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일라이자가 말을 이을수록 델리사의 얼굴이 점점 종잇장이 구겨지는 듯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러다 더는 못 참겠는지 한쪽 입술을 세게 깨물던 그녀는 일라이자의 말을 한숨에 끊어버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못 오신다는 거야? 그것만 말해. 아까부터 계속 빙빙 말만 돌리고 있잖아.”
일라이자는 그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라이핀에게 요령껏 답하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답변을 들었다.
그의 어이없는 대답에 일라이자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더 자세한 답변 사항을 알려달라 했지만 라이핀은 대답 대신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바쁘시다…는 거죠?”
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델리사의 족제비 같은 눈을 피해 저 멀리 허공을 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게 그거잖아. 내가 이렇게 오랜만에 왔는데. 내가 싫어지셨대?”
“폐하께서는 정말 바쁘십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황비 전하 실종 사건에, 텐젤 건도 있고 여러 정무 일로 인해서….”
그는 머리에 떠오르는 사건들을 차례대로 나열하다 이내 말해서는 안 될 금기어를 저도 모르게 꺼내버렸다는 사실에 다급하게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델리사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리제아나 황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멍청하게 대답한 자신을 탓했다.
“황비…전하라.”
“델리사 님, 폐하께서 바쁘시다는 것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특히 근래 폐하께서 무척이나 예민하십니다. 하오니 넓은 마음으로 부디….”
“….”
일라이자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델리사를 달래고자 애썼다.
델리사도 무서웠지만, 그녀를 막는 것에 실패해 라이핀에게 받을 눈총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굳게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폐하께서 한가하실 때 제가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들어가시면 정말 폐하께서 노하실지도 모릅니다.”
일라이자는 힐끔 델리사의 눈치를 살폈다. 라이핀의 사랑을 갈구하는 델리사니 그녀 때문에 라이핀이 화내는 건 그녀도 원치 않을 것이었다.
비겁하지만 그녀를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변명이었다.
“….”
델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맞잡은 일라이자의 두 손에 땀이 가득 차기 시작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좋아.”
이내 그녀가 단념하듯 말했다.
동시에 일라이자는 안도의 한숨을 뱉을 뻔했지만, 꾹 참고 이를 넘겼다.
“폐하께 꼭 내 안부를 전해줘야 해, 일라이자? 시간이 비면-”
“네, 곧바로 델리사 님께 연락해드리겠습니다.”
델리사가 알아서 물러나 준다고 하니, 그녀를 배척하라는 중요한 임무를 받은 일라이자로서는 이만큼 고마운 말도 없었다.
재빠르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여 직접 그녀를 배웅한 일라이자는 서둘러 등을 돌려 라이핀에게로 향했다.
“왔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군.”
일라이자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라이핀이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야 저는 폐하의 유능한 보좌관이니까요.”
뻔뻔하게 답한 일라이자는 가슴을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라이핀 앞에 섰다.
“됐고.”
하지만 그의 자신감 어린 말을 라이핀은 못 들은 척 보기 좋게 무시해버렸다.
그는 일라이자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흘려 넘기며 손을 들어 말끔한 턱을 짚더니 보던 서류를 도로 내려놓았다.
책상 위를 힐끗 보던 일라이자는라이핀이 보는 서류가 텐젤 세작 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내시려는 겁니까?”
일라이자는 턱짓으로 그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흐음….”
그의 물음에 라이핀은 두 손을 들어 턱을 받치고 앉아 얇은 신음을 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떨까…. 양귀비 잎도 부족하고 필로렌치아 공작도 점점 다급해지고 있는 것 같으니. 게다가 너도 그 사절단 청년의 말을 들었잖아?”
“사절단 청년의 말이라면….”
“그래. 리제아나를 텐젤의 무도회에서 보았다고 했지. 수확제의 무도회에서 봤다는 그 여자가 정말 리제아나일지 아직도 의심스럽지만…. 왜인지 청년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다급해 보이십니다.”
그야 벌써 찾지 못한 채로 벌써 반년이 흘렀으니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은 라이핀으로서는 급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얇은 한숨을 연속해서 두어 번 내쉰 라이핀이 머리를 감싸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녀를 데리고 와야겠다. 더 보지 않으면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군.”
“폐하….”
일라이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핀은 일라이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긋난 건 바로 잡으면 그만이잖아? 그녀는 본래 황비이며 나의 아내였으니 당연히 돌아와야지.”
그가 창 너머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 ⚜ ⚜
이안은 사람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는 일에 익숙했다. 이안은 아직까지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이봐.”
그가 한 마디를 내뱉자 그를 바라보던 프로디터들은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몇몇은 흠칫 떨며 그를 경계했다.
