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담림의 속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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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운요는 아침을 먹자마자 금수원의 온실을 찾았다. 지난번보다 꽃봉오리가 훨씬 커져 있었다.
시든 이파리를 조심스레 잘라 옆에 있는 바구니에 담는데, 문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운요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월왕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꽃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아침 일찍부터 온실에 오시다니.”
“여우를 길들여 줄 사람을 알아봐 주랴?”
“그러실 것 없어요. 지금 제 방에서 쫄쫄 굶고 있거든요. 두 끼 정도 더 굶기면 될 거 같아요.”
“월서의 겨울은 유난히 길지. 눈여우는 배가 고플수록 더 고집을 부리고 사나워져. 굶어 죽을지언정 타협하지 않으려 해서 길들이는 게 무척 어렵다.”
“후후, 제 손으로 길들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굶겨 죽이는 게 나아요. 다른 사람의 손을 탄 거라면 제 곁에 두지 못하죠. 언젠가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를지도 모르잖아요.”
월왕은 일순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채월각의 압박으로 하운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 안 그러면 제가 이 시간에 이러고 있진 않겠죠.”
“하지만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는데?”
목운요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월왕을 쳐다봤다.
“사야, 현명한 분께서 어찌 말을 돌려 하시는 거죠? 채월각이 어떤 상황인지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던가요?”
월왕의 눈에 난처한 빛이 스쳤다. 어제의 행동 때문인지, 목운요가 자꾸 뾰족한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앞에 있는 모란꽃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이건…… 한 뿌리에서 서로 다른 색상의 꽃이 핀 건가?”
“마음에 드신다면 잘 길렀다가 나중에 하나 드릴게요.”
목운요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때, 금교가 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월왕을 발견하곤 우물거렸다.
“영사야, 목 소저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죠?”
“채월각의 담림이 불선루에서 소저를 만나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손님을 뵐 형편이 아니라고 전하세요.”
“예, 소저.”
* * *
목운요에게서 온 답신에, 담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차를 타고 돌아온 그를 채월관의 총관이 허겁지겁 맞이했다.
“나리, 돌아오셨습니까? 뭐하러 나리처럼 귀한 분이 직접 목운요를 찾아가신단 말입니까? 듣자 하니 하운방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금 부인과 친한 사이인 진 부인과 조 부인만 한번 다녀갔을 뿐, 아무도 안 갔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하운방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겁니다!”
총관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도 담림은 좀처럼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내 아들 쪽에는 사람을 보내 돌봐 주고 있느냐?”
“이미 사람을 매수해 뒀으니 도련님께서도 더 이상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며칠 뒤에 몰래 도련님을 빼내 올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경계를 늦춰선 안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하운방을 반드시 꺾어 놔야 한다.”
조만간 하운방 놈들을 모두 지옥으로 떨어뜨려 주마!
* * *
하지만 얼마 후, 채월각이 관리에게 뇌물을 건넨 일이 발각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 일에 연루된 관리가 여러 명이라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급기야 천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황상은 이번 소식이 전해지자, 대노하며 채월각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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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성. 이목년은 손에 든 서신을 내려놓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본디 좋은 일이 어쩌다 이리되어 화가 된 건지…….”
주 부인은 그의 손가에 찻잔을 전해 주었다.
“나리, 하운방은 예전에 자수법을 전수해 황상께서 하사하신 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채월각에 이르러서는 황상께서 엄격히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신 겁니까?”
“누군가가 무릎 꿇고 앉아 한 입만 먹게 해 달라고 사정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런 자에게 콩을 한 알 던져 주면 감지덕지하겠지.”
“네, 그렇지요.”
“한데 누군가는 요란법석을 떨면서 자네 밥그릇 안에 있는 음식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한다면?”
“그렇다면 그자의 손목을 잘라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후후, 하운방은 이름이 알려진 뒤에도 제 분수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자수법을 책자로 만들어 황상께 바쳤지. 어디 그뿐이던가? 세의를 바쳐 황상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어. 한마디로 그들은 모든 공을 황상께 바침으로써 황상의 호감을 샀지. 반면 채월각은 각지에 영향력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추종을 받고 있어. 그 명성이 조정을 넘어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황상께서 그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보시겠나? 마침 좋은 기회도 생겼는데.”
