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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0화 (40/442)

40화 장사진

* * *

한편 시위 우항은 금수원 담벼락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월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담벼락을 훌쩍 넘어오는 월왕의 모습에 한숨을 돌린 우항이 재빨리 달려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안부를 묻는 우항에게 월왕은 고개를 짧게 끄덕여 주곤 자신의 침소로 돌아갔다.

뒤돌아선 우항의 눈에 고개를 삐죽 내밀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진 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월왕의 침소와 멀리 떨어진 정자로 장소로 옮겨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

“주인님께서 방금 옆집의 목 소저를 만나고 오신 건가?”

“진 총관님, 다 아시면서 어찌 물으시는 겁니까?”

“크흠, 그 목 소저라는 아가씨 말이야. 외모도 빼어나고 총기가 넘치더군. 강남에서 오랜 세월 살았지만, 목 소저보다 더 똘똘한 소저를 본 적 없는 것 같아.”

나이가 어린 게 흠이지만, 이 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흐흐흐…….”

진 총관의 묘한 웃음에 우항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멀찍이 떨어졌다.

“제발 뜬금없이 그리 웃지 마십시오! 성 공공과 그만 연락하시고요. 그러다가 주인님의 대사를 망치면 큰일 아닙니까!”

진 총관과 성 공공 모두 주인님을 보필한 ‘원로대신’으로서, 주인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이들이었다. 주인님도 그런 두 사람을 크게 신뢰했다.

하지만 목 소저에 관한 일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주인님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괜히 두 어르신이 지팡이 짚고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진 총관은 자신을 타이르는 우항을 홱 하고 째려보더니,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자리를 떠났다. 자신과 성가 놈이 주인님을 모신 지 어언 이십 년, 누굴 그런 눈치도 없는 늙은이로 아나?!

평소 나이를 앞세워 큰소리 뻥뻥 치곤 하는 그이지만, 주인님 앞에선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급할 뿐이었다.

약관(弱冠)이 된 주인님은 곁에 단 한 번도 여인을 둔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시녀조차도.

그는 그저, 과거의 아픈 기억이 주인님에게 깊은 상처를 준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었다.

* * *

갑작스레 나타난 월왕 때문에 그날 밤, 목운요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오자 그녀는 거울로 목에 난 상처를 확인해 보았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눈에 확연히 보이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분으로 가려야 했다.

기운 없는 아이의 모습에 소청은 걱정이 앞섰다.

“요아야, 차라리 오늘 하루 쉬는 게 어떻겠니?”

“괜찮아요. 그냥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게다가 오늘 손님들과 미리 약속을 잡은 터라 쉴 수도 없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손님들을 접대한 뒤에 올라가서 한숨 자고 나면 기운이 펄펄 날 거예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래도 영 안 좋으면 금란과 금교를 통해 내게 알려다오.”

“알겠어요.”

하운방에 도착한 목운요의 눈에 가게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좀처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겨우 안으로 들어서니, 대청에서는 금란과 금교를 비롯한 소녀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대청 한가운데 여섯 명의 부인이 앉아 있었다.

목운요를 발견한 금교가 빠르게 달려왔다.

“소저, 여기 계신 부인들께서 옷을 짓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을 더 낼 테니 일주일 안에 옷을 지어 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지금 하운방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주문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데다 금추와 금국마저 빠진 마당에 일주일 안에 여러 벌의 옷을 짓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목운요는 우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부인들을 뵙습니다. 부인들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하운방에서는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옷을 짓는지라, 일주일 안에 여러 벌의 옷을 지을 수 없답니다.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양 부인한테는 일주일 안에 옷을 지어다 주기로 했다고 하던데? 웃돈이 부족하다는 거야? 이백 냥이 적다면 삼백 냥- 아니, 오백 냥을 더 내면 되겠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그 말에 목운요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경릉성에는 침방이 여러 곳 있답니다. 명성을 놓고 보자면 하운방은 채월각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부인께서 채월각 대신 저희 하운방을 찾아 주신 건, 분명 그 솜씨를 높이 사 주셨기 때문일 겁니다. 돈을 벌 생각에 일을 서두르다가 부인께 실망을 안겨 드릴까 두렵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면…….”

“한 달 안에 반드시 부인들에게 옷을 보내 드리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금란, 위에 올라가서 내가 준비한 장미 면약 여섯 병을 가지고 와요. 부인들, 사과의 뜻으로 약소하지만 장미 면약을 선물할 테니, 혹여 마음이 상하셨다면 소녀의 성의를 봐서 양해해 주세요.”

