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마지막 날
온 마마는 급히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몹시 공손한 태도였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얼굴이 낯이 익은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소?”
“일전에 소씨 가문에서 마님을 시중들면서 어르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음, 그렇군. 자네가 소저와 부인을 데리러 온 것인가?”
이목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퍽 언짢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그것이…….”
온 마마는 서둘러 설명하려 했으나, 이목년은 그녀의 말을 다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조정에 일이 많아 소씨 가문이 바쁘기는 하겠지. 그래도 고작 하인 몇 명이 부인과 소저를 데리러 오다니, 참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군.”
“대인-”
온 마마가 굳어진 얼굴에 겨우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목년은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쩔 수 없지. 소씨 가문 일에 외부 사람이 끼어들 순 없으니. 그래도 필히 두 사람을 잘 돌봐야 할 것이네. 부인과 소저는 경릉성의 은인이니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과 소저는 저희가 반드시 잘 모시겠습니다.”
그제야 그는 낯빛을 온화하게 바꾸며 목운요와 소청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분께서는 일찍부터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아무것도 못 드셨겠지요? 저쪽에 따로 상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은자를 기부한 분들을 위한 자리인데 같이 가서 식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목운요는 이목년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온 백성이 한데 모여 기뻐하는 가운데, 소탈한 식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청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도 덕을 좀 볼까요?”
옆에 있던 주 부인이 다정하게 소청의 팔짱을 꼈다.
“소 부인께서는 혹시 가리시는 음식이 있습니까? 요리할 때 각별히 주의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저는 시골 사람이라 뭐든지 다 잘 먹습니다.”
그에 주 부인은 저도 모르게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출신을 저렇게 담담히 밝힐 수 있다니, 소 부인의 마음이 참으로 넓구나.’
그때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도 어디 한번 잔치 밥을 먹어 볼까요?”
* * *
온 경릉성이 떠들썩했다.
이목년은 일 처리에 있어 매우 세심한 자였다. 그는 곡식을 대량으로 들여와 사람 머릿수대로 곡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집에 곡식이 충분한 사람에게는 할당된 곡식의 가격만큼 은자를 주니 합리적이었다.
거리 위 백성들의 얼굴에 제각각 웃음꽃이 피었다.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거지들은 하도 굶주림이 심하여, 제 몫의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한 그릇 더 받으러 가고 싶어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에 화려한 옷을 입은 공자님이 흥, 하고 웃으며 자기 몫의 음식을 거지에게 주고, 동전 두 개도 건넸다.
“난 다 먹지 못하니 네게 주마. 이것을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으면 그 돈으로 찐빵을 사 먹어라.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일도 쉽지 않아. 그러니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아라.”
거지는 넋이 나간 얼굴로 연거푸 허리를 굽실거리며 절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마음씨가 선하시니 분명 복 받으실 겁니다!”
화려한 의복의 공자가 빈 그릇을 든 채 건들건들 걸어갔다.
“내가 원래 마음씨가 좀 선하지, 하하!”
목운요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곳곳에서 훈훈한 장면들이 목격되자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옆에 있던 주 부인도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서릉이라고 해도 오늘 이곳처럼 활기차진 않답니다. 모두 목 소저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 작은 불꽃을 붙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이렇게 큰 불길로 번진 것이지요.”
주 부인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목운요를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주씨 가문도 목운요는 품지 못하리라던 이목년의 말이 떠올랐다. 소씨 가문이 외손녀를 어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얕잡아 본다면 나중에 그 가문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 * *
온종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목운요와 소청은 집으로 돌아갔다. 피곤하긴 했지만 하루를 알차게 보내 귓가에 걸린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화정에 도착하니 온 마마와 시녀들이 서 있었다.
소청이 입을 열었다.
“이제 경릉성의 일은 끝났습니다. 짐도 미리 챙겼으니 내일 서릉으로 가겠습니다.”
온 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를 준비해 두었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시지요.”
소씨 가문은 체면을 세우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이 층짜리 배를 준비한 참이었다.
“그럼 온 마마께서도 어서 가서 쉬시지요. 내일은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온 마마와 시녀들은 곧장 불선루로 돌아갔다. 방문이 닫힌 후에야 유 마마가 입을 열었다.
“조그만 자수방과 다관을 열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십만 냥을 그렇게 쉽게 써 버리다니, 정말 대범하군요.”
온 마마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유 마마는 그에 서둘러 억지웃음을 지었다.
“부인과 소저는 서릉에 가면 돈이 많이 드는 것도 모르나 봅니다. 오늘 전 재산을 다 쓰고 명성은 얻었겠지만…… 서릉에 도착한 후에는 소씨 가문에 완전히 의탁할 생각일까요? 마님께서 그리 쉽게…….”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이만 쉬러 가지요.”
온 마마는 말을 마치고 바로 씻으러 나갔다.
