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르힌이 조심조심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내 입을 뗐다.
“하나는 시내에서 광각초를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수도 중앙 시장에 있더군.”
“예… 수도의 중앙 시장…. 예?!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직접 보았으니 알지. 오늘 리제아나와 수도 중앙 시장에 갔었으니.”
이안의 말에 하르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헤엑?! 혹시 그 소동을 막았다는 마법사가 역시 이안 님이었던 것입니까?! 황제의 눈 밖에 나시면 어쩌시려고 왜 그러셨습니까? 공작님이 마법사임을 들키지 말아야….”
다시 시작되는 하르힌의 잔소리에 이안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르힌이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은 듯했다.
“내 맘대로 되던 일이던가. 광각초에 관한 일이었다고.”
이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행동에 하르힌은 마음이 더욱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안이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예?”
“네가 어떻게 그 소식을 알고 있는 거냐고.”
그제야 하르힌은 고압적으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귀족 회의에서 들었죠. 이안 님께서 오시지 않은 덕에 저는 귀족 회의에서 보기 좋게 홀로 앉아 대차게 까였고요, 그리고….”
“그리고?”
“덕분에 람즈트 후작의 잔소리도 들었죠. 사실을 말하자면 몇몇 분들이 은근히 저하 이야기를 흘렸으나 듣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늙은이 람즈트 후작은 언제나 일상처럼 온갖 트집을 잡았다. 메아리처럼 아직까지 귀에 후작의 잔소리가 울리는 듯해 하르힌이 몸을 부들 떨었다.
“그 늙은이가 그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답지 않게 신경 쓰기는. 그냥 흘려들으면 되잖아.”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더 캐물어봤자 회의는 그저 귀족들의 입방아 찧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독한 위스키에 제대로 취하기 전 나머지를 들어야 할 차례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나쁜 소식은 뭔데?”
소파에 느긋이 앉아 이안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르힌은 그의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두우…번째가….”
하르힌이 낮게 숨을 뱉어내곤 결국 말했다.
“아비드의 황제가 죽었다고 합니다.”
하르힌의 말에 느긋하게 위스키 잔을 기울던 이안이 멈칫하며 잔을 입에서 뗐다. 잔을 탁상 위에 내려놓으며 그가 눈썹을 세웠다.
“뭐?”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병세에 점점 아비드 황제의 기력이 다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시기가 일렀다.
“황제가 죽어…?”
이안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생각에 잠겼다.
병세가 더 위독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돌연 황제가 죽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분명 그 죽음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사해봐야겠군.”
잡념을 마친 이안은 입가를 쓸었다.
어쩌면 앞으로 아비드와 텐젤, 이 제국 사이의 긴장감이 더 짙어질지도 몰랐다.
이안은 아비드 황제를 이을 다음 이를 떠올리곤 더더욱 미간을 구겼다.
그가 그리 생각에 잠겨있을 때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하르힌은 잘 알고 있었다.
“아비드 제국이라…. 아비드 제국….”
이안은 탁상 위의 위스키 잔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는 무심코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였던 그녀를 떠올렸다.
“답지 않게… 굴었지.”
신경질적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턱을 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비드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안은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지금 내가….”
마탑의 복도를 걷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있는 복도가 향하는 곳을 알아챈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이대로 복도를 따라 걸으면 리제아나의 방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결국 방문 앞까지 선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방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노크하려 했지만 이안은 끝내 손을 내렸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제 행동이 우스워 이안은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마탑의 긴 복도를 걸으며 이안은 비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올렸다.
창밖의 달은 유난히 밝고 창백했다.
그 빛을 오래 바라보다 이안은 이내 등지고 걸었다.
⚜ ⚜ ⚜
쾅쾅쾅-
집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보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손길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리제아나… 일리가 없지.”
이리 자신의 집무실을 거침없이 두들길 사람은 다름 아닌 한 명뿐이지 않은가.
이안은 시끄러운 자신의 부하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머리 없이 다니지 말라고 그리 일렀건만.
“저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들어와.”
하르힌이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했다.
뛰어온 것인지 하르힌의 숨이 거칠었다. 그런 하르힌을 본체만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이안이 물었다.
