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라이핀은 홀로 집무실에 앉아 제 앞에 놓인 서류들을 노려보았다.
리제아나를 보았다던 그 청년이 하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체할 수 없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건가.”
라이핀은 아무도 없는 공허한 방 안에서 허탈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펜을 더욱더 세게 힘을 주어 잡았다.
“폐하, 일라이자입니다.”
그를 찾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핀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들어와라.”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것이 좋을 듯해 차를 준비했습니다.”
일라이자의 말대로 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라이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그가 건네는 차를 받아들였다. 일에 집중도 되지 않았으니 그의 제안대로 하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갓 끓인 차인지 찻잔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일라이자.”
“폐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동시에 입을 열어 서로를 불렀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일라이자는 황급히 책상 위로 올려진 라이핀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제 말을 삼켰다.
주군이 먼저 입을 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 청년의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돈단 말이야.”
“그 청년이라면?”
“사절단의 그 청년 말이야. 만약 정말 리제아나가 아비드가 아닌, 텐젤 황실 무도회에 있었다면 그녀가 우리 아비드를 배신했다는 말인데…. 어째서 리제아나가 텐젤에 있는 거지? 리제아나가 우리를 배신할 리가 없잖아?”
라이핀이 아는 리제아나는 제 눈에 들기 위해 그 어떠한 것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된, 조종하기 쉬운 여자였다.
그녀의 독기와 그 끈기는 오롯이 라이핀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반려라는 허물뿐인 자리에 앉혀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녀의 존재는 황권을 지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핀은 마지막으로 사라지기 전의 리제아나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라지기 직전의 리제아나는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애정을 갈구하던 눈으로 자신을 보던 그녀였는데.
“게다가 텐젤 제국은 아비드와 적대 관계이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일라이자는 차를 다 따른 주전자를 내려놓고서는 턱을 문지르며 그의 주군의 말에 맞장구쳤다.
일라이자가 아는 리제아나도 라이핀이 알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황실과 필로렌치아 공작의 꼭두각시. 향기 없는 꽃.
모두, 그녀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확인해봐야겠어. 정말 그녀가 배신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인지. 만약 납치라면… 그녀를 반드시 데려와야 해.”
이내 라이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
이에 일라이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그를 제지했다.
“수확제는 끝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텐젤 제국에서 백발을 가진 자라면… 소문의 공작일 수도 있습니다.”
“소문의 공작?”
라이핀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되물었다.
“모르십니까? 텐젤에 백발의 젊은 공작이 있는데, 적안의 소유자라고 합니다. 황실에 충성하여 무슨 일이든 한다 하여 황제의 미친개라고도 소문났답니다.”
“그의 이름이 뭐지?”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입니다.”
“이안… 아, 그래….”
이안 렌디 데벤시아.
라이핀도 분명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특히 데벤시아 가문은 텐젤의 세력가 가문으로도 이름나 있었다.
데벤시아 가문이 단단히 베일에 싸인 가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주인이 또 바뀐 모양이었다.
“이전에 리제아나와 그 데벤시아 공작 사이에 연결점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라이핀의 물음에 일라이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는 확언할 수 있었다.
일라이자는 라이핀의 사람으로서 리제아나의 곁에 사람을 심어 그녀의 행적에 대해 은밀히 보고를 받아왔다.
입궁하기 전에 그녀는 공작이 허락한 사람 외에 다른 이들과 대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또한, 황궁에 입궁한 뒤론 그녀의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게다가 공식 석상에도 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적국의 공작과 다른 연결점이 있을 리 없었다.
“뒷골목으로 가야겠다. 지금 당장.”
하지만 그의 확신 어린 대답에도 라이핀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미지근해진 차를 한숨에 들이마시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뒷, 뒷골목으로요? 지금 이 대낮에요? 위험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보겠나.”
불안해하며 그를 말리는 일라이자에도 불구하고 라이핀은 그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뒷골목 길드에는 라이핀이 이미 돈으로 매수한 자들이 많았다. 돈만 준다면 국경을 넘는 일도 손쉽게 할 자들이 널렸다.
분명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핀은 그런 법도에 매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장차 더 큰 사건으로 퍼질 거야. 그러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 빠르게 해결해야지.”
