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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17)

104화

라이핀이 황궁으로 돌아오기 몇 시간 전.

이안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리제아나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옆에 머물러주기만을 바랐다.

한데 그녀가 먼저 그에게 고백을 해온 것이다.

그것도 시선을 맞추며 자신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리제아나 당신이….’

그녀는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고요한 얼굴로 타이르듯 말하는 모습, 무언가를 얻기 위해 대범하게 나오는 모습, 화를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는 모습…. 그동안 이안은 그녀의 여러 모습을 보아왔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모두 알지 않아도 좋았다. 리제아나가 고백한 마음이 온전히 진심이라는 것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좋아…한다고…? 그대가 나를 …? 말도 안 돼.”

이안이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안은 제게 훌륭한 안내자 같은 사람이었는걸요.”

“안내자?”

“음…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준 안내자, 나에게 진심을 베풀어주고 친절을 알려준 안내자요. 그리고 지금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안내해준 사람이니까요.”

리제아나가 그의 손을 앙상한 두 손으로 맞잡아 올렸다. 그를 다정하게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그새 저에 대한 마음이 식으신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데. 전 이제야 고백하는 건데….”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대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면 애초에 구하러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안, 그런데 어깨에 흐르는 피는 뭐예요?”

리제아나의 뾰족한 물음에 이안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가 항상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을 떠올린 그가 손을 들어 어깨의 붕대를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건…. 하지만 그대도! 지금 다쳤잖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결국 리제아나는 먼저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녀가 괘씸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지만 잠시일 뿐 맞잡은 손을 꼭 잡았다.

“제게 지금껏 많이 위기들이 있었어요. 정말 죽을 뻔했던 적이 많았어요. 스스로 죽고 싶었을 때도 있었고요.”

리제아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만은 자각하지 못한 듯 했지만 이안은 어렴풋이 그녀의 버릇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와 이안은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녀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분명 그녀는 그를 위로하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꿈에 빠져들었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캄캄하고 공허한, 끝이 없는 어둠의 연속이었는데… 그곳에서 당신 생각만 난 거 있죠.”

리제아나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수줍게 웅얼거렸다. 비스듬히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무서워서 이안을 불렀었는데 아무 답이 없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계속, 불렀었죠.”

“내가 답을 안 했구나.”

이안이 무심코 꺼내든 말에도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마등처럼 이안과 함께 했던 추억들, 불꽃놀이, 시내, 무도회, 케이크 등등 함께 했던 순간들이 찰나지만 눈앞을 스쳐 가는 거예요.”

“불꽃놀이, 시내, 무도회,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준비해주었던 꽃들 말이지?”

“편지까지도요.”

“내가 마탑을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써두었던 편지? 다 읽었다니…. 조금 창피한데.”

이안은 편지에 낯간지러운 말들을 적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입가를 매만지며 무안함을 달랬다.

리제아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자랑스레 목걸이에 걸려 있는 보라 곰돌이 목걸이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자 이렇게 곰 인형을 목걸이로 만들어서 이안의 약속은 지켰어요.”

“잘했어, 그대. 정말 잘했어. 이것으로 그대를 찾을 수 있었거든.”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이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지막에… 라이핀이 제게 광각초를 내밀었을 때.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응.”

광각초가 가진 무서운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안은 치미는 화를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이제 죽었구나, 포기하고 이안, 당신을 떠올리는데 당신의 모습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동안 많이 울었어요.”

“미안해 늦어서.”

“아니 어쩌면 그때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당신이 나를 찾아오리라 믿고 있어서였을 지도 모르죠.”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 번 더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자신의 강한 힘으로 소중한 이를 지킬 거라 자만하던 이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리제아나 앞에는 이제 사랑하는 여인을 또 잃을까 겁쟁이가 된 남자만이 서 있었다.

“감사도, 사과도 필요 없어요.”

“응?”

땅으로 시선을 내리던 리제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영롱한 빛이 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붉은 눈과 마주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시겠어요?”

이안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동안 그를 이해하고 진실로 그를 사랑해주는 여인은 없었다. 모두 그의 화려한 겉모습을 보고 다가올 뿐이었다.

시엘과 하르힌조차도, 이안을 윗사람으로서 그를 아낄 뿐. 그를 남자로서 사랑해주는 이는 없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저 내뱉으면 될 뿐이었다. 드디어 두 사람의 마음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어. 참아온 지 꽤 오래되었거든. 리제아나, 당신을 사랑해. 난…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이안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문밖으로 기척을 들은 리제아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리제?”

“발걸음 소리가.”

이곳을 찾을 사람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리제아나는 이안으로부터 검집을 받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일이 끝나면…,”

이안이 리제아나의 곁에 서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 리제.”

“네. 우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온전히 행복해져요.”

리제아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라이핀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리제아나는 증오스러운 눈을 한 채 기꺼이 그를 맞았다.

“당신.”

리제아나가 음산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 ⚜

라이핀은 여인인 리제아나를 얕보고 방심했다.

라이핀은 이안의 마법과 리제아나의 검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리제아나가 검으로 그를 노리면 이안이 뒤에서 마법으로 그를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검을 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에게 자신을 공격할 힘이 없을 거라 단언했던 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검은 언제 배운 거야 도대체?”

“싸우면서 말하다니. 여유 있으시네요. 제가 조금 더 힘을 써야겠습니다.”

라이핀은 그녀를 대화로 회유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의 계략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짧게 그의 물음에 답하며 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리제아나 늦지 않았다니까!”

“당신의 목숨을 거두는 일이요? 저는 무척 늦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리제아나의 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빠르게 다가왔다. 라이핀이 서둘러 몸을 뒤로 빼 간신히 그녀의 검을 피했다.

‘리제아나를 인질로 삼으면 순순히 잡혀줄 거다…. 그나저나 저 눈은 정말 맹수같이 시뻘겋군.’

라이핀은 어깨 너머로 이안을 바라보며 분한 얼굴을 했다. 라이핀은 리제아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참으로 그녀의 칼을 받아내기 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죽이지 않아. 하지만 당신 뒤의 남자는 여기서 산 채로 나갈 수 없을 거야, 리제아나.”

“헛소리하지 마, 라이핀!”

리제아나가 다시 검을 들었다. 라이핀의 예상대로라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검을 휘두를 것이다. 검은 분명히 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라이핀은 씩 웃었다. 그녀의 검을 쳐내고 반대로 그가 그녀를 제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리제아나의 검은 그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이 오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으나 이내 빠르게 검의 방향이 꺾였다.

라이핀의 시선이 그녀의 검에 따라갈 때를 노려 리제아나는 단숨에 이안에게 배웠던 대로 내려 베기를 했다.

라이핀이 황급히 제 검을 들어 그녀의 검을 막아내자 리제아나는 그 틈을 노려 몸을 틀고 어깨로 그를 밀어냈다.

그 바람에 라이핀의 몸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물론 리제아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거칠게 상대를 베는 거야. 그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때 리제아나는 이안과의 마지막 수련에서 그가 당부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그리곤 외쳤다.

“이제 정말 끝이야, 라이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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