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불타 버린 하운방
* * *
간단하게 요기를 한 뒤, 목운요는 소청오를 경릉성의 유명한 명승지로 안내했다.
아름다운 경치인 것은 분명했지만 마음을 온전히 뺏길 정도는 아니었다. 외려 소청오는 목운요에게 시선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목운요가 꽤나 교양 있고 견문도 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곤조곤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와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가시를 잔뜩 세운다는 위화감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소 대인,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경릉성의 풍경을 좀 더 둘러보고 싶으시다면 내일 다시 뵈어도 될까요?”
“좋습니다. 목 소저를 댁까지 모셔다드리라 하지요.”
“괜찮습니다. 시녀를 데려온 데다 마침 하운방도 이 근방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목운요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에 소청오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사실 목운요에게 경릉성 안내를 부탁한 것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한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 길가에서 난초가 수놓아진 손수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손이 향했다. 그리 대단할 게 없음에도 그 많은 것 중에서 한눈에 척 들어왔다.
“그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팔 전만 내십시오.”
소청오가 눈짓하자, 뒤따르던 시종이 잽싸게 돈을 건넸다.
좌판 주인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척 봐도 명문가의 지체 놓은 공자로 보이는 데다, 아까 하운방의 목 소저와 함께 있던 것을 기억해 둔 것이다.
“목 소저는 어여쁜 데다 성격도 좋아서 모두들 침이 마르게 칭찬한답니다. 저런 아가씨를 누가 아내로 맞이할지 벌써부터 부럽습니다.”
소청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손수건을 챙겼다.
어여쁜 건 맞지만 성격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그 병풍과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도…….
* * *
하운방에 돌아오니 성상이 내린 상을 소청이 살피고 있었다.
“요아야, 이 천을 보렴. 네 자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아시고 성상께서 이리 귀한 것을 내려 주셨나 보구나. 이걸로 네 옷을 한 벌 짓도록 하렴.”
“그리 마음에 드시면 어머니께 옷을 지어 드릴게요.”
“후후, 하여간 다정도 하지. 하사해 주신 황금은 잘 보관했다가 네 혼수를 장만할 때 쓰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소청이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어머니가 이리 기뻐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 아니,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해 둔 계획을 떠올리며 목운요는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소청오에게 맞서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 * *
한밤중의 경릉성. 모두가 조용히 잠에 빠진 그 시각, 어디선가 시뻘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순찰 중이던 야경꾼이 요란스레 징을 쳐 대자, 사람들이 옷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왔다. 불길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쪽은 하운방 아냐?”
하운방에 불이 났다는 소식에 경릉성 전체가 뒤집어졌다.
조운년은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로 하운방으로 달려왔다.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열심히 물을 붓고 있었지만, 불길이 워낙 거센 터라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운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목 소저는? 하운방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냐?”
“대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는 걸 보면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만…….”
하지만 말하는 이도 확실하진 않은 듯했다. 최근에 일이 바빠 목 소저 등은 줄곧 하운방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안에서 살려 달라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 살려! 여기 사람 있어요!”
홱 하고 고개를 쳐들자, 삼 층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 순간, 창문이 열리더니 두툼한 솜이불이 던져졌다. 그러곤 천을 여러 겹 이은 밧줄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 광경에 조운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 성상의 상을 하사받은 목운요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긴다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조운년은 호위들에게 허겁지겁 명령을 내렸다.
“밧줄이 타지 않게 어서 당겨라, 어서!”
건물 위에서 목운요는 소청을 부축하고 있었다.
“어머니, 밧줄을 잡고 내려가시면 돼요. 이불을 던져 놨으니 뛰어내리셔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요아야, 네가 먼저 내려가!”
“이럴 시간 없어요. 어서 내려가세요!”
목운요는 밧줄을 소청의 손에 쥐여 준 뒤, 조심스레 밀었다.
“사금, 그다음은 네가 내려가. 가서 어머니를 잘 돌봐 드려.”
“예, 소저!”
사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청의 뒤를 따라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소청이 무사히 착지한 것을 확인한 목운요가 금란 등에게 내려가라고 재촉했다.
