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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17)

26화

수확제.

여신에게 올해의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대대적인 국가 행사였다.

수확제가 국가적 기념일이 되고부터 큰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제국민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수확제의 날을 즐겼다.

시장에는 거대한 야시장이 열리는가 하면 황궁에서는 초대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무도회가 열렸다.

가을에 열리는 무도회는 가장 크게 열리는 행사로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날이었다.

고위층 귀족들의 자제가 연인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연인을 찾기 위해 이 무도회를 찾곤 했다. 그렇기에 이 연회에서 파트너의 의미가 컸다.

이때 만일 데리고 오는 파트너가 있다면 굳이 말로 자랑할 필요도 없었다.

혼인만 안 했지,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다들 믿었으니까.

수확제의 파트너란 그런 거였다.

“혹, 이번에도 불참할 생각인가.”

이안이 좀처럼 답이 없자 황제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특히 ‘이번에도’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재차 그에게 물었다.

“반드시 참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형식상으로 그를 연회에 초대할 뿐이었던 황제였건만 왜인지 이번 연회는 그가 반드시 참가하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황제가 이안을 무도회에 초청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데벤시아 공작인 자신을 앞세워 아직 자신의 힘이 견고하다는 것을 다른 귀족들에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아마 광각초가 수도 시내에까지 퍼졌다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돌기 때문일 터였다.

이 일로 황제의 권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없게끔 이안을 이용하려는 황제의 의도가 이안의 눈에 뻔히 보였다.

“이유라…. 자네, 연회에 얼굴도 항상 제대로 안 비추지 않나? 수확제 연회에서라도 사람들을 만나라는 말일세.”

교묘하게 대답을 피하는 황제였으나 이안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께서 원하신다면.”

연회에 참가하는 일은 어렵진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귀찮았을 뿐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파트너는? 혹, 마음에 둔 사람이 있나?”

황제의 말에 이안이 표나지 않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반응을 귀신같이 알아본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농일세. 그저 자네 같은…. 그래 안하무인이 과연 어떤 영애와 파트너를 할까 궁금해서 말일세.”

“말씀처럼 안하무인이라 마음에 둔 이도, 정해놓은 이도 없습니다.”

이에 황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보를 크게 터트렸고 뒤에 조용히 뒤따르던 황제의 보좌관 일레네까지 움찔거릴 정도였다.

“아깝군. 데벤시아 공작. 공작이 파트너를 구한다는 말 한마디면 온 제국에서 몰려올 사람이 다수일 텐데.”

사교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이안임을 알기에 황제 또한 별 기대 없이 건넨 농이었다.

장난기가 어린 황제의 얼굴이 짓궂게 바뀌었다.

그의 외모와 달리 거친 성정 덕에 여인들이 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황제는 이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좋아, 참석하는 것으로 알겠네. 다만, 오랜만에 연회에 나서는 것이니만큼 파트너도 데려오게.”

황제가 능글맞게 웃으며 이안에게 명인 양 짐짓 엄하게 이야기했다.

다분히 그를 골려주기 위해 내리는 명임이 틀림없었다.

이안은 더더욱 미간을 구겼으나 이미 참석한다고 전한 이상 무를 수도 없었다.

“기대하지.”

“존명…. 받들겠습니다.”

이안은 황실의 명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제 사정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 사실을 가끔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좋아. 그럼 가볼까.”

여유롭게 왕좌에 앉아있던 황제가 일어나자 일사불란하게 주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현실을 나설 준비를 하는 황제에 이안은 굽히고 있던 무릎을 피며 일어섰다. 비록 황제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안은 이미 황제가 가고자 하는 곳을 알았다.

알현실을 나선 황제는 조용히 자신의 뒤를 따르는 시종들을 물리치고 복도를 나섰다.

이안은 말없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황제는 발걸음은 점점 궁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수확제라….’

이안의 머릿속에 파트너라는 단어와 함께 리제아나가 떠오르는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그저 그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그것이 아니면 자꾸만 수확제와 리제아나를 연관 짓는 제 마음을 대변할 단어가 없었다.

근래 많은 시간 함께 있었으니,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데벤시아 공작?”

더 깊게 생각에 빠지기 전에 황제의 물음이 이안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황제가 멈춰선 곳은 황궁 안의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 통로였다.

황제는 지하 감옥으로 한 발을 먼저 들여다 놓았다.

“어디 이제, 아비드 제국이 무엇을 숨기는지 알아내 볼까.”

황제가 잔혹한 얼굴을 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 모습은 분명히 잔악한 지배자의 얼굴이었다.

조금 전 이안에게 보여주던 능글맞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빠르게 상념을 정리한 이안은 앞서 걸어갔다.

⚜ ⚜ ⚜

“오셨습니까?”

아침 댓바람부터 황궁에 불려간 이안이 돌아온 것은 저녁 즈음에서였다.

그는 얼굴을 한층 더 사납게 구긴 채로 마법진 위로 나타났다.