“장미 면약? 금 부인의 가게에서 파는 그거?”

“예.”

목운요의 대답에 부인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장미 면약은 작은 병에 든 것만 해도 십여 냥에 달했다. 그녀들에게 비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금 부인의 가게에서도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거나, 운이 없으면 다 팔려서 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게다가 목운요가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금 부인과 돈독한 사이라던데,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얌전히 따라야 했다.

옷을 맞추러 들렀다가 뜻밖에 장미 면약을 공짜로 얻은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깍듯하게 대하는 목운요를 보니 내심 불쾌했던 기분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럼 부탁해요, 목 소저.”

그렇게 부인들을 보낸 뒤, 원래 약속을 잡았던 부인 두 명이 가게를 찾았다.

오늘 선보일 옷의 주제는 호수 건너편의 여인과 등불 아래의 여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이들로, 우수에 젖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정성껏 준비한 옷을 입히자, 문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운방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못난 호박도 수박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랬다. 붉은 옷을 걸친 선무사 부인의 자태에 경릉성은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두 명 이상 사람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선무사 부인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왔다.

심지어 붉은 옷을 걸친 정열람의 미인도는, 진열대에 올려놓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가게 앞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재주꾼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이 하운방을 나선 부인들의 미인도를 그려 내곤 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운요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하운방의 명성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테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오늘은 유독 손님이 많은 탓에 목운요는 잠시 눈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찌나 바쁜지 차 마실 시간도 없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야 가게를 찾은 부인들을 모두 배웅할 수 있었다.

의자에 기댄 그녀는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금란이 재빨리 다가와 욱신거리는 어깨며 손목을 주물러 줬다.

“소저, 이렇게 하면 좀 편안하실 거예요.”

“금란도 오늘 정신없이 바빴잖아요. 앉아서 좀 쉬어요.”

목운요는 금란에게 앉으라고 한 뒤 다른 소녀를 불렀다.

“오늘 총 열다섯 벌의 주문을 받았어요. 모두 한 달 안에 완성해야 하는데, 다행히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해서 단순한 형태의 도안을 그려 둔 게 있어요. 그렇다곤 해도 평소 옷을 지을 때처럼 정성을 다해야 해요. 그리고, 앞으로 한 달 동안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팻말을 걸어요. 일단 주문받은 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예, 소저.”

“소저, 안색이 안 좋은데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 옷은 내일부터 지으면 되니…….”

지끈거리는 두통에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래요, 그럼. 여러분도 일찍 쉬어요.”

“예.”

마차에 탄 목운요가 벽에 기대 눈을 감는데, 마차를 몰던 육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평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육냥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에 목운요는 번쩍하고 눈을 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듣게 된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어젯밤에 주인님을 지키지 못했으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아, 그렇네. 그럼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육냥에게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목운요는 서두르지 않고 그가 대답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육냥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목운요가 미소를 지운 채 허리를 곧추세웠다. 열세 살의 앳된 얼굴에서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긴, 너 혼자서 나와 어머니를 지키니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한계는 있겠지. 일손을 찾아야겠어.”

목운요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따져 봤다. 하운방의 간판을 내걸고 며칠 동안 큰돈을 벌었다. 누가 봐도 대박을 터뜨린 건 분명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옷을 짓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밤낮 할 것 없이 일한 것치곤 벌어들이는 돈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채월각 같은 규모는 되어야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려면 긴 시간이 걸릴 터. 지금의 자신은 그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려 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운 미인방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을 끌어냈다. 이번에 주문받은 옷을 다 지으면 다음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월왕이라는 커다란 언덕이 생겼으니 열심히 비벼 볼 수 있었다.

“사람을 늘릴 생각이십니까?”

“맞아. 하지만 지금처럼 사람을 뽑아서 훈련시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미 훈련된 사람을 붙여 줄게.”

그 말에 육냥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문득 어제 자신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댔던 사내가 떠올랐다. 젖 먹던 힘을 다했지만, 상대를 쓰러뜨리기는커녕 그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이미 훈련된 사람을 붙여 주겠다는 건, 그자에게 도움을 구하겠다는 뜻일까? 자신도 모르게 육냥의 미간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육냥의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목운요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곧장 방으로 돌아온 뒤, 옷을 갖춰 입었다.

“육냥, 금수원에 가야겠어. 날 데려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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