“소저가 먼저 내려가세요!”
“전 괜찮으니 먼저 내려가세요!”
말을 탄 소청오가 하운방에 도착했을 때는, 건물 전체가 이미 불길에 뒤덮인 뒤였다.
식은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듯 온통 땀투성이가 된 조운년이 고개를 치켜든 채로 연신 고함을 질렀다.
“목 소저! 어서, 어서 내려오시오!”
목운요는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불길이 워낙 거센 탓에 찬물을 뒤집어쓴 그녀가 재빨리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 주변으로 달려드는 불길이 손의 상처를 파고들면서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어찌나 아픈지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밧줄을 놓치곤 중간까지 스르륵 미끄러졌다. 설상가상 밧줄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청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한 표정을 한 채 서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요아야!”
“목 소저!”
“소저, 조심하세요!”
고개를 숙인 목운요가 바닥과의 높이를 가늠하더니, 입술을 꽉 문 채로 손에서 밧줄을 놓았다.
쉬이익-!
온몸에 격통이 찾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는 서늘한 향이 풍기는 누군가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밧줄을 놓는 목운요를 포착한 소청오가 잽싸게 손을 뻗어 목운요를 안아 든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팔다리 중 어느 하나는 부러졌을 것이 뻔했다.
“목 소저, 괜찮으십니까?”
목운요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더니, 소청 등이 무사한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그녀를 안아 든 소청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데다 뺨에는 얼룩덜룩 재가 묻어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품 안 가득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때, 금란과 금교가 재빨리 목운요를 부축했다.
“소저, 소저! 제 말이 들리세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 조운년은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타오르는 불길보다 마음속 열불이 더 뜨겁게 타올랐다.
“멀쩡한 하운방에 왜 불이 난 거지? 게다가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데 밖에서 대문이 잠겨 있다니?!”
품 안에 느껴지는 무게가 사라지자, 소청오는 손을 늘어뜨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대문의 자물쇠를 노려보는 그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성상의 상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오전에 하운방에 전달한 상이 바로 그날 새까맣게 타 버렸는데, 서릉으로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장 순무 역시 새까맣게 타 버린 하운방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소청오가 입술을 사리물며 말을 꺼냈다.
“장 대인,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셔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성상께 아무 말도 드릴 수 없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을 소인이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밝혀내겠습니다.”
장 순무는 이를 악문 채로 근처에 단서가 있는지 수색해 보라는 명을 내렸다.
* * *
목운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소청이 그녀의 옆에서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어머니…….”
소청이 흠칫하더니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요아야, 정신이 드니? 다행이다, 다행이야. 걱정돼서 죽을 뻔했단다.”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손바닥을 바닥에 가져다 대는 순간, 끔찍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윽!”
“손을 다쳤으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거라.”
하지만 목운요는 기어이 침상 위에 앉은 채 소청의 품에 파고들었다. 상처를 입은 손이 옷깃을 꽉 잡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 말에 소청의 눈에서 주르륵 하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너도 참,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어미가 있으니 무서워할 것 없다.”
목운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불을 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라도 죄스러운 마음을 덜고 싶었다.
소청은 갓난아이를 달래듯 목운요를 품에 안고서 토닥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한참 뒤에야 마음을 진정시킨 목운요가 하운방의 상태를 물었다.
“불이 워낙 크게 나서 죄다 타 버렸다고 하더구나.”
불타는 하운방을 보며 소청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무사할 걸 보니 아쉽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위로가 됐다.
“요아야, 하운방이 없어졌지만 다시 세우면 되니 마음 쓰지 말렴.”
“알겠어요. 저도 그럴 테니 어머니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더 근사한 침방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너만 믿으마.”
“오늘 밤은 어머니랑 같이 잘래요.”
소청은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오늘은 둘이서 꼭 껴안고 자자꾸나.”
가슴이 벌렁거리긴 그녀 역시 매한가지였던 터라 아이랑 같이 자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됐다.
이내 소청에게 기댄 목운요의 눈빛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끝도 보이지 않는 한기가 차올랐다.
‘어머니, 하운방을 금세 다시 세워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