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절실한 소망2016.06.16.
임천에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웅래산과 맞닿아 있는 마을이었다.
산은 그 마을에 단 하나뿐인 주막을 통째로 빌렸다. 그는 예경에서 여기까지 오는 1주일 동안 돈을 물 쓰듯 썼다. 주고받은 서찰도 한둘이 아니었다.
세자가 붙여 둔 눈들을 피하기 위해 대역을 구해 사가에 데려다 놓았다. 마니전의 궁녀를 매수하여 정보를 알아내고 사람을 풀어 여사에서 쫓겨난 현음당의 행적을 찾도록 했다.
임천에서 동원되어 웅래산 근처의 결계에 배치된 병졸들도 몇 매수했다. 주술사들을 매수한 건 물론이다.
산이 가지고 있는 힘을 거의 전부 발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로 그는 눈 아래가 거뭇해진 채 각종 문서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행, 아니 도련님. 서찰 왔어요.”
“어디 거냐?”
“창이에요.”
산이 손을 내밀었다. 청화가 그 손 위에 두툼한 서찰을 올렸다. 산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그사이 청화는 얌전히 앉아 밖을 흘깃 보았다. 밖에는 산이 궐에서부터 데리고 온 호위무사인 박철호의 커다란 덩치만 보였다. 산은 철호와 청화만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는 창에서 온 서찰에 동봉된 서류들을 챙겨 온 자료들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과거의 역사가 그를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청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도련님, 좀 씻고 눈이라도 붙여요.”
“우리 청화가 날 걱정해 주다니. 낭군님이 안쓰러워?”
“낭군은 무슨 얼어 죽을, 아니, 이건 다 도련님 때문이라니까. 제 입도 험해졌잖아요!”
바락 소리친 청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청화가 냉큼 그것을 빼앗았다.
“진짜 좀 쉬고 해요. 산적 같은 몰골이라고요.”
“어허. 이리 내.”
“이것만 보고 쉰다고 약속하면 드릴게요.”
“도련님!”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방 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철호였다.
“오냐.”
“급보 왔습니다요.”
“응? 무슨 급보?”
문이 벌컥 열렸다. 산만 한 덩치의 철호가 들어오니 좁은 방이 더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철호가 서찰을 내밀었다.
청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서찰이 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겨우 대행수 좀 쉬게 하려나 했더니. 그녀는 속으로 푸념했다.
“김가가 보낸 거군.”
서찰 겉봉에 붉은 경면주사로 쓰인 것을 흘깃 본 산이 중얼거렸다. 김씨는 금산 상단에 초창기부터 소속되어 있던 주술사였다. 대결계 설치 때 산이 들여보냈었다.
서찰을 넘겨보던 산의 피로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화가 그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서찰을 내팽개치고 턱을 뒤로 젖혔다.
“하, 빌어먹을.”
“왜요?”
“가지가지 하네. 애새끼는 왜 추격대에 끼운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교룡 중에 제일 어린놈이 마니 머리카락을 넣은 제웅 모가지를 벴단다.”
“네?”
반문하는 청화의 목소리가 새됐다. 멀뚱히 있던 철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웅이면, 거시기, 액막이할 때 그거요? 아따 독허네.”
“그, 그럼 아가씨는요? 여울 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화예교룡은 다른 교룡들 다 부상자 만들어 놓고 없어졌다고 하고, 마니는 어떻게 된지 모른다는군.”
산은 짓씹듯 대꾸했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청화는 창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이 거친 손놀림으로 서찰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원하던 것을 찾아낸 듯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철호에게 손짓했다.
“철호야. 네가 고생 좀 해야겠다.”
“예?”
“웅래산 근처에서 머물면서 기다려라. 그 방면 결계를 약하게 만들어 놨으니 나온다면 그리로 나오겠지. 걔들이 탈출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네가 숨어서 지켜보면서 병사들보다 그들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그가 이번에는 청화를 돌아보았다.
“청화 넌 마차 좀 구해 봐. 튼튼한 걸로. 입 무거운 의원도 하나 수배해 두고.”
“네. 그런데, 의원을요?”
“제웅이…….”
산은 한 호흡을 골랐다.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제웅이 제대로 먹혔다면 죽거나 다쳤거나 둘 중 하나겠지. 죽었으면, 소용이 없겠다만.”
