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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3화 (13/442)

13화 미끼를 문 고기

* * *

다음 날, 목운요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요아야, 어딜 가는 거니?”

“언성에서 사야 할 게 있어서요.”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마친 터라 목운요는 아침 일찍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이의 말에 소청은 어리둥절했지만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양 씨 아주머니 아니세요? 아주머니도 언성에 가시는 거예요?”

“날도 이리 추운데, 언성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야?”

“어머니랑 돈을 벌 방도를 알아보러 가는 중이에요. 아주머니도 같이 가요.”

평소 양 씨는 두 모녀를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목운요의 제의에 양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그건 그렇고, 잠시 있어 봐라. 내가 바깥양반한테 이장 댁 당나귀를 빌려 오라고 할 테니.”

자신들을 살뜰히 챙겨 주는 양 씨의 모습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 * *

양 씨의 남편은 과묵한 사람이었다. 언성으로 가는 내내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몰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반면 양 씨와 소청은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여유로움을 즐겼다.

이윽고 언성에 도착한 목운요는 언성에서 가장 큰 포목점(布木店, 옷감을 파는 가게)인 춘수방(春繡坊)을 찾았다.

춘수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양 씨는 주눅이 들었다. 척 봐도 비싼 티가 줄줄 나는 옷을 걸친 사람들 사이에 비비적거리고 들어갔다가 옷이라도 더럽히면 집을 팔아도 모자랄 것이 뻔했다.

“운요야, 여긴 엄청 비싼 것만 파는 곳이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 만한 게 없을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물건을 살 때는 꼭 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수중에 수십 냥의 은자가 있긴 했지만 춘수방에 들어선 순간, 이 돈으로는 실오라기 하나 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리 끝에 목운요는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기로 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사람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총관을 찾았다.

“아저씨, 춘수방은 온갖 종류의 자수 실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장부를 정리 중이던 춘수방의 총관은 어린 소녀의 도발적인 질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춘수방은 천하에서도 내로라하는 최고의 공방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 춘수방을 대놓고 도발하는 이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호기심에 고개를 든 총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리지만, 장차 빼어난 미색으로 뭇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 분명한 계집아이였다.

게다가 저 당찬 모습이라니……. 남루한 옷차림이 아니었다면 명문가의 규수라고 생각할 만큼 기품이 흘렀다.

“얘야, 자수 실을 사러 온 게냐?”

“맞아요. 가장 큰 자수대(刺繡臺, 자수를 놓기 위해 천을 팽팽하게 잡는 기구)랑 가장 좋은 자수 실이 필요해요. 그것도 색깔별로 다요.”

목운요의 말에 총관은 점점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건 우리 가게에서 가장 큰 자수대란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할 셈이지?”

“당연히 수를 놓을 거예요.”

“후후, 가장 큰 자수대에다 네가 말한 색색의 자수 실까지 합치면 무척 비쌀 텐데.”

총관은 기가 잔뜩 죽은 양 씨와 소청을 슬쩍 곁눈질했다. 아무리 봐도 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팔기 싫으면 관두세요. 맞은편에 있는 채월각(彩月閣)에 가면 되니까요.”

총관의 시선에 어머니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왈칵 짜증이 난 목운요가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만!”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목운요를 부르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범상치 않은 소녀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수 실은 워낙 많아 따로 보관하고 있단다. 위에 올라가서 보여 주마.”

오늘 기분도 좋은데 좋은 인연 맺는 셈 치고, 철부지 소녀한테 눈 호강이나 시켜 주자꾸나.

총관의 말에 목운요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쫓아 갔다.

위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비단 특유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형형색색의 비단을 본 양 씨의 눈이 등잔불만 하게 커졌다.

그와 달리 목운요의 시선은 커다란 자수대 위에 걸려 있는 자수로 향했다.

“아저씨, 종류가 많기는 한데 색상이 다 있는 건 아니네요.”

“그게 무슨 말이니?”

목운요의 지적에 총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붉은색만 놓고 봐도 진홍색, 대추색, 장미꽃색, 분홍색은 있지만, 연분홍색과 담홍색은 없잖아요. 제 말이 틀렸나요?”

“아, 그건……. 연분홍색과 담홍색은 분홍색과 진홍색이랑 비슷하니까, 게다가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목운요가 실망한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찾는 사람이 없는 건 그냥 다들 적당히 흉내만 내니까 그런 거죠. 전 중요하게 쓸데가 있어서 한 치도 소홀해선 안 된다고요. 아저씨, 이건 제게 필요한 물품을 적은 목록인데 가게에 있는지 한번 봐주세요.”

