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41화 (41/442)

41화 각자의 계산

* * *

육냥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높은 담을 바라봤다. 그의 차가운 눈이 당혹스러운 듯 살짝 일그러졌다.

이에 목운요는 손에 비수를 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이렇게 높은 담은 넘을 수 없는 거야?”

“아닙니다…….”

목운요는 육냥에게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그럼 서둘러. 얼른 이야기 끝내고 와서 쉬고 싶으니까. 머리가 진짜 아픈 것 같아.”

육냥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꾹 다문 그가 목운요의 허리를 끌어안고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나 싶더니, 어느새 그녀는 공중 위에 있었다. 순간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적응했다.

“무공을 할 줄 알면 정말 편하겠네.”

온몸이 빳빳하게 굳을 정도로 긴장한 그의 귓가에 목운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좀처럼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어느 순간, 육냥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장검을 뽑아 든 그가 목운요의 앞을 막아섰다.

온화한 표정의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목운요인 것을 확인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전 금수원의 진 총관이라고 합니다. 주인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진 총관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사야를 뵈러 왔어요.”

“절 따라오십시오. 주인님은 지금 서재에 계시답니다.”

* * *

진 총관이 문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크흠, 주인님. 목 소저가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 저는 가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목운요를 서재에 들여보내자마자 진 총관은 문 앞에 있는 시위 우항에게 눈짓을 보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진 총관님?”

“쯧, 답답하긴. 그나저나 목 소저가 데려온 호위는 어디 있지? 그래도 명색이 손님인데 어떻게 혼자 내버려 둘 수 있겠나? 자네가 가서 상대 좀 해 주게. 손님방으로 데려가서 다과라도 나누면서…….”

“호위라면 주인님의 안전을 언제나 살펴야 하는데, 제가 오라고 해서 졸래졸래 따라오겠습니까?”

그에 진 총관이 우항을 향해 냅다 발길질을 했다.

“데리고 가라면 좀 데리고 가. 손님방이 안 된다면 최대한 멀리 데리고 가면 되잖아! 이팔청춘들끼리 밤늦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그걸 꼭 망쳐야겠어? 어휴, 하여간 눈치도 없긴…….”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목 소저와 주인님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말을 마친 우항이 육냥을 찾아 나섰다. 이팔청춘은 무슨……. 속에 능구렁이가 수십, 수백 마리는 들었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밀어라도 속삭일 줄 아나.

한편 서재 안, 월왕은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내려놓고 목운요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상대의 목덜미로 향했다. 분으로 교묘하게 감추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꾸욱 쥐었다. 월왕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엄청난 위압감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야, 하운방의 향후 계획에 대해 상의하러 왔어요.”

“향후 계획?”

하운방이 간판을 내건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향후 계획이라니?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사야께서도 하운방의 주인이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하운방에 사람이 부족해요. 그래서 사람을 구하려 하는데, 밖에서 사람을 데려오기엔 믿음직스럽지 않죠. 그래서 사야께서 사람을 빌려주셨으면 해요.”

목운요를 향한 월왕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한밤중에 찾아와선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내 사람은 믿을 만하다는 건가?”

“어쨌든 하운방의 매상 중 삼 할을 사야께 드리잖아요. 돈줄이 되는 일을 내버려 두진 않으실 테죠.”

“내 부하들 중에는 수를 놓을 수 있는 자가 없다.”

부하들에게 실과 바늘을 쥐여 준다면,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단칼에 죽여 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사야의 사람 중에서 무공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보통 사람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있나요?”

목운요를 향한 월왕의 눈빛이 점점 더 의심으로 채워졌다.

“아이가 필요한 거냐?”

“다관을 차릴 생각이에요. 차를 끓이고 손님을 맞이할 사람들이 필요해요.”

“자세히 말해 봐.”

“방금 말했잖아요? 말 그대로 차를 끓이고 손님을 대접할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옅은 미소를 띤 입가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짓궂게 빛났다.

기루나 유곽, 다관이나 주점은 예로부터 온갖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자신은 월왕에게 장소를 제공해 줄 생각이었다. 그가 계산이 빠른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월왕은 성공할 자신이 있는지 물었다.

“사야께서 사람만 주시면 자신 있어요.”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다관이 아니다.”