“…존명. 명을 받들겠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밤에 뒷골목을 찾던 라이핀이었으니, 일라이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주군의 명이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나직이 숨을 내쉰 그는 집무실 책장 깊은 곳에 숨겨둔 로브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라이핀에게, 또 하나는 스스로 뒤집어썼다.
“빨리 갔다 오셔야 합니다. 오후에 의회가 있으니까요.”
“잔소리는.”
라이핀은 건네받은 로브를 걸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불안해 보이기만 했다.
⚜ ⚜ ⚜
어릴 적부터 황궁에서 나고 자린 라이핀과 그의 옆을 보좌해온 일라이자는 황궁의 구석구석을 전부 알고 있었다.
집무실 창문을 가뿐히 뛰어넘은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정원의 개구멍을 통해 가뿐히 황궁을 나갔다. 두 사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필로티 시장으로 몸을 돌렸다.
“바깥은 오랜만이구나.”
“바깥 공기도 쐬셔야 마음이 평온해지십니다. 자주 산책하러 나오시죠.”
“글쎄….”
가볍게 일라이자의 충고를 무시한 라이핀은 걸음을 빨리하여 그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주 찾던 뒷골목에 도착했다.
다행히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쓴 덕에 그들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평일 대낮의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늘이 짙게 진 골목 안에서만큼은 방심할 수 없었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어둠을 벗 삼은 골목의 사람들이 먹잇감을 찾는 매서운 눈으로 거리를 훑으며 지났다. 일라이자는 이곳의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뒷골목의 길드를 이용하는 것은 일을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가지.”
라이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자 그의 뒤에서 일라이자가 검집에 손을 대며 따라 걸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라이핀이 살기를 내뿜는 덕에 어둠 속 무리가 그들을 덮치거나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골목의 가장 끝쪽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쾅쾅쾅
일라이자가 오래된 낡은 나무문을 두드리자 거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암호는?”
그 물음에 앞으로 한걸음 걸어오며 라이핀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팬텀 한 잔으로 하지.”
“….”
잠깐의 침묵 뒤로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그들을 맞았다. 라이핀과 일라이자는 그들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사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항상 밖에서 기다렸던 일라이자였지만 다른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그의 동행 역시 허락된 모양이었다.
3층 높이 정도 되는 계단을 올라가자 또 하나의 방문이 있었다. 그 방문을 열자 끼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미스터. 고객님이 왔습니다.”
문 너머로 등장한 미스터의 등장에 비로소 암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미스터라고 불리는 남자의 얼굴에는 새하얀 팬텀 가면이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로 우락부락한 남자 두어 명이 버티고 있어 방 안의 공기에 중압감이 더해졌다.
그들을 안내한 사내가 모습을 감췄다. 라이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팬텀 가면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텐젤 제국의 이안 렌디 데벤시아란 자에 대한 정보를 원해. 더불어 이 여자도 그의 곁에 있는지 알아봐.”
설명도, 소개도 필요 없었다. 라이핀은 작은 종이에 담겨있는 리제아나의 초상화를 내밀었다. 그러자 팬텀 가면은 침음을 뇌까렸다.
“그는 데벤시아 공작 아닌가. 값이 비싸. 국경을 넘는 것도 꽤나 골치 아픈 일이라고?”
“10억 골드 지불하지.”
망설임 없는 라이핀의 통 큰 제안에 팬텀 가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려 히죽였다.
“심부름 값 천 골드 추가하지.”
“대신 빨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객님.”
라이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의뢰에 일라이자가 눈을 의아하게 굴리자 라이핀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빨리 끝난다니까.”
⚜ ⚜ ⚜
어두운 골목을 벗어난 두 사람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장을 지나쳤다.
“…이건.”
문득 라이핀의 발걸음이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추어 섰다.
“왜 그러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라이핀의 시선은 한참 동안 가게에 머물렀다.
다양하고 예쁜 꽃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제국의 흔한 꽃집이었지만 라이핀은 도통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라이핀이 리제아나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 그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꽃다발을 잔뜩 샀었던 집이었으니까.
‘정말 너무 이뻐요. 전하. 어쩜 이렇게 꽃이 아름다울까요?’
샹들리에 아래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로 자색 눈동자를 곱게 접던 그 시절의 리제아나가 떠올랐다.
리제아나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 앞에서 라이핀은 리제아나를 그리워했다. 쓰고 달콤한 기억이었지만 그조차도 소중했다.
꽃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