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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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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황궁 안에는 리제아나가 남아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녀가 잠결에까지 부르던 그 이안이라는 자가 침입했다면?

‘아니야. 침착해. 텐젤에서 감히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렇게 대뜸 쳐들어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일라이자에게로 바로 가 상황을 보자.’

침착하려 애써도 리제아나를 잃을 거란 걱정과 텐젤이 침입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말에게 가던 걸음을 멈췄다.

“안 되겠어. 머스켓, 공작. 그대들은 일라이자에게로 가보도록 해. 나는 따로 가볼 곳이 있다.”

“네? 어디를 가시겠단 말씀입니까?”

“예, 폐하. 확인 후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머스켓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지만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머스켓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나라는 눈치를 보내자 머스켓은 마지못해 몸을 뒤로 물렀다.

공작의 명에 머스켓은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이핀은 빗줄기가 떨어지는 하늘을 불쾌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라이핀은 주먹을 세게 쥐며 악다운 잇새로 중얼거렸다.

감히 그에게 덤벼든 자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어야 했다. 다시는 그에게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밟아 주리라.

라이핀은 말 위에 올라탔다. 침실에 홀로 둔 리제아나를 떠올리며 라이핀은 고삐를 힘 있게 쥐었다.

“이랴!”

그가 탄 말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성문 앞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비드 황궁의 마법사들은 그리 뛰어난 마법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하르힌이 홀로 감당하기 충분했다.

하르힌은 마법을 수련할 때 이안과 대결해 왔다. 아비드 황궁의 마법사들은 이안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었다. 하르힌은 손쉽게 마법사들을 제압해 나갔다.

“내가 마법 공격을 모두 막아주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전진해라!”

“하르힌! 건방 떨지 마!”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알렉스가 대장 행세를 하는 하르힌을 아니꼬운 듯 바라보았다. 하르힌이 이안을 따라 북부 영지를 방문할 때마다 함께 훈련해온 덕에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텐젤의 기사들은 강했다. 무엇보다 아비드 병사들보다 그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혹독한 수련을 거친 이안의 기사단과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고 악착같이 아비드 병사들에게 맞서 싸웠다.

텐젤의 기사단에 의해 점점 아비드의 병사들이 밀리기 시작하자 거대한 폭파 마법이 떨어졌다.

하르힌이 폭파 마법을 막아냈다. 그가 방어막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많은 숫자의 텐젤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이게 무슨…!”

“감히, 감히 텐젤 녀석들이 대낮에 아비드의 황궁 앞을 공격해?”

궁 앞으로 문득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검을 쥐고 하르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남자는 마법사로 보이는 이와 함께였다.

“호오, 네 놈은 누구지?”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시다. 네 놈이라 함부로 부르지 마라. 침입자 주제에!”

“보좌관이라…. 아비드 제국 황제의 보좌관이라니 내가 놀라야 하나?”

“닥치래도!”

“모두 비켜! 저 외완경잡이는 내가 상대한다.”

“외안경잡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일라이자는 불쾌한 듯 자신의 모노클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하르힌에게 달려들었다. 하르힌은 그의 검을 보호막으로 막았지만 강한 힘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무엇이지?”

“뭐?”

전투 도중에 누가 저리 여유롭게 대화하는지 일라이자는 도저히 하르힌의 속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일라이자라고 한다.”

“난 하르힌이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네.”

“뭐?”

“그리고… 잘 가라…!”

일라이자가 재차 되묻자 그것이 신호인 양 하르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대한 폭파 마법이 일라이자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말은 빠르게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 안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라이핀은 소란을 뚫고 침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윽고 침실에 도착한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검을 든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그녀의 검은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리제아나, 당신이 어떻게…!”

더듬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라이핀이 자리에서 멈췄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백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가 라이핀의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핀을 마주하자 남자의 눈이 사납게 빛나며 그의 앞에 선 리제아나를 감쌌다.

