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집 좀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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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원에서 시위 우항은 월왕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인님, 목 소저가 노부부를 대신해 소장을 써 주며 관아에 고발하라고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부하들을 통해 조사해 보니 고발된 죄목은 모두 사실이라고 합니다. 채월각에 억울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제대로 취조한다면 채월각은 경릉성에서 다시는 가게 문을 열지 못할 겁니다.”
손에 든 종이를 넘기는 월왕의 안색은 가라앉아 있었다.
“목운요는 아직 하운방에 있는 건가?”
“예, 일이 바빠 하운방으로 거처까지 옮겼다 합니다.”
월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변의 온도가 좀 전보다 낮아진 듯했다.
그때 갑자기 진 총관이 불쑥 들어왔다.
“왕야, 제가 기르는 토끼가 옆집으로 넘어갔습니다! 제가 얼마나 정성 들여 키운 건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하운방에 가서 목 소저한테 문을 열어 달라고 해도 될까요?”
진 총관을 돌아보는 우항의 눈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갑자기 시장에 가서 토끼를 사 오라고 닦달을 하더니, 소택의 문을 열려고 그런 거였군!
* * *
늦은 오후, 낮잠이 들었던 목운요가 인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저, 사람이 찾아왔어요. 옆집 금수원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쪽 총관께서 기르는 토끼가 아가씨 댁으로 도망친 것 같다면서……. 집 문을 열어 줄 수 있는지 여쭤보시네요.”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목운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금란, 육냥과 같이 집에 다녀올게요.”
“저도 같이 갈게요.”
“괜찮아요. 작업에 문제가 없는지 틈틈이 확인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의 눈에 담장에 세워진 사다리가 보였다. 슬며시 차오르는 미소와 함께 목운요는 사다리를 타고 금수원으로 향했다.
지난번 들렀을 때는 한밤중인 데다가 월왕의 서재로 직행했던 터라, 오늘에서야 월왕의 거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다. 가슴이 절로 탁 트이는 광경에 그녀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허, 목 소저가 직접 와 주시다니 송구합니다. 왕야의 서재에 다과를 준비했으니 잠시 들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에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월왕이 성큼성큼 걸어와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걸 보니 그날 밤 꿈에서 봤던 두 줄기 빛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졌다.
“사야를 뵙습니다.”
인사를 올리자, 홱 소리가 나도록 돌아선 월왕의 입에서 따라오라는 말이 떨어졌다. 목운요는 진 총관을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월왕의 뒤를 쫓아갔다.
그 모습에 진 총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 * *
서재로 들어간 월왕에게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구해 달라던 사람들은 언제 데려갈 거지?”
하지만 서재의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목운요의 입에선 동문서답이 튀어나왔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제가 정원을 둘러봐도 될까요?”
“평범한 곳이다. 딱히 볼 만한 것도 없지.”
월왕은 미간을 구긴 채 귀찮은 듯 대꾸했다.
“사야께서 바쁘시면 진 총관님께 안내를 부탁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이에 목운요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월왕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바깥소문처럼 그리 무정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감사합니다, 사야.”
월왕의 보폭이 큰 탓에 목운요는 부지런히 쫓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숨을 할딱거렸다.
결국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매섭게 째려봤다. 그리 무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완전 착각이었다.
한편 월왕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도도도 달려오던 발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자, 뒤를 돌아봤다.
“왜 안 오는 거지?”
목운요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왈칵 솟구쳤다.
“전 정원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지, 정원을 뛰자고 한 게 아닌걸요!”
“쯧, 귀찮군.”
월왕은 꽤나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지만, 목운요로부터 항의를 받고 나선 걷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월왕도 천천히 걷는 데 얼추 적응이 됐다. 그는 뒤따라오는 목운요를 슬쩍 곁눈질했다.
그녀는 망을 보는 다람쥐처럼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조금 멀리 걸어갔다 싶으면 치맛자락을 들곤 잽싸게 따라왔다. 좀처럼 따라잡히지 않을 때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곤 했다.
이를 보는 월왕의 입가가 슬며시 위로 휘어졌다.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도 꼭 저렇게 자신을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하곤 했다.
