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한 달.
분명 반역을 준비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이제 많은 이들이 이안을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 기울어진 운명.
이안은 이제 더 운명에 끌려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떠나야 했다. 데벤시아 소유의 두 번째 공작령으로.
이미 데벤시아 가문의 제1 기사단 대장인 알렉스에게 미리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가 직접 가야 했다.
이안은 홀로 아무도 없는 집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마호가니 책상에 발을 올리며 등을 깊게 의자에 파묻고 눈을 감았다.
‘곧 텐젤은 큰 혼란에 잠길 거다. 그렇다면 리제아나는 어떻게 하지….’
내전이 일어난다면 수도 안팎으로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이안은 리제아나만은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사히 있게끔 하고 싶었다.
군사를 더 모으기 위해 영지에 내려가야 했다. 단연 하르힌 또한 그를 따를 것이다.
이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래서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안은 자리에서 단번에 일어나 그의 발이 향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 그는 네르아의 방문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의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녀는 그의 뜻을 거역한 이였다.
리제아나를 해치려 한 그녀를 이안은 마법을 봉인해 직접 내쫓았다.
그러니 이안은 네르아의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응당 그녀가 한 일에 받아야 할 대가였다.
방에 도착한 그는 노크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리제아나는 흔쾌히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이안은 가볍게 문을 열었다. 그는 착잡한 얼굴 위로 미소를 덧씌웠다.
“안녕.”
“무슨 일로 오셨어요?”
리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모습이 햇빛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사랑스러워 보였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차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리제아나가 탁상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는 언제나 예의가 넘쳤다.
무엇을 하던 자신보다 남이 먼저였다. 일어서는 그녀에게 이안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괜찮아. 편히 있어 줘.”
이안이 가볍게 미소를 짓자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그는 리제아나가 선 탁상 앞의 티 테이블 의자로 걸어가 의자를 빼냈다.
“?”
“앉아, 리제아나.”
“….”
리제아나는 괜찮다며 거부했지만 이안의 고집을 알았기에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가 추임새를 넣자 더 회피할 수 없었던 리제아나는 그의 애정 어린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죠?”
리제아나가 고개를 들어 그녀 뒤로 의자를 천천히 미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복잡해.”
이안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왜인지 평소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이안의 눈 주변이 어두워 보였다. 낮은 목소리에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말씀해보세요.”
이안이 자리에 앉자 리제아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아나. 나, 떠나야 해.”
“네?”
이안은 본론을 먼저 꺼냈다.
그의 말에 되레 리제아나는 놀란 목소리로 그에게 반문했다.
“어….”
그 모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귀여웠던지라 이안은 피식 웃으며 터질뻔한 웃음을 삼켰다.
“미안…. 이렇게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안은 낮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정확히 언제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일순 이안의 눈빛이 조금 흐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끝에…요?”
의미심장한 말투에 되려 리제아나는 불안감을 담은 채로 되풀이했다.
그의 말투 속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무언가가 벌어지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당신을 위해 말을 아끼는 편이 좋을 거야.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목의 상처는 좀 어때?”
“괜찮아졌어요. 하르힌이 받아온 약도 효과가 좋아서 흉터도 남지 않을 것 같고요.”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자 이안은 줄곧 신경 쓰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에 리제아나의 손은 목을 향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리제아나, 곧 텐젤에 큰일이 벌어질 거야.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이 마탑 안은 안전하니 마탑을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말에 위험한 직감이 들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리제아나는 텐젤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일 당장 떠나시는 거예요?”
“…그럴 예정일 거야. 빨리 떠날수록 좋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더 묻지 않고 그가 떠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 섭섭했다. 하지만 이안은 서운할 틈조차 사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이안은 재빠르게 리제아나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서둘러 그녀의 시선을 바로잡았다.
“마지막 훈련, 함께 할까?”
“마지막 훈련이요?”