심지어 채월각은 관리들과 한통속이 되어 황자들마저 끌어들였으니, 황상의 심기가 불편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 * *
이튿날, 동녘이 밝아 오는 가운데 금교가 목운요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저, 채월각의 담림 어르신께서 문밖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소저를 뵙지 못하면 금수원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며…….”
목운요는 금교의 이야기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한번 만나는 드려야겠네요. 불선루에서 기다리라고 전해 주세요. 옷을 갈아입는 대로 갈 테니.”
엎드려 있던 눈여우는 밖에서 나는 기척에 몸을 일으키더니 경계 어린 눈빛으로 목운요를 쳐다봤다.
신경 쓸 생각이 없던 목운요는 옷을 갈아입고 금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 한가운데, 초조한 표정의 담림이 보였다.
목운요를 발견한 그의 눈빛에 서늘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목 소저, 어여쁜 얼굴 아래 이리 독한 마음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태연하게 의자에 앉은 목운요가 금란에게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화를 풀어 드리게 가서 차를 끓여 오세요.”
“흥, 불선루의 차는 마시지 않을 거다. 차 안에 수상한 걸 넣었는지 누가 알아!”
그런 담림의 태도에도 목운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선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지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냐? 당초 자수법을 전수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선, 나를 음해하려 해?”
노기 어린 담림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목운요를 사납게 째려봤다.
“어르신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 하나도 모르겠네요.”
“모르겠다? 그럼 귀 닦고 잘 듣거라! 내가 자수법을 전수하기 시작하자마자, 네가 자수법을 황상께 바쳤으니, 졸지에 내가 황상과 명성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니 내 목숨이 남아날 리 없지! 자수법을 전수하는 일로 계약서를 쓴 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네년도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다!”
목운요는 눈을 내리깐 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한 담림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부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나랑 자세히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목숨을 건질 여지라도 있을 테니까!”
“어르신께선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계약서에 쓴 대로, 자수법을 전수한 모든 공로를 전부 하운방에 돌리면 황제께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실 거다.”
“하운방의 공로로 돌리면 황상께서 정말 추궁하지 않으실까요?”
“물론! 하운방 입구에 내걸린 편액은 황상께서 친히 하사하신 것이니, 하운방이 황상의 얼굴을 대표하는 셈이지. 그러니 그 공로를 전부 하운방에 돌리면 황상께 간접적으로 공을 돌리는 셈이 된다.”
생각에 잠긴 듯 목운요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것을 확인한 담림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좋은 일로 고민할 게 뭐 있겠나?”
“음.”
“자, 그러지 말고 내가 가져온 계약서를 보거라. 여기에 서명만 하면 하운방의 명성이 높아지도록 내가 도와주마. 그 좋은 일을 설마 마다하진 않겠지?”
목운요는 눈앞의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고민할 게 뭔가? 어서 서명하게.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잘 처리할 테니.”
그에 목운요가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한데 그 순간, 손이 미끄러져 찻잔에 남아 있던 찻물이 계약서에 쏟아졌다.
담림이 눈을 부릅뜨며 허겁지겁 계약서를 낚아챘지만 계약서의 글자들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전부 번져 있었다.
“쯧, 이렇게 덜렁대서야……! 다시 쓸 테니 붓과 종이를 내오거라.”
“금수원의 붓과 종이가 다 떨어진 것 같던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설마…… 나를 놀리는 게냐?!”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에 담림은 죽일 듯이 목운요를 째려봤다.
그러자 목운요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찻잔을 바닥에 그대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어르신이야말로 저를 놀리기 위해 오셨습니까?”
하운방에 공로를 몰아 주겠다니, 어디서 그런 얄팍한 수작을! 자신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담림의 손에 이끌려 희생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흥, 세 살배기 어린애도 그런 수작에 넘어갈 리 없는데, 하물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 해?
그때, 담림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당초 자수법을 전수할 때 네가 서명한 계약서가 아직 내게 있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제가 서명했다는 계약서를 가져와 다시 이야기하시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계약서를 꺼내 펼친 순간, 담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약서에서 목운요가 서명한 곳이 흐릿하게 변해 제대로 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