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흥정의 묘미
“솔직히 말해서 세 사람의 차림새를 보면 평범한 민가의 사람들 같은데, 이 물건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워낙 귀한 것들이라 말이지.”
“아저씨 말씀이 맞아요. 그래서 천천히 할 생각이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돈을 모아서 필요한 재료를 하나하나 장만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겠죠.”
“그래서 말인데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단다. 그게 말이지, 내가 후원자가 되어 네게 최고급 실과 천을 내주마.”
그 말에 목운요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제게 왜 이리 잘해 주시는 건데요?”
“진정하고 내 말을 한번 들어 보렴. 비침화수법이 오래전에 맥이 끊겨 무척 아쉽게 생각했는데, 오늘 직접 보게 되어 참으로 기뻤단다. 사실 곧 있으면 집안 큰 어르신의 생신인데, 네가 허락해 준다면 산하도를 생신 선물로 드리고 싶구나.”
“아버지를 위해 만들 거라 팔지 않을 거예요.”
“너의 지극한 효심을 내 어찌 모르겠어? 하나 최고급 재료를 쓰려면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해야 할 텐데, 지하에 계신 영존께서 그걸 알면 얼마나 속상해하실지 어찌 모른단 말이야? 산하도를 한 땀, 한 땀 수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효를 다한 셈이야. 게다가 그걸 내게 팔면 그 돈으로 평생 걱정 없이 살 테니, 이 또한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는 효를 다한 셈이지. 쉽게 말해서 일거삼득이라고나 할까?”
과연 춘수방을 쥐락펴락하는 총관답다. 사람의 마음을 살살 굴리는 말재간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아저씨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목운요가 관심을 보이자, 총관은 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꾸나. 보아하니 성품도 바르고 약속도 잘 지킬 것 같으니, 일단 필요한 물품부터 집으로 보내 주마. 수를 놓으면서 팔지, 말지 천천히 생각해 봐도 좋다.”
“그리하면 제가 너무 폐를 끼치는 건데…….”
과분한 호의에 당혹해하는 목운요를 보며 총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차오르는 흥분을 애써 누른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담 가질 것 없어. 마음씨 착한 소저와 인연을 맺게 된 게 너무 기뻐서 그런 것이니!”
이 일이 최대한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입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일이 잘 풀린다면 산하도를 손에 넣게 될 것이고, 일이 안 풀린다고 해도 어린 계집애 하나 상대하는 게 무슨 대수랴? 장사꾼 사전에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이었다.
* * *
결국 목운요는 소청, 양 씨와 함께 총관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성문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소청과 양 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요아야!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양 씨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눈물, 콧물 흘리던 어린애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듯했다.
목운요와 춘수방 총관의 대화를 자신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만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반면 소청은 초조한 얼굴로 목운요의 손을 꽉 쥐었다. 아이한테서 기이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걱정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목운요는 그런 소청의 손을 슬쩍 잡으며 안심하라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양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아버지의 책에서 비침화수법을 알게 된 뒤로 몰래 연습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이제 숙달되어 별로 어렵지도 않아요. 게다가 상대한테 얕보이지 않으려면 대단한 걸 아는 척해야 할 것 같아서 그만……. 흉한 꼴 보여 드려 죄송해요.”
“너도 참, 어디가 흉하단 말이야? 역시 아버지한테 배워서 그런가, 머리 쓰는 게 무척 비상하구나. 다만 춘수방 총관이 공짜로 물건을 보내 줬으니 앞으로 또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이로구나.”
“춘수방처럼 명성이 자자한 곳에선 저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마차가 하언촌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에서 내려지는 화려한 자수 실을 보며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운요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양 씨가 춘수방에서 있었던 일을 한바탕 풀어놓으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이내 목운요는 바늘을 쥐고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동네의 여인네들이 죄다 몰려드는 바람에 정원에는 발 디딜 곳도 없을 지경이었다.
요 며칠 소청과 더욱 친해진 양 씨가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때라도 묻으면 집을 팔아도 소용없다고!”
그 말에 소란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목운요에게 집중된 시선은 여전했다.
“아이고, 저게 바늘이라고?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서 보기만 해도 눈이 빙빙 도네!”
“바느질하는 건 둘째 치고 뭐가 보여야 할 것 아냐? 머리카락보다 가는 바늘로 어떻게 수를 놓는다는 거야?”
목운요가 비싼 자수 실을 공짜로 얻어 왔다는 이야기에 어떤 사람들은 배 아파했다.
하지만 막상 수놓는 모습을 보자 입을 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이 좋아 자수지, 저건 ‘자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을 쥐고 온종일 형형색색의 실을 고르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러나 목운요는 자수 놓을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더니 손가락을 재빨리 놀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천이 다양한 색의 실로 채워졌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붓으로 그림을 쓱쓱 그려 내는 것 같았다.
* * *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다.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식어 갔다. 원래 겨울에는 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봄이 되면 논밭을 갈아야 하니 쓸데없는 일에 한눈팔 새가 없었던 것이다.
소청은 목운요의 일을 도와주느라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했다. 그런 모녀를 위해 양 씨는 아예 밥을 넉넉히 지어 두 사람에게 보내 주곤 했다.
목운요도 그런 양 씨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양 씨에게 은자 한 냥을 건넸다.
낯빛이 변한 양 씨의 모습에 목운요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돈 때문에 저희 모녀를 챙겨 주시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공짜 밥을 계속 얻어먹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염치도 없이 계속 신세만 질 수는 없어요.”
