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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17)

31화

새벽 무렵,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이안이 드디어 나타났다.

알현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뒤로 거칠게 숨을 내몰아 쉬며 이안이 땀을 닦으며 겨우 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이안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관찰하는 음험한 황제의 눈빛을 고요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황궁 앞으로 하르힌이 대기 시킨 마차가 있을 터였다.

이는 이안이 쓰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리 손 써둔 일이었다.

물론 황제와 은신 마법으로 숨어있는 네르아는 알 리가 없었지만.

“저주가 나아진 건가? 답지 않게 이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다니.”

텐젤의 황제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눈을 좁히며 의심 가득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안은 제 심장 부근의 옷깃을 잡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겉보기에도 그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는 이안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평소에 그 어떠한 일에도 여유로움을 갖추던 이안이 유일하게 그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때였다.

“…폐하.”

두 남자의 시선이 꽤나 오래 얽혀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안이었다.

“버티는 것이… 한계입니다.”

저주의 고통이 심한 나머지 버틸 수 없다는 명백한 항복의 의사였다.

그는 식은땀으로 잔뜩 몸이 젖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아아, 그래. 공작, 어서 약을 받아가게.”

황제는 그제야 고양감이 깃든 짙은 미소를 지으며 엄숙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네르아가 넘겨준 해독제를 들어 보였다. 결국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안의 모습이 그는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달빛의 잔재를 받자 유독 빛나 보였다.

이안은 마치 홀린 듯이 그 액체로 시선을 고정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갔다.

“오늘도 황궁에서 쉬고 갈 예정인가?”

이안이 마침내 그에게서 약병을 받아내곤 뚜껑을 열자 문득 황제가 물었다.

해독제에는 수면제도 포함되어 있어 저주의 고통을 낮추는 데에 쓰이곤 했다. 그러니 매번 이안은 해독제를 들이켤 때마다 곧장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해서 그는 언제나 발작이 일어날 때면 황제가 준비해준 방에서 해독제를 마시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하르힌이… 절 데려갈 겁니다.”

“하르힌? 그자도 이곳에 온 건가?”

“마탑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았습니다. 그가 저를 부축해 데리고 갈 겁니다.”

이안의 새빨간 눈이 진한 이채를 띠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르힌은 제 주군의 저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 황궁에 오는 일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앞으로도, 말이죠.”

어딘가 달라진 듯한 이안의 어조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도, 라고 말하는 이안의 음성에는 단호함이 명백히 깃들어있었다.

“그럼 이 해독제. 이번에도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높이 올린 이안은 단숨에 유리병에 들어있는 해독제를 들이마시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하르힌을 불렀다.

황제가 막을 틈은 없었다.

“저하!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이안의 부름에 한걸음에 대기하고 있던 하르힌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정말 휘청이는 그를 부축했고 이안은 그에게 기대며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 황궁을 찾지 않는다면 황제가 의심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이안은 황궁에 와서, 황제가 알고 있는 이안을 연기해야만 했다.

‘절대로 당신의 뜻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으니까.’

이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려 끝까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기절해버렸다.

이것으로 황제의 의심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테니, 이안은 초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다. 그리한다면 후에 드디어 고대하던 복수가 이루어졌을 때 처절하게 무너진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 ⚜ ⚜

이안이 알현실을 나갔음에도 그가 떠난 자리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황제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등을 기대었다.

“폐하?”

숨어있던 네르아 역시 하르힌과 이안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다시 은신 마법을 해제한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 봐야 할 듯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절 의심할 겁니다.”

“그래 벌써 새벽이군.”

네르아의 말에 정신이 든 황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조금 더 밝아진 새벽녘을 바라보다 미간을 짙게 모았다.

“네르아.”

“네, 폐하.”

그의 부름에 네르아는 습관처럼 몸의 자세를 정갈히 가다듬으며 똑바로 섰다.

“아무래도 이안이 요새 이상하다.”

“네?”

“해독제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알면서도 굳이 하르힌을 불러 마탑으로 돌아간 것이나, 여유롭게 미소나 짓고 앉아있는 모습이 말이다.”

“그 말씀은….”

네르아가 침음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단번에 황제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래, 이안을 감시하도록.”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황제의 명령에 엄숙히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들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세세한 것까지, 그의 모든 변화를 감시해라.”

“네.”

다시 한번 알현실을 울리는 네르아의 대답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황제는 딱딱해진 입꼬리를 부드럽게 풀었다.

