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평화로운 나날
* * *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서 기분이 좋았던 걸까? 평소보다 반 그릇이나 더 해치운 목운요를 보며 소청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이가 체할까 내심 걱정이 됐다.
“며칠 뒤에 또 만들어 줄 테니 적당히 먹으렴. 이렇게 먹다가 체하기라도 하면 어쩌…….”
소청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많이 먹으렴. 요 며칠 새 또 말랐잖니.”
목운요는 눈을 깜빡거리며 제 얼굴을 만져 보더니 금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요새 제가 말랐나요?”
어머니는 몸에 좋다며 날마다 새로운 요리를 들고 나타났다. 진 총관이 보내 준 인삼도 반 뿌리나 고아 먹은 터라, 목운요는 외려 본인 얼굴에 윤기가 돈다고 생각했다.
“네, 매일 이렇게 고생하시니 마르실 수밖에요.”
원체 체구가 가녀린 그녀였다. 설상가상 날마다 자그마한 바늘과 실을 쥔 채로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밤늦도록 일하곤 했다. 매일 밤 연고를 바르고 찜질하지 않았다면 다음 날 손마디가 퉁퉁 부었을 거다.
“알았어요.”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것을 목운요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릇에 담긴 국물을 모두 들이켠 뒤 다시금 작업에 매달렸다.
* * *
그렇게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 목운요는 금 부인에게 완성된 세의를 보여 주었다.
“부인, 어떠세요?”
장장 몇 달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거대한 작품이 완성됐다.
금 부인은 눈앞에 펼쳐진 작품에 감동한 듯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했다.
“운요야, 너무 아름다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말, 정말 아름답구나!”
길이 구 척, 높이 오 척에 달하는 작품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가장자리는 여러 개의 상서로운 구름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금사로 채운 만수무강이라는 글자가 붉은 비단 한가운데 수놓아져 마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제 빈약한 손재주 때문에 황상께 올린 세의에 누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는데.”
“빈약하다니? 너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다고!”
“후후, 과찬이십니다.”
금 부인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만큼 작품을 자세히 감상하고 나서야 아쉬운 듯 시선을 거뒀다.
“운요야, 정말 수고 많았구나. 듣자 하니 세의를 준비하느라 생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하던데…….”
“생일을 뭐하러 챙긴답니까? 게다가 부인께서 은홍 언니를 통해 머리 장식도 보내 주셨잖아요. 그렇게 좋은 보석 장신구는 처음 봅니다. 보기만 해도 닳을까 싶어 머리에 달고 다니지도 못하겠어요.”
게다가 생일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국수를 먹었더랬다. 산해진미라 해도 어머니의 국수만큼 맛있진 않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소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몸도 불편하신데 운요의 생일도 기억해 주시고. 이리 예뻐해 주시니 버릇 나빠질까 걱정입니다, 후후.”
금 부인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면서 소청도 예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 수 있었다.
“머리 장식이야 열 개든 스무 개든 보내 드리죠. 운요는 철이 빨리 들어서 오히려 안쓰럽다니까요.”
목운요의 손을 끌어당겨 살펴보니 손목과 손가락이 부어 있었다. 그 모습에 금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당분간 푹 쉬면서 몸조리하렴. 아무 걱정 말고.”
“헤헤, 알겠습니다. 이 정도는 며칠 쉬면 멀쩡해진답니다.”
그녀는 몸의 회복 속도가 유난히 빠른 편이었다. 며칠 지나고 나면 몸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안 그랬다면 지금처럼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리지 못했을 거다.
다시 얻은 지금의 몸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목운요의 말에 금 부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부로 돌아간 뒤에도 퉁퉁 부은 아이의 손가락과 손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은홍을 시켜 몸에 좋은 약재를 사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 * *
세의를 완성하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일찌감치 잠을 청한 목운요는 이튿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날 줄 몰랐다.
소청이 막 지은 약식을 들고 방에 들어서자, 이불을 돌돌 뒤집어쓰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소청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다가가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거야? 남아와 아모는 벌써 정원을 다 치웠단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자는 척했지만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이를 어쩐다……. 어젯밤에 약식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길래 약식을 쪄 왔는데, 아직도 자고 있다니. 더 식기 전에 남아와 아모한테 줘야겠네.”
그 말에 목운요가 벌떡 일어나 소청의 품을 파고들며 툴툴거렸다.
“남아와 아모가 온 뒤로 어머니가 저한테 부쩍 소홀해지신 것 같아요!”
“후후, 어리광 부리기는. 이 어미한테 너보다 소중한 건 없단다.”
목운요는 미소를 활짝 지으며 소청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린 후에야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던 소청은 흰 목련이 수놓아진 푸른 옷소매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반년 동안 키가 많이 컸구나. 내년 봄이 되면 이 옷은 작아서 못 입겠는걸.”