청화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산이 입가를 쓸었다.
만약 서란이 죽었다면 다 부질 없는 짓이 될 것이다. 죽었다면. 그것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혔다. 산은 그 가정을 버렸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명을 받은 청화와 철호가 바쁘게 방을 나섰다.
김씨에게 보낼 서찰을 휘갈겨 쓰던 산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이런 위험한 짓을 하게 된 건지. 마주한 시간이 그리 짧았는데도.
세자의 말을 들으며 저울질을 했었다. 누굴 택할 것인지. 그리고 깨달았다. 어느새 그건 저울에 올라갈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서찰을 마무리해 봉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눈이 저절로 웅래산 쪽으로 돌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결계 안 깊은 곳에 있을 제 친구와 동생을 찾으려는 듯이 시선이 산자락을 더듬는다.
“살아 있어라, 응? 투자한 건 회수하게 해 줘야지. 다 걸었단 말이다, 란아.”
산은 부러 화를 내듯 중얼거렸다.
*
해가 저물 무렵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나리는 양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채 간이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의원과 주술사가 있었다.
의원은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렸다. 의원 옆에 있던 머리가 하얗게 샌 주술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큰 문제는 없사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희나리가 뾰족하게 되받아쳤다. 주술사는 허허롭게 웃었다.
“걱정되어 보고 계셨던 것 아니옵니까?”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술사와 의원이 치료하던 건 야로였다. 소년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
“손의 상처는 치료가 끝났사옵니다.”
“열은 저주의 반동이지만 한동안 정양하면 괜찮을 것이옵니다.”
주술사가 이어 말했다. 가만 듣고 있던 희나리가 물었다.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저주는 성공했을까?”
“제웅을 쓰셨다 했지요. 따로 확인할 방법은 없사오나 화련교룡 님의 상태를 보면 살이 날아간 건 확실하옵니다. 목을 벤 것이니 운이 좋지 않은 이상, 거의 숨이 끊어졌을 것이옵니다.”
“아니, 아직 살아 있을 거다.”
입구의 천을 젖히며 들어온 온이 끼어들었다. 왼쪽 어깨와 관자놀이,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그는 비를 맞은 탓에 약간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예를 취하는 의사와 주술사를 내보냈다. 그런 뒤 야로를 잠시 살피더니, 성난 고양이처럼 입을 다물고 웅크려 있는 희나리의 앞에 앉았다.
“죽었으면 여울이 이리 조용할 리가 없지.”
“……여울이? 왜?”
“살 때문에 마니가 죽었다면 아마 야로를…….”
온이 말을 끊었다. 도하에서 여울을 마주했을 때 온은 이미 알아차렸다. 여울은 억지로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는 야로를 잠깐 돌아보았다. 긴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느루를 불러야 하지 않아?”
희나리는 몹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만약 마니가 죽었는데 마니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찾아내도 여의주가 오염되어 있다거나, 여울이 그 여의주를 가로채 용이 되어버린다면, 느루를 위한 새 마니가 필요해진다.
그건 온과 희나리 둘 모두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었다. 온이 끄덕였다.
“이미 연락을 보냈다. 비늘을 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하긴 비늘로 불러 왔는데 마니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
느루의 성격은 다들 알고 있었다. 희나리는 인상을 썼다. 온이 말을 더했다.
“아예 추격에 합류하라는 이야기도 보냈다.”
“응?”
“멀쩡한 상태로도 밀렸는데 이 꼴로 여울을 어떻게 잡겠어. 마니가 없으니 아주 거침이 없더군. 느루까지 와도 모자랄지 몰라.”
정확한 지적이었다. 희나리는 어두운 얼굴로 제 허벅지를 보았다. 길게 베인 상처는 여울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녀의 다리를 잘라 버릴 수도 있었던 흔적이다.
그래도 동기라고 손속에 자비를 둔 것이다. 그들은 죽일 작정으로 노렸는데 오히려 여울은 봐줄 만큼 격차가 있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그 자비도 더 이상은 발휘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야로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한 번 당했으니 제웅에 대한 대비도 할 터다.
희나리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떡하지?”
