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61화 (61/442)

61화 소청오

가까스로 추슬렀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목운요는 증오심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목운요가 소청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녀 목운요, 소 대인을 뵙습니다.”

목운요의 등장에 소청오는 살짝 당황했다. 성지 속의 여인이 이렇게 어릴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목운요는 달빛에 빛나는 연꽃 연못이 수놓아진 살구색 주름치마를 걸친 채였다. 홀로 우뚝 선 연꽃처럼 그녀의 주변으로 그윽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소청오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목 소저. 듣자 하니 소저의 자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던데, 할머님께 드릴 생신 선물로 병풍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소 대인의 청이니 소녀 역시 그리하고 싶습니다만, 요새 수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 대인을 실망시켜 드려 송구합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소청오는 이야기 내내 눈을 내리깐 목운요를 훑어봤다. 가늘고 기다란 속눈썹이 햇빛 속에 팔락일 때면 무지개가 피어나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때문에 자신의 청을 거절했다는 불쾌감이 크게 들지 않았다.

그때, 목운요가 혈흔이 가득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 위에 새겨진 상처가 유독 처연해 보였다.

“얼마 전에 손을 다쳤답니다. 죄송합니다, 소 대인.”

“아닙니다. 갑작스레 이런 청을 드린 제가 죄송합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그에 목운요는 살짝 무릎을 굽혀 절을 올린 뒤 금 부인의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소청오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그 후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

목운요와 금 부인이 뒤뜰로 가자, 많은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랜 시간 덕담을 주고받은 후에야 순무 부인은 사람들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목운요의 자리는 금 부인의 옆에 마련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건넸다.

목운요는 시종일관 미소로 답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겁난다는 듯한 표정을 이따금씩 보이곤 했다.

그 모습에 금 부인은 목운요가 놀라울 만치 총명한 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성상의 상을 받고 난 뒤에 아이가 자만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목운요는 거의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소청오의 등장으로 인해 깊숙한 곳에 꼭꼭 감춰 놨던 아픈 과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기 때문이다.

“운요야, 안색이 안 좋구나. 손이 그리 아픈 거니?”

금 부인은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에는 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들떠 아이가 다친 줄도 몰랐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가슴이 좀 답답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면 정원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렴. 화원도 그 옆에 있단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회가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순무부 앞에서 대기 중이던 금란과 금교는 창백한 안색의 목운요가 모습을 드러내자, 허겁지겁 달려가 부축했다.

“소저,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죠.”

마차가 금릉교(金陵橋)를 지날 무렵, 마차를 세우라는 목운요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가슴을 움켜쥔 목운요가 강가로 뛰어가더니 헛구역질을 했다.

금란과 금교가 크게 놀라 목운요를 부축했다.

“소저, 괜찮으신가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목운요가 금릉교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소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요. 두 사람은 마차에서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소저. 부디 조심하세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위로 붉은 저녁놀이 내려앉고 있었다. 노을에 물든 붉은 물결이 끔찍했던 과거를 연상시켰다.

소씨 가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분노를 자제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소씨 가문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갉아먹는 악몽과도 같았다.

목운요는 눈을 감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바람에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퍼지면서 주르륵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 상태로 어머니를 뵈면 걱정하실 것이 분명하니 서둘러 평정심을 되찾아야 했다.

한참 뒤에야 눈을 뜨자, 하늘은 어느새 까맣게 변해 있었다. 있는 힘껏 입가를 끌어 올리니 예전보다 더 환하고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청오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소씨 가문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두렵다면 천천히 이겨 내면 된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소청오, 소청오……. 가을 쓰르라미는 푸른 풀을 좋아하고, 우는 봉황은 푸른 오동나무에 깃든다(寒螿愛碧草, 鳴鳳棲青梧. 이백(李白)의 시 맥상상(陌上桑)의 일부 구절로, 소청오의 이름인 청오(青梧)를 연상시킨다.) 하니, 과연 얼마나 대단하려나…….”

“목 소저께서 내 이름의 출처를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란 목운요가 고개를 돌리자, 금릉교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소청오의 모습이 보였다.

소청오는 목운요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부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위화감은 그녀를 발견한 순간부터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의 소녀는 죽을힘을 다해 뭔가를 참고 있는 듯했다. 그 감정의 깊이가 어찌나 크고 깊은지, 멀리서 지켜보는 자신의 가슴이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도 힘들어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낯선 감정에 소청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쓸데없는 데 소중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이성은 아까부터 경고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소 대인을 뵙습니다. 방금 전에는 실언한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를 바라보는 소청오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가녀린 체구, 희미한 미소를 띤 입가……. 그것이 계속 거슬렸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대인. 날이 어두우니 소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소저의 상처는 언제쯤 나을 것 같습니까?”

“상처를 종종 입곤 하는 터라 더디게 낫는 편입니다.”

소청오 조모의 생신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손이 낫는다고 해도 그때까지 병풍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상처도 쉽게 낫지 못할 것이다. 상처를 낫게 할 생각이 자신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소청오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정말 아쉽게 되었군요. 예전에 금수산하도를 수놓은 병풍을 본 적이 있는데, 혀를 내두를 만큼 아름답더군요.”

“그렇다면 그 병풍을 만든 사람을 찾아 부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병풍을 만든 자를 찾아내지 못한 터라 그것도 할 수 없게 됐답니다.”

“아마도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목운요가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목운요의 뒷모습을 보며 소청오는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빠르게 떠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분내 나는 여인들의 연심을 흔들던 자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신선했다.

목운요가 다리에서 내려오자 금란과 금교가 재빨리 달려갔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한 목운요의 모습에 두 사람 모두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저, 괜찮으신 건가요?”

“네, 괜찮아요.”

* * *

하운방에 돌아온 목운요를 소청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성상께서 그리 많은 상을 내려 주시다니……. 순무부에서 언제쯤 그 상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진 않으셨고?”

“아마 내일 아침에 보내 주실 것 같아요. 성상께서 내리신 상이니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후후, 그래.”

소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성상의 상을 모셔 둘 방을 살피러 돌아갔다.

소청이 방문을 나서자, 목운요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차를 들고 온 금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아무래도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의원을 불러올까요?”

“괜찮아요. 금란도 어서 돌아가서 쉬세요.”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목운요가 손바닥을 펼치더니 상처를 살폈다.

순무부에 소청오가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했다. 금수산하도 병풍을 만든 사람을 찾기 위해 소청오가 자신의 자수 실력을 알아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행히 손의 상처로 자수를 선보일 일은 없어졌지만, 자신의 감정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한 탓에 소청오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소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청오는 성상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총명한 자였다. 방금 금릉교에서 금수산하도 병풍을 언급한 것도 자신의 반응을 떠보려던 게 분명했다.

혹 자신과 어머니를 조사라도 하는 날엔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역시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좋겠어.”

목운요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큰 그림이 완성되자,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가을 쓰르라미는 푸른 풀을 좋아하고, 우는 봉황은 푸른 오동나무에 깃든다……. 어차피 닥친 일이니 미리 간을 봐 두는 것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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