목운요는 지금 걸친 옷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 옷은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 계속 입을 거예요!”
“후후, 이 어미 기분 좋으라고 그런 말도 다 하고. 옷이야 새로 지으면 되지.”
“예전보다 좋아졌다곤 해도 손 관리 잘하셔야 해요. 예전처럼 건강 해치는 모습은 제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 한 벌이면 충분해요.”
소청은 말을 아낀 채 아이를 따뜻하게 지켜봤다.
갓 지은 약식을 먹고 나니 온몸이 노곤했다. 간만에 맛보는 여유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목운요는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화로 옆에서 따뜻한 피풍의를 걸치고 폭신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마침 금란과 금교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바깥의 한기가 함께 묻어왔다.
“아아, 따뜻해서 좋네요. 요 며칠 날씨가 유난히 추워졌어요. 하늘이 잔뜩 흐린 걸 보니 내일은 큰 눈이 내리겠네요.”
목운요가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권했다.
“이걸 마시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소저. 소저께서 끓인 차를 총관님이 같이 드셨다면 제 실력이 형편없다고 혼내셨을 거예요”
“금란, 틈틈이 다도 실력을 닦도록 해요. 언젠가 금란에게 불선루를 맡길지도 모르잖아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도 제 분수는 제가 잘 알아요. 지금처럼 소저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기도 바쁜데, 불선루라뇨? 며칠도 못 가서 못 하겠다고 꽁무니를 뺄 게 뻔합니다.”
“후후, 겸손은. 그보다 금교, 지난번에 알아보라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됐나요?”
“진 총관님께 여쭤보니 채월각의 사람들을 이미 각지로 보냈다며, 며칠 내에 소식이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담팔왕이 풀려났다고 합니다. 출옥하자마자 담 씨 어르신이 회안성으로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듣자 하니 살이 쪽 빠졌다고 하던데, 옥살이하는 동안 고생깨나 한 듯합니다.”
“양 현령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분이세요. 이번 기회에 담팔왕의 죄를 철저히 파헤칠 생각이었는데 담림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죠. 그러니 천하의 담팔왕이라고 해도 옥에서 고생 좀 했을 거예요.”
“소저, 담팔왕을 너무 쉽게 놔주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그자가 먼저 우릴 찾아오겠죠. 오랫동안 채월각을 이끌어 온 담림도 절대로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예요. 지금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니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걸 아시면서 왜 먼저 손을 내미신 건가요? 자수법을 전수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찾아도 될 텐데…….”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채월각과의 원한이 사라지면 저도 칼을 겨눌 수 없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으면 열심히 생각하면 돼요. 금란, 금교. 두 사람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안목과 식견이 부족해요. 앞으로도 계속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야 해요.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하운방이나 불선루 총관 자리를 내줄 수도 있어요.”
목운요의 제의에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 두 사람은 소저를 계속 모시고 싶습니다.”
“후후, 그래 준다면 저도 여러분을 섭섭지 않게 챙겨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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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부인이 가져온 세의를 들고 조운년은 순무부를 찾았다.
실물을 확인한 장 순무는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더니, 조운년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최고의 표구사를 찾으라고 일렀다.
“아우, 걱정하지 말게! 세의의 내력을 내 소상히 설명할 테니. 아우와 금 부인의 이름이 빠질 리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게!”
조운년은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기뻐하며 조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금 부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며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지난번 왕 이낭의 꼬임에 넘어가 금 부인에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왕 이낭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사실을 접하고 나자, 자신이 옹졸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몇 날 며칠 동안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부인과 화해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홑몸도 아닌 부인이 자신 때문에 마음고생 하느라 수척해진 모습에 조운년은 자신을 탓했다. 그래서 더더욱 별다른 일이 없으면 금 부인과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덕분에 금슬 또한 예전보다 한결 돈독해진 상태였다.
조운년이 세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자, 금 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운요를 만나러 갔는데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아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요…….”
“세의 때문에 고생이 많았나 보구려. 솔직히 말해서 그 아이 덕분에 지난 반년 동안 우리에게 좋은 일이 많았던 것 같소. 곧 새해니 고맙다는 뜻으로 후한 선물을 보낼까 하오.”
“선물이야 당연히 보내 주셔야죠. 하지만 하운방과 불선루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데 아무리 후하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부인께서 따로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는 것이오?”
“목 소저의 어머니인 소 씨가 저와 나이가 비슷하답니다. 제가 지난 반년 동안 큰 신세를 졌지요. 그래서 말인데, 운요를 의녀(義女)로 삼으면 어떨까요? 그리하면 앞으로 그 아이가 하는 일에 저희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