같은 하인들이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다. 말은 아끼고 일은 더 많이 하여라. 열심히 황상의 시중을 드는 것만이 우리의 도리다.”
이덕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소씨 가문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노부인 손 씨가 부른다는 말에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외할머니를 뵙습니다.”
부상을 당한 채로 궁 안팎을 드나든 목운요의 얼굴은 더 창백해 보였다. 노부인은 짐짓 모르는 척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예는 그만두고 어서 앉아라. 오늘 황상을 뵈었다고? 이야기는 잘 나누었느냐?”
목운요가 만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황상께선 일국의 군주이시지만 사람을 대하실 때 참으로 너그러우신 것 같습니다. 저 같은 낮은 자에게도 거리낌 없이 잘 대해 주셨답니다.”
‘너그럽다고?’
노부인이 순간 인상을 썼다. 그녀가 아는 한, 황제는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다행이구나. 네가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황상을 뵙는 것이기에 걱정했었는데.”
“과연 황상께선 용과 같은 신성한 천자이셨습니다. 그 앞에선 어떤 말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황제를 속이는 것은 목이 날아갈 대역죄이지 않습니까? 집안의 사람까지 그 죄를 받을 수도 있지요.”
노부인의 낯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였는지 물어보려는데, 하필 그때 온 마마가 후다닥 들어왔다.
“뭘 그리 허둥지둥하는가? 무슨 일이야?”
온 마마는 목운요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궁의 환관 대인이 오셨습니다. 황상께서 목 소저께 상을 치하하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