공작저에서 ‘그일’이 있고 난 뒤, 그들은 한참이나 새벽 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이안은 그녀에게 감히 손대기를 주저했고 리제아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거리를 두던 차였다.
그런데 이안이 훈련을 함께하자고 하니 리제아나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마지막 새벽 훈련. 참석해줬으면 하는데.”
“!”
혹시 그녀가 거절할까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리제아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그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마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채로 헤어졌다.
⚜ ⚜ ⚜
리제아나와 헤어진 후, 홀로 집무실로 돌아오던 이안은 한참 동안 네르아의 방문 앞에 서서 방을 바라보다가 결국 걸음을 돌렸다.
집무실 안에는 단호한 표정을 한 하르힌이 앉아있었다.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르힌이 입을 뗐다.
“감히 저를 빼놓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하르힌.”
이안은 놀란 내색 없이 하르힌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까?”
하르힌은 이안에게서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되물었다. 아마 그는 답을 들을 때까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 당연하지.”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이안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전 당연히 저하께서 절 빼놓고 가실 줄 알았죠! 리제아나 님을 마탑에서 안전히 지키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리시는 것도 예상했고요.”
“리제아나?”
하르힌의 거칠어지는 말투가 거슬려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누구 마음대로 리제아나라고 부르는 거지?”
이안의 말에 하르힌의 표정이 잠시 경직되었다.
“물론 내가 그동안 모든 것을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은 미안하다. 서운할 테지. 그렇지만 그 화풀이를 굳이 리제에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
“내가 이따금 리제를 너에게 맡기는 이유는 하나다. 네가 가장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맡기는 거야.”
“…죄송합니다.”
침묵 끝에 하르힌이 짧게 사과했다. 이안이 그를 믿기에 그녀를 맡긴다는 것 정돈 알았다. 하지만 매번 그와 관련된 소식을 늦게 알려주는 이안에게 내심 불만이 있던 하르힌이었다. 그 스스로도 말이 거칠게 나간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르힌은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나도.”
그러자 이안이 되레 부드러이 답했다.
“나도 미안하다.”
“저하께서는 왜요?”
“나도 신경이 어딘가 곤두서 있었어. 이번 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니까. 만일 실패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겠지.”
이안이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저하…?”
하르힌이 되물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에게 답 않고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를 조종하던 사람을 이 손을 죽일 수 있다니. 내 아버지를 죽인, 나를 물건처럼 이용하던 그 사람을 정녕 내가 죽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저하!”
“…이런.”
두어 번 하르힌이 이안을 더 부르자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붕대를 감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바닥을 내려보았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하지만….”
이안은 그동안 수많은 전투에 나갔다. 생사를 오갈 만큼 위험한 전투에도 참여한 전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마다 믿음직한 장군의 모습으로 병사를 대하며 오히려 더 훈련에 전념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하르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신할 수… 없다.”
반역이었다. 만일 실패하면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가문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다칠 것이다.
이안은 무엇보다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로 인해 다칠까 두려웠다.
매번 승리를 가져오는 황실의 개,
그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나뭇가지 끝으로 꿋꿋이 버티던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
“아.”
하르힌은 저도 모르게 불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야 했다.
⚜ ⚜ ⚜
하르힌이 돌아간 이후, 저녁 시간에도 식사를 거부한 이안은 가볍게 핫초코로 속을 채웠다.
따뜻하고 단 핫초코는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은 그의 몸을 풀어주는 듯했다.
“….”
문득 창문 너머로 우뚝 서 있던 나무에서 잎이 모두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챈 이안은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가장 안전할 거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마탑은 내부인이 아니라면 그 공간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으며 외부인의 침입이 불가했다.
따라서 외부인이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탑 내부의 누군가가 마탑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안과 하르힌이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리제아나가 침입자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그녀는 안전했다.
“그런데도.”
그가 중얼거렸다.
사무치게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숨을 내뱉자 희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불안하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