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네르아는 본능적으로 델리사가 말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혹시 아비드 제국의 리제아나라는 그 황태자비, 현재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델리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또한 아직 귀족 의회단에서 회의를 통해 사실을 공표할지 말지에 대해 의논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방인처럼 보이는 자가 갑자기 기밀 정보를 말하니 아비드 제국민으로서 불길한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후… 일단 델리사 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제 정보를 더 털어놓아야 하겠습니다.”
“?”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델리사가 눈썹을 높이 들더니 한차례 찌푸렸다.더 설명해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일단 먼저 저를 고발하거나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뭐?”
“제가 제 정체를 말씀해드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제 신변의 안전을 약속해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며 턱을 만지작거리던 델리사는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르아는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호흡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아비드 제국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네?”
자신의 정체를 듣고 놀라는 모습의 델리사를 상상했던 네르아였다. 그래서 그녀의 점잖은 반응은 오히려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아비드 제국의 황가 사정에 어둡고 황태자비의 얼굴도 모르잖아. 아비드 제국민이라면 황태자비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잖아.”
“…아.”
“이어가 봐.”
델리사는 근처에 있는 쿠션을 무릎 위에 걸쳐 놓아 팔 받침대를 만들었다. 델리사는 고압적으로 다리를 꼬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는 텐젤 제국 사람입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네르아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매번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델리사가 당황하는 모습에 네르아는 짧게 쾌감을 느꼈지만, 이제부터 말을 잘해야 했다.
“설마 첩자?”
“그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었기에 네르아는 더한 오해를 사기 전에 빠르게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저는 그저 아비드 제국에서 제 향수를 찾는 이가 더 많기 때문에 아비드 제국을 오갔어요. 단순히 이익만을 좇아서 온 겁니다. 정말이에요. 델리사 님을 만난 것도 전부 다 우연입니다.”
“정말이지?”
“물론입니다. 정말이에요.”
네르아의 대답에 점점 델리사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아무 목적도 없이 온 거예요. 그저 쫓겨났을 뿐이라고요.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 여자?”
“통칭 ‘손님’이라 불리는 여자였는데, 탑에… 아니 공작저에 갑자기 새롭게 들어온 여자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죠.”
버릇처럼 입에 마탑을 담을 뻔했다. 네르아는 얼른 말을 바꾸고 공작저를 대신 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델리사가 네르아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정확히 이야기해봐.”
“제가 이전에 말한 공작님과 홀연히 나타난 그 여자입니다. 공작님께서 폐하로부터 어떤 명령 때문에 잠시 제국을 떠났다가 나타난 후에 함께 온 여자…죠.”
“공작님이 어디 다녀왔는지는 모르고?”
“…네.”
“하지만 너는 그 여자가 이 아비드 제국에서 온 것 같다는 이야기지?”
“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에 두 사람은 눈에 불을 켰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같은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델리사가 정적을 깼다.
두 여인의 불타오르는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란 여자가.”
델리사가 네르아의 말을 받았다.
“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여자’였던 거군.”
델리사의 말에 네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탕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 여자가 아비드 제국의 귀족, 심지어 황태자비였다니.
네르아는 큭 웃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복수… 해보시겠습니까?”
그녀가 텐젤 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초조해진 델리사가 거칠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고개를 들었다.
“복수? 텐젤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난 이미 원하는 것을 가졌는걸. 폐하는… 그는 나의 것이니까.”
리제아나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불안해진 그녀는 중얼중얼 혼잣말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로 델리사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
그때 동시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크로덴느 백작가의 전속 하녀이자 델리사를 옛날부터 보필해온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아그레스틴 자작님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됐어, 앞에 두고 가.”
“아뇨, 바로 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델리사는 귀찮은지 대충 대답했지만 샐리는 완고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사는 드레스를 끌며 슬쩍 문을 열어 문틈 사이로 편지를 받았다.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궁금증에 네르아가 먼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쯧.”
“친분이 있으신 건가요?”
