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스스로도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네르아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아마 이 마탑에 들어오거나 황제의 사람이 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결국, 그녀는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저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르아는 큰 숨을 머금고 이안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다행히 이안은 집무실 안에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 모습조차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네르아였다.
네르아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 님. 다름이 아니라….”
이안은 마탑주가 아닌 공작으로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서류를 책상에 쌓아두고 한 장씩 훑는 중이었다.
네르아가 말을 늘이며 머뭇거리자 서류에서 눈을 뗐다.
“말해. 뭐지?”
“수… 수확제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싶은 것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수확제? 네르아, 네가 수확제에 대해 물을 게 뭐지?”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기다란 손가락을 다시 들어 올리며 이안이 무심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안경알 너머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이안 님.”
“하… 네르아.”
네르아의 쭈뼛거리는 대답에 이안은 이어서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네르아의 심장도 덩달아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이안이 이리도 제게 실망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네 행동을 수상쩍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네르아. 내 일에 간섭이라도 할 셈인가?”
“그게 무슨 소리…. 전 그저 이안 님의 파트너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내 파트너? 내 수확제의 파트너와 네가 무슨 상관이지? 내 파트너는 델리사다.”
이안의 단호한 말에 네르아의 눈동자가 일순 정지되었다. 식은땀이 송골 맺혔다. 그의 적나라한 시선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그녀를 꿰뚫는 듯했다.
“요즘 자주 사라진다고 들었다. 네 일이니 이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만 그 결과가 나쁜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지그래?”
그들 위로 적막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르아는 더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손을 세게 쥐는 것밖에 없었다.
이안과 그녀 사이에 거대한 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이게 다….’
네르아의 분노는 이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안의 변화는 모두 그 사람으로부터 비롯됐다. 마탑에 눌러앉은 그 여자.
네르아는 스스로 깊이 다짐했다. 절대로 이 수모를 고이 넘어가지 않겠다고. 이 비참함을 그 여자에게 돌려주겠다고.
⚜ ⚜ ⚜
이안은 네르아가 떠난 방문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네르아의 행동거지가 확연히 바뀌었다.
그녀의 마음을 당연히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표현들을 보고서 모를 수 없었다. 다만 외면해두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생각은 멋대로 네르아에게서 리제아나로 옮겨갔다.
‘리제아나가 텐젤의 귀족 사회에 잘 낄 수 있을까….’
황제가 그녀를 아니꼽게 볼 확률은 있다만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단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를 힘들게 할까 봐 내심 걱정이 차올랐다.
이안은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필요하다면 이용할 뿐이었지만 친분을 나누는 가문은 몇 되지 않았다.
귀족들은, 특히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일수록 꽈리를 튼 먹잇감을 찾는 독사와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이안의 입매에 미미한 웃음이 일순 떠올랐다.
처음 리제아나를 보았을 때 깡마른 몸매에 휘청거리는 폼이 그에게 일찍이 불신을 안겨주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가차 없이 그의 사업 비밀을 알려줄뿐더러 겁도 없이 마수 앞으로 나서곤 했다.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주를 한순간에 무력화한 여자. 알면 알수록 이상한 여자.
나약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강인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굳이 드러내야 하나….”
그럴수록 그녀를 숨기고픈 이안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놓친 아비드의 황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깊게 뿌리내리기만 하는 리제아나에 대한 생각은 쉬이 그의 머릿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리제아나.”
어느새 하늘이 짙게 어두워졌다. 벌써 저녁이 된 모양이었다. 문득 그녀의 이름을 내뱉자 거짓말처럼 우연히 이안은 산책을 하고 있던 리제아나를 마주쳤다.
리제아나가 그를 마주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안?”
리제아나도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스러우나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검은색 웨이스트 코트에 단아한 상아색 셔츠, 코트와 알맞은 검은 조끼를 걸친 단순한 복식 차림이었지만 그럼에도 미모는 꿀리지 않았다.