한편 목운요는 주위를 둘러보며 부지런히 고민을 이어 갔다. 그전까진 막연하게 느껴졌던 생각이, 오늘 금수원을 보고 난 뒤로 점점 또렷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금수원의 설계 방식은 무척 정교했다. 물줄기를 따라 동쪽과 서쪽에 지어진 가옥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도, 저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다리가 이어진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니, 월왕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사야,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보통 공을 들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시켜 지으신 건가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활짝 웃는 목운요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사야, 그동안 다관을 차릴 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좀처럼 눈에 띄는 곳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사야의 정원을 보니 이곳에 견줄 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순간 월왕의 입가에 냉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여길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여기에 다관을 차리겠다?”
“예, 물론 공짜로 빌려 달라는 건 아니고요. 반반씩 나누면 어떨까요?”
“허, 사람을 빌려줬는데 이젠 땅까지 빌려 달라? 날로 먹는 그런 장사가 세상천지 또 어디에 있더냐?”
“제가 어째서 날로 먹는다는 거죠? 사람과 땅만 있다고 다관을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다관이니 차, 물, 인맥 모두 갖춰야 하죠. 게다가 문제가 생기면 제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테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리하는 편이 사야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대체 어디가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옛 시에 이르기를, ‘여산의 참모습 알기 어려우니, 이는 내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월왕은 다관을 이용해 강남땅에 사람을 심어, 훗날의 대업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금수원에 다관을 차린다면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니, 불필요한 문제나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월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한참 바라본 뒤에 시선을 거뒀다.
“사 대 육. 네가 사 할을 가져라.”
“예, 좋습니다!”
매상의 사 할밖에 챙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돈 버느라 일 년 내내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때 진 총관이 사람을 시켜 찻물과 다과를 대령했다.
“사야, 목 소저. 꽤 오랫동안 정원을 돌아보신 듯한데, 정자에서 잠시 쉬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간단히 다과상을 차렸으니 목이라도 축이시죠.”
“감사합니다, 총관님. 방금 사야께서 이곳 금수원에 다관을 세워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마땅히 제가 할 일인데 부탁이라뇨? 그런 말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거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진 총관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월왕의 기색을 슬쩍 살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차만 마실 뿐이었다.
보아하니 주인님도 허락하신 것 같다. 후후, 이리 즐거울 수가! 이 기회를 잘 살리면 좋은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자신만 눈 뜬 봉사가 됐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성가 놈에게 슬쩍 귀띔해 줘야겠다.
정자에서 잠시 쉰 뒤, 목운요는 정원 곳곳을 머릿속에 새기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다.
정원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하지만, 다관을 지으려면 어쩔 수 없이 몇 군데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진 총관이 붓과 종이, 그리고 정원의 설계도를 가지고 왔다.
“목 소저, 도움이 되실까 싶어 가져와 보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도안에 목운요가 보물이라도 얻은 듯 기뻐했다.
“총관님, 감사해요! 이것만 있으면 다관을 더 빨리 열 수 있을 거예요!”
가뜩이나 어여쁜 소녀가 활짝 웃으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애당초 진 총관이 목운요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순전히 월왕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접 대화해 보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도면을 얻은 목운요는 자신의 구상을 종이에 상세히 적기 시작했다.
* * *
정원을 샅샅이 둘러보느라 두 시진이나 지난 줄도 몰랐다. 어머니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에 목운요가 재빨리 인사를 올렸다.
“시간이 늦어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사야.”
“잠깐, 내일 난 이곳을 떠난다.”
“그럼 앞으로의 일은 진 총관님에게 직접 말씀드리면 될까요?”
월왕은 봉지인 월서로 돌아가는 듯했다. 차라리 잘됐다. 그가 여기에 없는 편이 자신에게도 편할 것이다.
“그래.”
“부디 몸조심하세요, 사야.”
말을 마친 목운요가 부리나케 담장으로 달려가 사다리를 타고 사라졌다. 그 모습에 월왕은 미간을 살짝 구기더니 서재로 돌아갔다.
“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진 총관에게 시위 우항이 넌지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우항의 모습에 진 총관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서 성가 놈에게 주인님을 모실 사람을 몇 명 더 붙여 달라고 해야겠다. 우항은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면 곧잘 해내는 편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