“리제아나, 그 남자는 누구지?”

라이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싼 그의 손을 당장이라도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인내하며 물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아실 테니 굳이 소개를 해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리제아나는 그의 질문에 짤막하게 답했다. 그와 조금이라도 말을 나누기 싫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리제아나…. 어째서 당신이….”

분명 그가 아는 리제아나는 언제나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의 애정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였는데…. 이제 그녀는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복수하겠다고, 항상 다짐해왔죠. 배신감으로 물드는 당신의 눈이 꼭 보고 싶었어.”

예전의 그녀라면 반드시 붙였을 경어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라이핀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리제아나, 저 자식이 당신한테 무슨 짓거리라도 한 거야?”

“짓거리? 그러는 폐하야말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리제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사람이 이렇게나 반쪽이 된 겁니까?”

이안이 분노한 눈으로 그의 앞에 섰다. 그러자 라이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오호라, 백발에 시뻘건 야수 같은 눈.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어. 텐젤의 개만도 못한 공작 아닌가?”

“말조심하시죠. 타국의 황제로서 당신을 존중해주려고 하던 참이니까.”

“존중? 푸핫, 웃기는군. 날 존중하고 싶다면 먼저 리제아나에게서 떨어져라.”

“어째서입니까? 제 사람입니다.”

이안의 도발에 라이핀이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안을 마주쳤을 때 라이핀은 그가 낯설지 않았다. 이내 그는 금세 리제아나가 애타게 찾던 그 남자, 이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먼저 분노가 치솟았다.

당당하게 리제아나를 자신의 사람이라 말하는 그를 보자 라이핀은 더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죽고 싶나.”

“저를 죽이고 싶습니까? 하지만 싸울 이는 내가 아니라….”

이안은 말을 잇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검을 든 리제아나가 그의 앞으로 섰다.

“?”

라이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제아나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창문 너머로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개가 번쩍이는 빛을 등지고 선 라이핀이 섬뜩하게 웃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요. 내가 당신과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어째서 내가 당신과 싸워야 하지? 당신은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될 사람이야. 또, 나의 아내며 여인이지.”

‘아내’와 ‘여인’이라는 단어에 리제아나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쯤 하면 반항은 됐잖아? 얌전히 돌아오면 아무 책임도 묻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리제, 역시 내가 나서야겠어.”

“리제? 그녀의 애칭을 함부로 부르지 마. 이 사람은 누가 뭐래도 나랑 결혼했으니까.”

이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라이핀이 빠르게 검을 뽑았다.

“두 사람 다 그만 하세요.”

리제아나는 혹 이안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섰다.

“정리가 필요하다면 제가 나서도록 하죠. 이 자리에서 제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라이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허울뿐인 황후 자리는 제가 거부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아내로서의 삶은 이제 지긋지긋해!”

“리제아나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나에게로 와. 응? 당신은 지금 홀리고 있는 것뿐이야.”

“난 사랑과 증오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사랑할 상대는 스스로 정해요.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제 한 가지뿐이에요.”

리제아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라이핀의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리제아나는 보랏빛 눈을 번뜩이며 검을 쳐들어 검 끝을 라이핀에게로 향하게 했다.

“당신과 파혼하는 것이에요.”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라이핀의 커다란 외침이 침실에 울려 퍼졌다.

“이러지 마, 리제아나. 당신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잖아!”

“현실을 부정하려는 꼴이 예전의 저 같네요. 폐하께서 델리사를 곁에 둔 순간부터 저희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예전에는 아름답게 보였던 그의 푸른 머리칼이 이젠 그저 볼품없게만 보였다. 그녀에게 매달리듯 애처롭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그저 추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말 뒤로 정적이 흘렀다. 라이핀이 오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인 내가 불허한다. 한데 당신이 무슨 수로 이혼하겠어…!”

“당신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리제아나는 단숨에 라이핀에게로 달려들었다. 흔들림 없이 높이 검을 쳐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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