“뭔데.”
“옷… 시키셨습니까? 그것도 레이디의 옷들을? 역시 잘못 온 것들이죠?”
“그렇다면?”
여상하게 대답하는 이안에 하르힌의 얼굴이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로 공작 저하가 레이디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저리 많이 사셨단 말이야? 왜?
이안이 더 말 않고 있자 하르힌이 더 후다닥 그의 앞까지 와서 섰다.
“아니, 왜요?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길래 가보았더니 옷이 무슨… 아니 가게 차리십니까?”
“‘손님’의 것이다.”
“소, 손님? 저기 그 인질로 데려오셨다는 여성 분 말입니까?!”
그의 말에 하르힌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이안은 더 답하기 귀찮다는 듯 그저 다음 서류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눈치 빠른 하르힌은 그의 침묵이 긍정임을 알아들었다.
하르힌은 입을 번쩍 벌린 채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입 닫지 그래. 턱 빠지겠네.”
이에 이안이 놀리듯 말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르힌이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세상에 인질을 잘못 데려올 때부터 일이 조금씩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르힌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잘못 데려오셨다는 인질을 마음에 두시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의문에 하르힌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앞으로 일이 정말이지 하르힌으로서 예상하기 힘들었다.
⚜ ⚜ ⚜
“왔나? 시장에서 일이 있었다 들었는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텐젤 제국의 황제였다.
황실에게서 문득 편지가 날아왔다.
왜 황제가 자신을 부르는지 짐작하고 있던 이안은 빠르게 입궁했다.
“어제 일입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보고서를 제출한 후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황제의 신경질적인 얼굴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듯했다.
노련한 황제에게서 잘못 말을 놀렸다가는 골치가 아플 것이리라.
리제아나가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황제가 알아봤자 좋을 일이 하나 없었다.
리제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간 그녀가 델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킬지도 몰랐다.
황제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광각초가 시내까지 번진 모양입니다.”
이안은 바로 자세를 고쳐잡고는 의연하게 말했다.
“뭐어? 광각초가… 시내에 들어왔다고?”
황제의 입장에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아비드의 영향력이 수도까지 퍼졌다는 소리였으니.
“하아… 이런.”
황제의 낮은 탄식 소리에 주변이 일순 분주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이안이 물음표를 던졌고 황제는 제 턱을 잡으며 희끗희끗한 수염을 쓸었다.
그가 무언가 꿍꿍이를 그릴 때마다 그런 상투적인 행동을 하곤 했으니. 이안으로서는 그 결정의 속뜻을 아직 알진 못했지만 말이다.
“일단…. 데벤시아 공작. 그대에게 그레고리 상단의 취조를 맡기도록 하지.”
“그레고리… 상단이시라면.”
“그래. 얼마 전 그대가 직접 잡아들인 상단이지.”
황제는 그제야 인상을 풀고서 기괴스럽게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게 그곳에서 무엇이든 아비드의 정보를 캐오도록 해.”
“아비드 제국이 과연 그대로 두고 보겠습니까?”
황제는 서릿발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는 음산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지적했다.
“상관없네, 공작. 그냥 아비드의 명을 받았다-라는 단서를 확실히 잡아. 아비드 황제에게 일단 손버릇이 나쁜 상단이라는 이유로 몇 주 정도는 조사를 진행할 거라 알려두었어.”
“네.”
“거짓이든 진실이든 아무 정보나 뽑아내. 듣자 하니 황제가 그 젊은, 속 검은 애송이로 하룻밤 만에 뒤바뀌었다던데. 아비드 제국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라지?”
과연. 황제도 그 낌새를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어둠의 냄새라면 빠르게 맡는 황제였다.
이안은 겸허하게 얕은 미소를 짓고는 느릿하게 답했다.
“그 건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공작은 무엇하나 느린 게 없어서 참 좋다니까.”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이안의 어깨를 만족스럽게 두드리다 이내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멈칫했다.
“아. 그래서 그것은 정했나?”
“무엇을 말입니까?
이안의 의문에 황제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확제 무도회 파트너 말이야. 정했나,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