“이렇게 많이? 그리고 네가 적은 호박색은 금황색과 비슷하지 않니? 어느 포목점에 가도 호박색은 팔지 않을 거다.”

국법(國法)에 따라 금황색은 민간은 물론이거니와 사대부 가문에서도 쓸 수 없었다. 관차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십중팔구 관아로 끌려가 투옥될 것이 뻔했다.

금황색이 아니라 호박색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 눈에는 별 차이가 없을 테니 곤욕스러운 건 물건을 판 쪽이 될 것이다.

“그래서 호박색 자수 실을 안 파시겠다는 거예요?”

“그래, 안 판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줄 알았다면 그냥 돌려보낼 것을,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며 총관은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단호한 그의 말에 목운요가 싱긋 웃더니 옷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저씨, 이것 좀 봐주세요.”

“그건 손수건 아니냐? 뭐 그리 대단한 거…… 이, 이건……!”

총관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운요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낚아채듯 쥐어 들었다.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자세히 살펴본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건, 전설로만 전해지던 비침화수법(飛針畵繡法) 아니냐?”

“후후, 볼 줄 아시네요? 수를 놓은 천이나 바늘이 신통치 않아 간신히 봐줄 정도랍니다.”

손으로 일일이 짚어 가며 살피니, 손수건 위로 당장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것 같은 나비가 보였다.

“비침화수법은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과 터럭처럼 가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기법이지. 뛰어난 기교로 사물이건 사람이건 원래보다 더욱 생생히 그려 낸다더니, 그 말이 정녕 사실이었구나.”

“비침화수법으로 그림 한 폭을 수놓을 거예요. 이제 제게 물건을 파실 생각이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그제야 총관의 눈에 목운요는 남루한 차림의 소녀가 아니라, 자신에게 큰돈을 벌어다 줄 ‘황금 거위’로 보였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이야기하느라 차 한잔 대접하지 못하고 귀한 손님들을 계속 세워 두고 있었다니! 그러지 말고 다실에서 차 한잔 마시며 잠깐 쉬자꾸나. 사람을 시켜 주문한 물건을 찾아오라고 할 테니.”

목운요가 눈을 반짝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총관은 다과상을 내오라고 명한 뒤, 비침화수법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해 주었지만,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잠시 뒤, 형형색색의 자수 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아까 본 것보다도 갑절은 좋아 보였다.

“아저씨, 모두 얼만가요?”

“실례인 줄 알지만, 대체 얼마나 큰 작품을 만들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대체 어떤 크기이기에 자수 실을 이리 많이 사려는 건지 궁금하구나.”

“얼마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셨는데,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금수산하도(錦繡山河圖)를 수놓을 생각이에요.”

“호오, 그래서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 거니?”

“원화(原畫) 크기대로 수를 놓는다면 너비가 육 척(尺, 1척=30㎝), 높이는 오 척 정도 될 거예요.”

“원체 정교한 기법이라, 새 한 마리 수놓는 데만 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텐데. 이렇게 큰 작품을 완성하는 데 대략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니 천천히 하면 될 거예요.”

눈을 내리깐 목운요는 다과상 위에 올라와 있는 간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를 집어 들어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서둘러 시작하면 얼마 만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총관은 긴장된 표정을 애써 숨긴 채 태연하게 물었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만 있다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으리라!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니 급할 것 없어요. 천천히 해도 그만인걸요.”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낚싯줄을 끌어 올리면 고기도 놓치고, 낚싯줄도 끊어질 수 있다. 그러니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 오히려 낚싯줄을 길게 풀어야 미끼를 푼 고기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아저씨, 내오신 물건은 모두 얼마인가요? 아버지를 위한 것이니 당연히 제일 좋은 재료만 쓰고 싶어요. 다만 한꺼번에 사기엔 돈이 부족해, 당장 쓸 것만 일단 사 가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어린데도 효심이 이리 깊다니 정말 대견하기도 하지. 일손이 부족하면 내가 사람을 붙여 줄 수도 있는데…….”

“제가 아직 어리지만 허풍이나 떠는 철부지 어린애는 아니랍니다. 아버지를 따라 금수산하도를 무수히 봤던 터라 어느 위치에 어느 색상의 실을 얼마나 써야 할지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어요. 서둘러 작업하면 두 달이 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사실이냐?”

살짝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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