“어찌 됐든 약점은 마니야. 느루는 야로보다 훨씬 뛰어나니 확실한 전력이 될 거고. 괜찮을 거다.”
“세자가 귀찮은 마니를 버리고 새 마니를 뽑으면 어떡해?”
울음과 공포가 섞여 있는 말이었다. 온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진정해.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럴 일은 없으니까.”
“있지, 온. 나 사실 무서웠어, 아까…….”
희나리는 찰나 마주쳤던 여울의 눈빛을 되살렸다. 다가가면 자신이 죽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었다. 그게 살기였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섬뜩한 검은 눈.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던 소녀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다리를 베이기 직전에 본 것. 눈물이 약간 고인 그녀의 얼굴이 온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아까 좀 이상한 걸 봤어.”
“뭘?”
“잘못 봤을 수도 있는데…….”
희나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여울 눈이 주홍색으로 보였어.”
“……말도 안 돼. 잘못 본 걸 거다.”
여의주를 얻은 용은 왕족처럼 주홍빛 눈동자를 가지게 된다. 왕의 용인 헤살이 그러했다.
이무기가 그럴 리가 없다. 온이 미간을 모은 채 부정했다. 희나리는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하긴, 싸우는 와중이었으니까.”
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야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거렸다. 두 교룡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쏠렸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낸 희나리가 딱딱하게 물었다.
“야로는 어쩔 거야?”
“돌려보내자. 진작 그랬어야 했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세자나 느루가 허락할까?”
“일단 서찰에 그것도 쓰긴 했다만…….”
온이 자신 없이 말끝을 흐렸다. 침묵이 흘렀다. 희나리가 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며 고갯짓했다.
“그럼 답신이 오는 걸 기다리면 되겠네. 난 좀 잘래. 지쳤어.”
“그래, 푹 쉬어라.”
“온도 가서 쉬어. 일단 빨리 나아야 뭐라도 할 거 아냐.”
“그래야겠지.”
벌써 밤이었다.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온은 제 막사로 돌아갔다. 희나리는 곧 잠에 들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
동굴 안에는 빗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자드락은 서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맥을 쟀다. 여울이 서란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눈빛은 흔들렸다.
자드락이 그녀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안 좋네.”
무릎 위에 단정히 놓여 있던 여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드락은 그것을 흘깃 보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맥이 너무 약해. 실혈이 심했는데 보충할 방도가 없어. 부적으로 막아 놨다만 저 목도 제대로 치료해야 하고. 뭐라도 먹여야 하는데 목이 저래서야. 침이나 약재는 바라지도 않으니 하다못해 괴황지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자드락이 눈을 들었다. 여울보다는 조금 옅은 홍채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제대로 된 곳에 데려가는 것까지 고려하면 더 이상 시간 끌 틈 없어. 오늘 새벽에라도 나가야겠어. 가능하겠냐?”
“너는?”
“솔직히 삭신이 쑤신다만, 별수 없지.”
자드락이 투덜거렸다. 그가 모닥불 옆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대강 그린 지도였다.
산들을 감싸는 원을 커다랗게 그린 자드락이 서쪽을 탁탁 쳤다.
“여기가 비교적 약해. 네가 한번 흔들어 주면 그 틈으로 축지를 써서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웅래산 쪽이군. 원래 가려던 방향이다.”
“그 뭐, 여의주 없는 왕자인가 걔랑 같이 짠 일정이라며?”
“류산.”
“그래 그 산인지 강인지 하는 놈. 결계에 이쪽으로 나오라는 것처럼 교묘하게 균열이 있는데 말이지.”
자드락이 서늘하게 단언했다.
“걔가 해 놓은 수작이 아닐 경우엔 함정이라고 봐야 해. 어느 쪽일 것 같아?”
여울은 서란을 내려다보았다. 모포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얼굴은 파리했다. 호흡이 가늘고 약하다. 사라져 버릴 것처럼.
가는 목에 감겨 있는 흰 붕대가 몹시 거슬렸다. 감고 있는 얇은 눈꺼풀에 파란 핏줄이 보인다. 선명한 주홍빛 눈동자가 문득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함정이건, 산의 신호건, 따질 틈이 없다.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는 메마르게 답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뭐, 그거야 그렇지.”