과연 그는 결코 의심을 함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 타고난 맹수와 같은 감각이었다. 그것이 현재 그가 이 자리에까지 앉을 수 있게 했으니.

⚜ ⚜ ⚜

한편 하르힌은 그에게 몸을 기대는 이안을 부축하느라 많은 힘을 할애해야 했다.

분명 해독제 따위에 절대 지지 않을 거라 이안은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그는 강한 수면제의 힘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하르힌이 그를 감당해야 했다.

그를 업은 하르힌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초과 근무 수당…. 초과 근무 수당…. 내가 꼭 받아내고 만다…. 기필코….”

이안은 다시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디론가 던져 버려도 눈을 뜨지 않을 만큼 잠에 빠진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린 채로 곤히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저하…. 저 힘든데요….”

마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4층이라는 높이를 내려가야 했다.

심지어 가파른 길이었기에 하르힌은 그 높은 계단이 그리도 미워 보였다.

문득 짐이 되는 이안을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릴까 하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뒷감당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조용히 생각을 접어버렸다.

“관두자 관둬. 어떻게 해도 죽어 나가는 건 나지.”

이안이 훗날 깨어났을 때 감당할 후폭풍이 두려워서라도 하르힌은 이를 악물고 땀을 흘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마부는 애초에 없었다.

헐떡이는 숨을 다잡고 이안을 겨우 마차에 밀어 넣은 하르힌은 마차 앞자리로 가 마차에 마력을 깃들여 움직이게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다시는 밤에 황궁에 오나 봐라.”

더불어 하르힌은 다시는 밤중에 이안과 단둘이 황궁에 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 ⚜

리제아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안의 요청에 의해 데벤시아 공작저에 오게 된 그녀였다.

이안은 어느 정도 괜찮아진 건지 이후 며칠이 지나자 다시금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데벤시아 공작저에 가자며 그녀를 졸라댔다.

못이긴 척 그와 함께 공작저에 온 그녀는 그처럼 크고 아름다운 저택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굳이 여기 공작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드레스.”

“네?”

“내 파트너니까 무도회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

능글맞은, 차마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녀를 이끌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언제나처럼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드니 그녀를 반기는 것은 일렬로 가득 줄 선 드레스들과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선 하녀들이었다.

“그래서 절 데려온 이유가 이거였군요.”

“아비드의 델리사는 아름답다고 들었거든.”

장난스러운 억양으로 말하는 그의 말을 리제아나는 빠르게 알아들었다.

만일 그녀가 무도회에 간다면 그녀는 델리사로서 참가해야 했다.

텐젤의 황제는 그녀를 아비드 제국으로부터 망명한 델리사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델리사도 분명 아름답지만 저 또한 어디 가서 죽지 않는 외모거든요.”

리제아나의 뻔뻔스러운 말에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렴 당신은 그 자신감이 아름답거든.”

리제아나는 하녀들의 손길에 따라 차례로 여러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흰 드레스, 검정 드레스, 등이 아찔하게 파인 드레스, 여러 드레스들이 그녀를 거쳤으나 그녀의 마음에 차는 것들은 없었다.

문득 리제아나의 눈에 드레스룸 한편에 걸린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은 보라색 드레스였다.

리제아나는 밝은 보라색 드레스를 들고서 주저 없이 드레스를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이안은 탈의실에 들어간 리제아나를 여유 있게 기다렸다.

그녀를 아름답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이안은 그녀의 그 우아하고도 당당한 몸짓만으로도 그녀가 충분히 빛날 것을 알았다.

따라서 어떤 드레스라도 그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맘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로 마음먹던 그는 문득 탈의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그녀를 보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보랏빛 드레스는 그녀의 보랏빛 눈을 더 강조했고 그의 허리선을 잘 잡은 드레스 선과 더불어, 적당히 파인 목선은 더욱 그녀의 힘 있고 당당한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하는 듯했다.

“어때요. 전 이 드레스로 정하고 싶은데.”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파트너가 되어 정말 영광이야.”

리제아나는 어느새 그녀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이안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결국 리제아나는 못 이긴 척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녀의 손등 위로 입맞춤했다.

리제아나는 일순 손을 떨었다.

라이핀에게 데인 상처가 깊어 사람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 앞에 서 있는 남자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에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응? 왜 그래, 리제?”

그녀가 멈칫하자 이안이 재빠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레 묻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거야? 안색이 조금 나빠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다정함은 죄라고. 라이핀을 보며 리제아나는 생각했다.

다시는 누군가를 믿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없이 제 예상을 벗어나며 멀어질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이 남자가.

리제아나는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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