이안이 그녀를 공작저에 데려다줄 때만 해도 분명 일이 많아 아마 수확제 당일 날이 되어서야 공작저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런 그가 더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마탑의 일이 일찍 끝나셨나 보죠?”
“응.”
담백한 인사와 함께 리제아나가 고개를 까딱이며 드레스 자락을 이끌며 그에게로 걸음 했고 이안 역시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산책 중인 거야?”
“보다시피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이 아름다워서 나와봤는데, 도로 들어갈까요?”
“아니야. 어차피 이곳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리 텐젤에 망명했다고는 하나 아비드의 황실과 연관된 자는 그 의심을 쉬이 벗어나기 힘든 법이었다.
애초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망명을 인정받은 것이니 멋대로 허락 없이 정원을 나온 것은 심히 이안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것이었다.
이에 방향을 틀려 했으나, 되려 이안이 붙잡았다.
“리제아나, 잠깐만.”
“?”
“돌아갈 필요 없어. 폐하 앞에서만 그렇게 감시하겠다고 말한 것이지 진짜로 감시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그런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제의 개가 아니었던가….’
황제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미심장한 그의 말은 리제아나의 마음속에 어떠한 새로운 궁금증을 불어넣었다. 그를 보며 그녀가 낮게 눈을 빛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대신 그녀는 이안이 저도 모르게 쥔 제 손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것부터 놔주시면 편히 구경하도록 하죠.”
“미안. 나도 모르게.”
그제야 그는 그녀의 손목을 쥔 자신을 눈치챘다. 리제아나가 자신에게서 몸을 돌리니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아챈 그였다.
“괜찮습니다.”
이에 이안은 황급히 손을 떼며 사과했고 리제아나도 고개를 사뿐히 주억거리며 그의 사과를 받았다. 그리곤 한 발자국 앞서 걸었다.
정원의 화단에는 다양한 꽃들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색깔들의 꽃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 정갈하게 핀 모습은 보기 좋았다.
“리제아나.”
한참을 그리 구경하고 있는데, 이안이 문득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
그리곤 주머니에서 자수정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 목걸이를 꺼내 달빛 아래로 들어 보였다. 리제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선물이자 보험.”
“보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리제아나가 거절할까 봐,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것이었다.
이 목걸이는 단순한 자수정 목걸이가 아니었다. 특별히 그의 마력을 깃들어 만든 보호 목걸이로 그녀를 공격할 때 내재된 마력이 그녀를 지켜주는 구조였으니까.
“내가 없는 곳에서 이게 그대를 지켜줄 거야.”
“무도회에서, 말인가요?”
목걸이에 시선을 둔 리제아나의 목소리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보랏빛 보석은 마치 그녀의 눈동자 색과 쏙 빼닮은 듯 보였다. 빛을 반사하는 보석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리제아나는 그가 이런 선물을 주는 의도를 금세 알아차리곤 표정을 굳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안이 저를 다 보호해주긴 힘든 모양이군요.”
이내 그녀의 정확한 지적에 할 말을 잃은 이안의 헛웃음이 정적을 깼다.
“무도회는 사냥터니까. 우리 서로 그 사실 정도는 잘 알잖아?”
“사냥터라…. 맞는 말이죠. 그럼 굳이 선물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의 이익을, 사냥감을 위해 여러 귀족이 바쁘게 움직이는 장소니 사냥터도 맞는 말이기에 리제아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
순순히 목걸이를 넘겨주리라 생각한 리제아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녀의 손을 응시하다 다시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뒤돌아. 채워줄 테니까.”
“….”
“이런 것쯤은 허락해줄 수 있잖아?”
아까와는 조금 다른 잔망스러운 말투에 리제아나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뒤로 돌아 긴 검은 머리를 들어 올렸고 가늘고 하얀 그녀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럼 부탁드려요.”
다행히 떨어진 허락에 긴장을 푼 이안은 스스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채웠다.
마치 갈라졌던 흙에 가랑비가 촘촘히 스며들 듯이, 리제아나라는 존재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조금씩 이안의 속을 채워가고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