자드락이 낄낄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밖에 매개체가 있으면 그냥 축지하면 되는데……. 올 땐 비늘로 쉽게 와 놓고, 나가는 건 생고생이네.”
장거리 축지는 준비가 필요했다. 방문해 본 장소여야 하며, 주술사가 만들어 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커다란 이적인 만큼 쉽지 않다.
자드락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꾸물꾸물 움직여 자세를 잡은 그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시진 있다 깨워. 그때 출발하게.”
“알았다.”
“아, 넌 자지 마라. 깜박 졸았는데 마니가 싸늘해져 있으면 평생 꿈에 나올걸. 영영 자기 싫어진다, 그거?”
농처럼 나온 말이 묵직했다. 여울은 가만 그를 보다가 물었다.
“그건 네 경험인가?”
“어. 비슷하지.”
누운 자드락의 가슴이 웃음으로 들썩였다. 어딘지 울음에 가까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자드락이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괴었다. 그가 다리를 꼰 채 일정한 박자로 흔들었다.
“너무 피곤했어. 그냥 잠깐 눈을 붙였는데. 진짜 잠깐 방심한 거였단 말이야. 근데 그 사이에 주술이 흐트러졌더라.”
“무슨 주술?”
“여의주 향 감추는 거. 향이 샜거든.”
자드락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봄처럼 밝고 명랑한 가락이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너는.”
여울은 저절로 나오던 물음을 입 안으로 삼켰다. 자드락이 고개만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뭐. 말을 하다 말아.”
“……네 보주를 연모했었나?”
콧노래가 뚝 멈췄다. 자드락이 갸웃거리더니 코끝을 긁적였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바닥을 더듬더니 손에 잡힌 돌을 여울을 향해 집어던졌다.
형편없는 조준이었다. 여울로부터 한참 먼 곳으로 비껴 날아간 돌멩이가 동굴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돌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공허하게 동굴을 울렸다.
“짜증 나는 새끼.”
자드락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가 제 뒷목을 손으로 주무르더니 불쑥 물었다.
“술 없냐?”
“없다. 미안하군.”
여울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 두 가지를 담은 사과였다. 자드락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하다 도로 누웠다.
“이따가 제시간에 깨워.”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은 반듯하게 앉은 채 간혹 가다 모닥불을 뒤적였다. 빗소리와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향을 지우지 못해서 달큼한 여의주의 향기가 고여 있었다. 자드락이 쳐 둔 주술 덕에 밖으로 새지는 않았다.
모닥불의 발그스름한 빛이 서란의 창백한 뺨을 물들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식은땀으로 그 이마에 엉겨 붙었다. 여울은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다.
가슴 속에서 서걱서걱 무언가 갈리는 듯했다.
그는 간간히 고개를 들고 밖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이 근처로 접근하는 인기척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 때문에 수색이 더뎌진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더 활동하기 좋아지는 교룡들은 부상을 입혀 놨으니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제웅을 쥐고 있던 야로를 떠올리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분노와 배신감과 자괴감과 슬픔. 여울은 그것을 눌러 삼키며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새길 듯 덧그렸다. 손을 들어 다시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
모든 게 다 제 탓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들어오는 향은 달건만 입 안은 쓰기만 했다. 가뭄에 바짝 마른 대지처럼 쩍쩍 금이 간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지키지도 못하고, 치료할 능력도 없고, 살릴 방법도 모른다. 지독하게 무능하다. 자괴감이 전신을 타고 오른다.
여울은 그녀를 만지고 싶어 제 손을 가까이 했다가, 뒤로 물렸다. 냉한 체온이 그녀에게 좋지 않을까 봐 닿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닿는 것조차 하지 못한 손은 허공을 배회하다 내려앉았다.
“……용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제가 뱉어 낸 말에 흠칫 놀랐다. 바라 본 적 없던 욕심이 심장을 저미며 돋아나고 있었다.
용이 되고 싶다. 진심으로.
무슨 일이 있든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힘으로 그녀를 완벽하게 지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울은 처음으로 절실하게 소망했다. 타는 듯한 갈망이 전신을 물들였다. 그는 이를 사려 물고 고개를 숙였다.
왜 용이 되고자 하느냐고 묻던 이무기는 비로소 용을 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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