“아이고…….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네가 준 돈으로 맛난 것을 사다 줄 테니 그걸로 몸보신이나 하렴. 두 모녀가 몸이 어찌 그리 약한지, 보는 내가 다 속이 상해서 그래.”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참, 저한테 쓰다 남은 자수 실이 있는데, 할 일 없으시면 제가 자수 좀 가르쳐 드릴까요?”
“내가 손재주가 없어서 아무리 가르쳐 줘도 소용없을 거야.”
“자수를 놓는 법이 다양하니 쉬운 것부터 배우시면 돼요. 아주머니는 눈썰미가 좋으시니 일단 한번 배워 두었다가, 농한기 때 수건에 수라도 놓아 보세요. 팔면 살림살이에 보탬도 될 테고요.”
“내가 할 수 있으려나?”
“당연히 하실 수 있죠.”
양 씨는 자신과 어머니를 진심으로 챙겼다. 그런 양 씨에게 목운요 역시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양 씨에게 틈틈이 자수 놓는 법을 가르쳤다.
목운요가 무늬를 그리면, 양 씨가 그 위에 삐뚤빼뚤 수를 놓았다. 솜씨만 놓고 본다면 손재주가 없는 건 분명했지만, 한 땀 한 땀 진중하게 수를 놓는 진지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목운요가 그린 무늬는 시중에서 볼 수 없는 것이라, 서툴게 수를 놓아도 일단 완성하고 나면 꽤나 좋아 보였다. 조금씩 실력이 늘자 양 씨도 무척 뿌듯해했다.
언성에서 큰 장터가 열린다는 소식에, 양 씨는 그동안 틈틈이 수놓은 수건들을 챙겨 길을 나섰다.
수건을 본 사람들은 솜씨에 놀라며 장당 이십 문전(文錢)을 주고 사들였다.
배운 것이 없으니 몸뚱이 하나 의지해 먹고살아야 했는데, 잘난 것 없는 자신이 고상하게 수를 놓아 돈을 번다는 사실에 양 씨는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양 씨가 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목운요는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더욱 정성껏 양 씨를 가르쳤다. 손만 빠르면 하루에 몇 장도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거저먹는 것과 진배없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목운요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산하도를 흰 면포에 조심스레 쌌다. 그러곤 소청, 양 씨와 함께 언성을 찾았다.
춘수방에 도착하자, 총관이 사람을 시켜 세 사람을 다실로 안내했다.
“목 소저, 마침 잘 왔어. 뭐 부족한 건 없고?”
춘수방 총관이 자신을 ‘목 소저’라고 불렀지만 목운요는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뒷조사를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수상했을 것이다.
“그동안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아저씨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제가 돈을 모아서 재료를 사고, 그걸로 산하도를 완성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아저씨께서 물건을 대 주셨으면 좋겠는데…… 돈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그거야 네 솜씨에 달렸지. 자수 같은 건 돈이 정해져 있는 게 아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나면 수십, 수백 냥도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전도 못 받지.”
말을 마친 춘수방 주인이 목운요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겁을 집어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장사로 잔뼈가 굵은 자신보다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대충 윤곽을 잡아 봤는데 아저씨가 한번 봐주세요.”
목운요가 노리는 건 피라미가 아니라 ‘대물’이었다.
면포에 싼 것을 펼치자 총관은 눈 한번 떼지 않고 찬찬히 ‘절경’을 감상했다. 흰 공백 위에 푸른 하늘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굽이굽이 산등성이가 물결치고 있었다. 척 봐도 웅장한 기세가 절로 느껴졌다.
모습을 드러낸 금수강산(錦繡江山)의 자태에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솜씨로구나. 이게 그린 게 아니라 사람이 일일이 수를 놓은 것이라니…….”
그 모습에 목운요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제게 얼마를 주실 수 있을지.”
“그, 그건…….”
정신없이 절경에 빠져 있던 총관은 목운요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실력을 보니 보통내기가 아닌 게 분명했다. 값을 너무 낮게 부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게 뻔했다. 이건 황상께 올릴 물건인데 돈 몇 푼 때문에 이런 걸 놓칠 순 없지 않은가?
그에 총관의 고민이 길어지던 그때였다. 목운요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실 누가 찾아와선 제가 수놓은 걸 사고 싶다고 했어요. 춘수방과 이미 약조한 터라 팔 수 없다고 했더니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죠.”
“누가 널 찾아온 거지?”
“저도 몰라요. 다만 돌아갈 때 누군가가 담 씨(譚氏)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요.”
담 씨? 담 씨라면 채월각의 담가 놈이 틀림없으리라!
어쩐지 요 며칠 동안 묘하게 굴길래 왜 저러나 싶었더니, 금수산하도를 노리고 있었던 거였나.
총관은 속으로 열불이 터졌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가격을 제시했다.
“이거면 되겠니?”
이런 ‘대작’은 사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귀한 것이었다. 게다가 채월각의 담가 놈이 자신이 점찍어 둔 물건에 집적거리지 못하게 빨리 손에 넣어야 했다.
총관이 목운요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내보였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는지 총관은 자신을 계속 떠보려고 했다. 얕은 잔꾀를 부리는 모습에 목운요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계속 자신을 도발했으니 확실히 밟아 주는 수밖에.
“와아, 십만 냥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컥!? 십만 냥이라니? 어린것이 뻔뻔하기도 하지.
“귀한 것은 분명하지만, 십만 냥은 너무한 것 같은데?”
“담 씨 아저씨는 이건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거라고 하셨는데…….”
“그럼 천 냥을…….”
“아저씨, 제게 주신 자수 실과 천이 모두 얼마죠? 그 돈 당장 드릴게요. 산하도는 팔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