“친분? 글쎄 자작님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전혀.”
편지지 봉투를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찢으며 델리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편지를 꺼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젠장.”
뒤이어 그녀가 거칠게 몇 가지 욕을 내뱉었다.
화려하고 고귀한 사랑스러운 겉모습과 다르게 확실히 델리사는 그녀만의 숨겨진 면모가 있는 듯했다.
겉모습과 달리 이따금 보이는 고약한 성질의 태도들을 보아하니 지금까지 그런 모습들을 잘 감춰온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네르아 앞에서만큼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네?”
“아그레스틴 자작님께서 내게 친히 선물을 보내셨다고 써놨군. 아비드 쪽에서는 상대가 선물을 보내면 직접 받으러 가는 것이 예의거든. 필로티 시장의 꽃집에서 보자고? 하… 정말 귀찮게 구네.”
델리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고는 도로 소파를 향해 자신의 몸을 가볍게 던졌다.
“굳이 가셔야 합니까? 하녀 몇 명을 시켜 갔다 오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거부할 수야 없지. 내가 이 자작한테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니까.”
“빚… 말입니까?”
“나에게 황실이란 거대한 무대를 선사해준 사람이거든.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대가로 나중에 자신의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했지. 나와 잘되고 싶나 보군.”
“그리고 이게 지금?”
네르아가 어느 정도 사정이 이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채비해. 나만 갈 수 없잖아? 황실에서 데리고 온 시녀라고 대충 잡아떼면 모두 수긍할 거야.”
“준비 도와드릴까요?”
“…네가 샐리 대신? 됐어.”
피식 웃으며 델리사는 샐리를 부르기 위해 설렁줄을 당겼다.
⚜ ⚜ ⚜
필로티 시장의 꽃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두 여인과 샐리는 다른 말 없이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마차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할 뿐이었다.
네르아와 델리사, 두 사람은 조금 전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도착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음성에 이윽고 두 사람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네르아는 델리사의 하녀 행세를 하기 위해 먼저 내려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델리사를 도왔다.
샐리는 델리사를 안내하며 마차가 선 곳 바로 앞에 위치한 꽃집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크로덴느 백작 영애를 위한 선물을 받으러 왔습니다.”
샐리가 앞서 나가 아그레스틴 자작의 편지를 보여주며 꽃집 주인에게 설명했다. 꽃집 주인은 편지를 읽어내려가며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창고로 사라졌다.
네르아는 꽃집을 둘러보았다. 델리사 역시 다양한 꽃병에 꽂혀 있는 꽃들을 보며 감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
델리사의 잇새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델리사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왜 그러세요?”
답지 않은 그녀의 반응에 이상함을 감지한 네르아가 고개를 들어 델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델리사의 시선은 한곳에 꽂혀 떨어질 줄 몰랐다.
네르아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이…?”
꽃집 밖에는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두 남성이 서 있었다. 꽃집의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꽃을 감상하고 선 남자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귀티가 흘렀다.
“왜 여기에 계신 거지? 날 보러?”
“영애?”
흥분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델리사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기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이윽고 그녀가 확신에 찬 얼굴로 기쁘게 웃어 보였다.
“네르아, 저분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분명 나를 보러 오신 거야. 자작의 이름을 써서 일부로 내가 이곳에 오게 만든 거라고! 화가 드디어 풀리신 모양이야.”
“아….”
그리고 그 확신은 점점 광기로 물들어갔다.
네르아는 의아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섣불리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가게 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조차 그는 델리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나가봐야겠어. 아는 척을 하신다면 나를 봐주시겠지!”
“델리사 님!”
델리사는 몸의 방향을 틀어 가게의 문을 향해 달려나갔지만 네르아는 그런 그녀를 말리고 싶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고위 귀족인듯한 그 남성이 메마른 갈색 눈동자로 공허하게 꽃다발을 응시하다 무심히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네르아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의 관심이 단 한 번도 제대로 델리사에게 향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