순진한 미소를 짓는 목운요를 보며 월왕은 그녀에게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계곡물처럼 맑은 그녀의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변방에서 지내며 날마다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지옥을 살아온 자신이다. 덕분에 직감 역시 남달리 뛰어났다.

자신에게 이런 대담한 제안을 할 정도면, 손에 ‘확실한 패’를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요사스럽다고 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는 볼수록 자신의 흥미를 당겼다.

월왕의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게 물들었다.

“몇 명이 필요하지?”

자신의 말에 목운요의 눈빛은 환하게 반짝거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경계를 풀 만큼 그 빛은 순수한 기쁨으로 빛났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월왕이 재빨리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경릉성에서만 열 거니까 오십 명이면 될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도 다관을 열 생각인 건가?”

“여기서 성공하면 대륙 곳곳에 다관을 열어야죠.”

상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포부를 드러냈다.

“꿈도 크군.”

월왕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서도 장사꾼은 최하위층에 속했다. 장사로 명성을 날리겠다고 한 사람 중에 성공한 이가 과연 몇이나 되던가?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춘수방도 그러지 않았던가. 크게 명성을 떨쳤지만 하룻밤 사이에 춘수방이라는 세 글자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목운요가 그저 생글생글 웃음만 짓는 사이,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다과를 든 진 총관이었다. 목운요가 여전히 서 있는 걸 본 진 총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주인님도! 저렇게 가녀린 소저를 어찌 계속 세워 두고 계신단 말인가?’

진 총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앉을 것을 권했다.

“목 소저, 앉으십시오. 다과를 준비했는데 아가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운요는 월왕을 슬쩍 쳐다봤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앉아도 된다는 것 같았다.

오늘 정신없이 바빠 무척 피곤했던 탓에, 그녀는 진 총관의 권유대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진 총관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뭐든 드시고 싶은 게 있거든 사람을 시켜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바로 옆에 살고 있으니까요, 후후.”

목운요는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진 총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진 총관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재를 나갔다.

* * *

한편 월왕은 목운요의 제안을 진지하게 따져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안 그래도 강남땅에 더 많은 첩자를 심어 두려고 했다. 그런데 목운요의 손을 빌려 다관을 운영한다면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첩자를 심어 둘 수 있을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대업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오랜 고민 끝에 마음의 결단을 내린 월왕이 고개를 들자, 의자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목운요의 모습이 보였다.

의자에 슬며시 기댄 목운요의 치맛자락 밖으로, 비단신의 코가 삐죽이 보였다. 앙증맞은 비단신으로 감싼 새하얀 발은 어떨지 문뜩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월왕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향했다. 흘러내린 소맷자락 사이로 최고급 백옥처럼 새하얀 팔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던 목운요는 저를 향한 뜨거운 눈빛에 잠에서 깬 뒤, 이내 자세를 바르게 갖췄다.

“누굴 쓸지 마음을 정하신 건가요?”

월왕은 시선을 거뒀다. 단정히 내려간 소맷자락을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 닷새 후에 사람을 보내지. 지금 하운방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다관을 열 시간이나 기운이 있는지 모르겠군.”

장사꾼에게 섣부른 판단으로 규모를 확장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운방은 최근 여러 건의 주문을 받은 터라 다른 일을 돌볼 겨를이 없을 터였다.

“춘수방과 채월각은 경릉성에서 막상막하의 세를 자랑했죠. 하지만 춘수방이 가게 간판을 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그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일을 가르치고, 전 하운방에서 서서히 발을 뺄 생각이에요.”

“춘수방의 사람들을 채월각에서 잔뜩 데려갔다고 들었다. 남은 사람들 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이도 없을 텐데, 하운방의 명성에 먹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게 바로 사야와 상의할 두 번째 문제랍니다. 솜씨가 뛰어난 이들을 채월각에서 다 채갔으니, 되찾아올 생각이에요.”

“쉽지 않을 텐데?”

채월각이 춘수방과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밀리지 않은 건, 남다른 실력과 배경을 지닌 덕분이었다. 그런 채월각의 기반을 가져오는 일은 필시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채월각과 하운방은 노는 물이 다른걸요.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곳이 경릉성 한 곳뿐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목운요의 눈빛에서 그녀의 의중을 읽어 낸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채월각을 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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