하르힌은 마법진 발동 소리를 듣고 그를 맞으러 내려왔다. 그의 셔츠에 튀긴 피는 조금 전의 일을 짐작게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하 감옥의 썩은 내와 더불어 피비린내에 하르힌이 조용히 그의 겉옷을 받아들였다.

“황궁에 다녀오신 겁니까?”

“그래.”

이안의 대답은 담백했다. 황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르힌 역시 딱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리제아나, 아니 손님은?”

“….”

하르힌은 ‘손님’이라 불리는 여자를 떠올리곤 눈을 굴렸다.

그의 명령대로 아직 리제아나는 마탑에 머물렀으며 하르힌이 그 수발을 들고 있었다.

이안의 명이니 하르힌으로서는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가져다줄 때 매번 방에 있었으니까…. 아직 방에 계실 겁니다.”

“그래, 알겠어.”

“자, 자, 잠시만요. 혹시 그 차림새로 바로 가실 건 아니죠?”

융통성 없으며 제멋대로인 이안을 알기에 하르힌은 혹시나 하고 생각하며 재빠르게 그를 말렸다.

하지만 이안은 다분히 ‘내가 너냐’와 같은 눈빛을 쏘며 지나칠 뿐이었다.

오히려 더러운 취급을 받는 하르힌이었다.

이안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으니.

“저, 전 걱정돼서 말씀드린 것뿐이라고요!”

하르힌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으나 이안은 개의치 않고 복도를 걸을 뿐이었다.

⚜ ⚜ ⚜

똑똑똑-

노을이 어느 때보다 붉게 타올랐다. 지기 전 모든 빛을 뿜어낼 심산인지 노을이 붉게 하늘에 자리 잡았다.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던 리제아나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르힌인가?’

그녀의 방을 찾는 이는 한정적이었다. 리제아나는 하르힌이라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들어오세요.”

리제아나의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공작?”

이안이었다.

“이안이면 충분하다니까.”

그가 능청스럽게 소년처럼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요?”

리제아나가 주위가 어수선해지기 전 다급하게 본론을 꺼냈다. 매번 이안과 함께 있으면 그에게 휘말리는 것 같았다.

“…상처는 어때.”

그는 평소와 조금은 다르게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생채기였을 뿐인걸요.”

가벼운 상처였을 뿐이니 리제아나는 그의 걱정이 새삼스럽기만 했다.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그가 어떤 의도로 그녀의 상처를 물었는지 눈치챘다.

“음… 치료 고마워요.”

그때 치료해준 일에 생색내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의 말에 이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저를 찾은 이유가 그 말이 듣고 싶어서인가요?”

“그리고 음…. 전에 대화에서 필로렌치아 가문에 대해 그렇게 캐물을 생각은 아니었어. 과거를 들추었다면 미안하군.”

사과하는 이안의 적색 눈동자에는 진지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잘못한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

“역시 화났다면-”

“이안. 그 일이라면 벌써 다 잊었어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잖아요?”

리제아나 또한 그녀가 예민하게 굴었음을 알고 있었다. 아직 그녀에게 과거를 떠올리기엔 그 상처가 깊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아직 가슴이 답답했으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는지 이안은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이안이야말로 답지 않게, 제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쓰시는 성격인 줄은 몰랐네요.”

그의 반응이 퍽 재미있었기 때문일까. 리제아나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내가? 난 혹 그대가 상처받았을까 봐….”

그런 리제아나의 얼굴에 시선을 떼지 않던 이안이 이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리제아나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빨개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전 괜찮습니다. 이안. 저 또한 예민하게 굴었으니까요.”

문득 리제아나가 이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무래도 역시 그의 얼굴색이 평소와 달랐다.

“그런데… 얼굴색이 좋지 않군요.”

“이건 노을 때문에….”

그가 자신의 얼굴 위에 손을 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왜인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노을을 등진 리제아나가 빛나 보였다.

일렁이는 붉은 빛에 검은 머릿결이 반짝였다. 보라색 눈동자는 은은한 분위기를 더하는데 한몫했다.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그가 이내 침묵 끝에 입을 뗐다.

“리제아나.”

역시나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미 입에 그녀의 이름을 담고 있었다.

“네?”

“리제아나.”

“…네?”

이름을 반복해 부르자 리제아나의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내 무도회 파트너가-”

그가 꺼내기 무섭게 마탑이 크게 웅웅 울리기 시작하며 짧은 진동이 순간 탑을 스쳤다.

짧게 땅이 울리는 진동에 이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이동마법으로 마탑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음이었다.

마탑에 외부인이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남은 건 위버나 미세리타, 아니면….

‘위버는 연구로 바쁘고, 미세리타가 이렇게 빠르게 재료들을 찾아올 수 있을 리 없지.’

게다가 하르힌은 아까 마주치기까지 했으니.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네르아가 생각보다 빠르게 마탑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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