유 마마는 무안해져 저도 모르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온 마마가 저렇게 싸고도는 것을 보면, 노부인께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딸과 외손녀에게 애정이 깊으신가 봐? 그렇다면 저 모녀 손아귀에 놀아나지 마시라고 마님께 미리 얘기를 드려야겠어.’
* * *
마지막 날 밤, 목운요는 소청에게 함께 자고 싶다고 떼를 썼다. 소청은 어쩔 도리 없이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모녀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웠다. 목운요는 어머니의 품에 쏙 들어갔다.
“어머니, 저 잠이 안 오는 것 같아요.”
소청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아유, 귀여운 내 새끼.”
“어머니, 저번에는 저보고 응석받이라면서요? 언제 또 귀여운 내 새끼가 됐대요?”
목운요가 소청에게 기대며 투정을 부렸다.
“너는 언제부터 네 어미 말을 그렇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니?”
“전 언제나 어머니 말을 가장 귀담아듣는걸요!”
웃음을 터트린 두 모녀는 한밤중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 * *
이튿날 세안을 마치고 나오니, 온 마마와 시녀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금란이 보고했다.
목운요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먹고 천천히 가죠.”
“네, 소저.”
한편, 온 마마와 시녀들은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밖에 무슨 소란입니까?”
“그러고 보니 불선루의 진 총관이, 부인과 소저께서 가지고 갈 물건들을 정리한다고 하던데…….”
이에 밖으로 나간 그들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에는 백여 개의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짐 놓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
온 마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분께서 짐을 저렇게나 많이 들고 가신단 말입니까?”
옆에 있던 유 마마는 입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골 것들이라서 가지고 있는 물건을 죄다 보물처럼 여기나? 상자 안에 든 물건들이야 고작 잡동사니뿐이겠지. 이렇게 소씨 가문으로 갔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웃음거리가 되겠어.’
진 총관은 온 마마와 시녀들을 보곤 다가와 인사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이 물건들을 장부에 기록하고 상자에 넣어야 배에 올릴 수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만 골라서 실으시지요. 소씨 가문으로 가면 없는 물건이 없으니까요.”
그러자 진 총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상자 하나를 열어 보였다.
“이것이 최대한 간추린 겁니다. 상자 몇 개는 소저께서 일 년 동안 입으실 옷들입니다. 소저께서는 워낙 깔끔한 성격이신지라 정말 좋아하는 옷이 아니면 결코 두 번 입는 법이 없으십니다.”
상자 안에는 정성스럽게 자수를 놓은 옷들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그 화려함에 유 마마의 혀가 절로 굳어졌다.
‘서릉에서 입어도 주목받을 옷들인데, 한 번밖에 입지 않는다고?’
온 마마 또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갈아입을 옷은 당연히 모두 챙기셔야죠.”
진 총관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상자 두 개를 더 열었다.
“이 상자들엔 머리 장식이 들어 있습니다. 옷도 여러 벌이니 장신구도 당연히 그에 맞게 갖춰야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온 마마는 상자의 물건들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해졌다. 진 총관이 연 상자마다 귀하지 않은 게 없었다.
진 총관은 빛나는 미소로 다른 상자들도 가리켰다.
“저 상자들엔 황상께서 하사하신 물건이 담겨 있습니다. 하사품은 더욱 각별히 다뤄야 하기에 모두 예를 다해 챙겼습니다. 저기 저 상자들은 소저께서 평소 아끼시던 서적들입니다. 세상에 한 권뿐인 책들이 많지요. 저야 그 가치를 모르지만, 불선루에 차를 마시러 온 손님들께서 언제나 책들을 빌리시곤 했습니다.”
그때, 운춘과 위일이 비취옥 장식을 들고 와 상자에 넣으려 하자, 진 총관이 이를 보고 황급히 제지했다.
“아무거나 넣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부인과 소저께 당장 필요하신 것들만 옮겨라. 다른 것들은 다음에 또 보내면 되니까.”
이에 운춘과 위일은 비취옥을 도로 꺼내 탁자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네, 총관님.”
“휴……. 아직 교육을 덜해서 우스운 꼴을 보였네요. 실례했습니다.”
진 총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명음, 소저께서 사용하시던 다기는 모두 쌌느냐?”
“소인이 깜빡했습니다……. 지금 가지러 가겠습니다.”
“어째서 이리도 조심성이 없는 게야? 황상께서 하사하신 자수침들도 잊지 말아라. 어휴, 그런 도자기들은 뭣하러 가져가느냐? 그것들을 실을 자리는 없어.”
온 마마는 진 총관이 가리키는 자기들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인들이 안고 있는 도자기 병 하나하나가 최고급품이었다.
특히 순금으로 모란을 새긴 것은 주인 어르신의 저택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대인께서는 그것을 보물처럼 여기며 평소에 꺼내 보는 것조차 아까워하셨다.
‘듣기로는 그 가치가 은자 만 냥은 된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