“언제까지 고민만 할 작정이야. 나도 굳은 결심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그쪽들의 구경거리나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안이 그들을 닦달하자 그제야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결국 보다 못한 체스포레스 백작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진정합시다, 모두. 공작 전하께서는 이미 저희와 함께하실 의사를 밝히시지 않으셨습니까. 여신의 맹세도 하셨고요.”
“그, 그것보다-”
한 남자가 슬쩍 후드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라킨스 자작이었다.
라킨스 자작이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을 꺼내려다 이안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고 말끝을 흐렸다.
여신의 맹세란 그들이 모시는 여신인 라우라의 이름을 대고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맹세였다.
“왜? 말하지 그래, 자작.”
이안이 어깨를 으쓱하곤 말을 계속해보라며 그를 부축했다.
“전대 수장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전대 수장님이 데벤시아 공작 저하였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자작. 이해가 느리군. 어떻게 자작 자리에 올랐는지 애통할 뿐이야.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는 거지? 내가 감히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고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아닙니다.”
체스펠이 데벤시아 공작이라니….
그의 말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도 당황스러운데 체스펠의 친아들이라니, 데벤시아 공작가라니.
그의 아버지, 체스펠은 오직 그의 이름 ‘체스펠’만 밝힌 채로 얼굴 없이 활동했다.
반역을 꿈꾸는 단체의 수장이 감히 그, 데벤시아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해서 그의 정체를 아는 것은 체스포레스 백작 같은 극소수의 측근들뿐이었다.
그러니 홀연히 사라진 그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체스포레스 백작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아들이 제 앞에 있었다.
그는 전대 수장과 똑같은 심지가 곧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난 황제에게 복수할 거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들을 찾아온 거야.”
그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의지를 담고 기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그가 내뿜는 분위기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지를 읽은 체스포레스 백작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 역시 한 명씩 고개를 숙여왔다. 그들의 수장이자 프로디터의 일원을 대하듯이.
“곧 한 달 후, 황제가 들이닥칠 것이다.”
이안의 이야기에 프로디터의 일원들의 얼굴이 불안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이안은 계속 말을 이을 뿐이었다.
“황제는 본래 당신들을 찾아내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 달이란 시간도 겨우 벌었지.”
다시 소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이안은 테이블을 두어 번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가로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그의 뒷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계획은 있으신 겁니까?”
체스포레스 백작조차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계획이라….”
이에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지긋이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빙 둘러 바라보며 고개를 찬찬히 주억거렸다.
“내가 황제에게서 한 달이란 시간을 번 대신 걸은 조건이 하나 있지.”
그의 말에 모두가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수장과 함께 그 세력을 그에게 바치겠다. 그것이 나의 조건이었지. 그에 황제는 나의 제안에 응했다.”
“…그렇다면…?”
“프로디터가 만들어진 지 꽤 됐다고 들었다. 현 황제가 황위를 찬탈한 뒤 결성된 단체라면 어느 정도 병력이 있을 텐데…?”
이안이 체스포레스 백작을 시작으로 그 옆에 앉은 고위급 귀족들을 가리켰다.
“그야 물론입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병력을 모으긴 모았으나….”
“그럼 됐다.”
이안은 손바닥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짧게 답변한 후에 모두를 가리켰던 그 손가락을 빙 돌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 이안 렌디 데벤시아를 가리켰다.
“나. 나까지 합하면 짧은 시간일지라도 가능할 수 있지.”
“가능하다는 것이… 설마…?”
“그래, 현 황제도 반역으로 황위를 가로채지 않았나. 현재 황제는 텐젤을 망치고 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
“!”
이안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중한 음성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러니 이번엔 내 별명 값을 좀 해보지.”
⚜ ⚜ ⚜
한편 마탑을 찾는 방문객의 비밀스러운 방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방문할 셈이야?”
하르힌이 ‘방문객’의 당당한 태도를 보며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문객은 이안이 마탑을 찾을 때는 절대로 발걸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이 외출할 때마다 제집 드나들 듯 당당하게 하르힌의 방을 찾았다.
“저하를 뵙지도 않고 이렇게 마탑을 찾는 이유가 뭐야?”
방문객이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하르힌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 말에 방문객의 얼굴이 잠시 구겨졌지만 하르힌은 정말 궁금한 눈치였다.
“피하다니.”
너스레를 떨며 방문객은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었다.
“말을 똑바로 하자고, 하르힌.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지금은 저하를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게다가 난 전하께 볼일이 있는 게 아니야.”
“그럼?”
그의 물음에 방문객의 시선이 문 너머로 향했다. 하르힌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르힌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물었지만 방문객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게… 있어.”
이윽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객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