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액막이2016.06.12.
비늘이 희미하게 빛을 냈다. 새겨져 있던 주술이 발동하며 허공에 진을 그렸다. 그 진은 곧 사람의 형상을 토해 내고 사그러들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산발하여 늘어뜨린 청년이 비틀거리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서촌에 있어야 할, 자드락이었다.
“깜짝이야. 급하게 만들었더니 예고도 없이 발동되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비척비척 일어났다.
“으, 어지러워. 여긴 어디야?”
자드락은 목을 쭉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닥불이 어른거리는 동굴이었다. 비릿한 혈 향이 가득했다. 그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웬 피 냄새가. 왜 아무도 없…….”
움직이는 발에 툭 무언가가 걸렸다. 아래를 본 그의 얼굴이 딱 굳었다.
마니가 쓰러져 있었다.
흐트러져 샘처럼 고인 검은 머리카락에 물감을 쏟은 것처럼 새빨간 피가 덧그려졌다. 어설프게 매듭지은 목의 붕대는 피에 절어 늘어져 있었다.
손도, 소맷자락도 온통 붉었다. 힘없이 늘어진 손 안에 부서진 비늘이 보였다.
“……뭐야, 벌써 죽었어?”
자드락의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며 실실 웃음이 새었다. 정신이 나간 듯한 웃음이었다. 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자드락은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가린 서란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묻어 있던 피가 툭 떨어져 흰 뺨을 타고 흘렀다.
그가 손가락을 그녀의 코끝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가는 숨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것을 느끼자 맥이 탁 풀렸다.
“아직, 살아 있네…….”
넋 놓고 중얼거리던 그의 눈에 초점이 확 돌아왔다. 자드락은 후다닥 일어나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란이 벌여 놓은 고약과 붕대 등을 금세 찾아냈다. 그 외에는 딱히 치료에 쓸 만한 것이 없었다. 침이나 바늘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빛이 얼굴에 감돌았다. 그는 황급히 제 검지 끄트머리를 이로 물어뜯었다.
붕대를 조금 찢어 내 그 피로 글자를 휘갈겼다. 임시로 만든 부적이었다. 괴황지(槐黃紙)나 경면주사(鏡面硃砂) 대신, 임기응변으로 붕대와 피를 사용한 탓에 효력이 떨어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자드락은 서란 곁에 앉아 목덜미에 늘어진 긴 머리카락들을 전부 모아 넘겼다. 피로 절어 쩔꺽이는 붕대를 뜯어내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상처를 본 그가 질겁했다.
“미친, 이게 뭐야.”
깊은 자상. 즉사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출혈이 지나치게 심했다. 엉성하게 발랐던 고약이 피에 씻겨 내려갈 정도였다.
주술에 능한 그의 눈에는 다른 것도 보였다. 불길한 살이 득시글하게 붙어 그녀의 숨을 막고 있었다.
급한 김에 맨손을 가져다 댔다. 재액이 된 살이 사방을 긁어 댄다. 그의 손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자드락은 그것을 무시하고 손을 움직였다.
달라붙어 있는 재액을 뜯어내고 피가 쏟아지는 상처에 붕대로 만든 부적을 붙였다. 순식간에 시뻘겋게 젖어드는 부적을 보며 그가 입 속으로 욕설을 주워섬겼다.
“여울 놈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자기 보주를 이 꼴이 되도록 내버려 두고.”
이를 악문 자드락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매캐한 연기를 억지로 코에 들이부은 듯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고통스러운 호흡과 달리 검을 쥔 손은 한없이 가벼웠다. 주위 모든 것이 선명하고 느렸다. 무척이나 기묘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여울의 뇌리에 떠오른 건 오직 보주에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창을 비껴 내린 검이 희나리의 허벅지를 길게 베었다. 무너지는 소녀를 지나쳐 여울의 모습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부상을 입은 교룡들은 그를 쫓아오지 못했다.
그는 나뭇가지와 바위를 타고 나는 듯이 달렸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와 부딪쳤다.
이상한 고양감과 숨을 죄던 매캐함이 차츰 사라졌다. 목을 잡아 뜯는 것 같던 통증도 없어졌다.
대신 조급함이 차올랐다.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이성이 흔적을 남기거나 수색 중인 병사에게 걸리지 않도록 자제를 했다.
그는 서란이 숨어 있을 동굴 앞에 멈춰 섰다. 입구에 처음 보는 주술이 걸려 있는 게 느껴졌다.
주술이라니. 안에는 보주밖에 없어야 하는데.
여울은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을 타고 온과 희나리의 피가 뒤섞여 떨어졌다.
늘어져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는 넝쿨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반발이 있으리라 각오했는데 그런 종류의 주술은 아닌 듯했다.
주술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는 들어선 순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자 농밀한 여의주의 향이 가득했다. 어질할 정도로 짙었다. 저 주술이 향이 새지 않도록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가 알기로는 자드락뿐이다. 걸음이 급해졌다. 여울은 달리다시피 안쪽으로 들어갔다.
“느려 터졌네.”
들려온 목소리는 심드렁하고 힘이 없었다.
동굴 벽에 기대앉은 자드락이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그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사지를 제멋대로 내팽개친 채였다.
여울은 자드락이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지 알아볼 틈이 없었다. 어슴푸레한 모닥불이 비추고 있는 동굴 속에서 그의 시선은 서란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무너지듯 꿇었다.
모포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은 두려울 정도로 희었다. 목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핏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에 모포까지 다 피범벅이었다. 피 냄새와 섞여 콧속으로 파고드는 여의주의 향이 소름 끼쳤다.
여울은 서란에게 손을 뻗다가 공중에서 멈췄다. 공포가 전신을 좀먹었다. 이토록 아득한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생명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생각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살아 있어.”
자드락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울은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 비틀, 주저앉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자드락은 눈만 굴려 여울의 등을 보다가 늘어져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피와 물과 먼지로 더러워진 맨발이었다.
그가 발끝으로 여울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니, 무슨 일이…….”
“어디서 뭘 하다 왔어?”
정신을 반쯤 빼놓고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자드락이 비뚜름하게 물었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무표정과 달리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뺨과 옷자락에 이무기의 피가 튀어 있었다.
그 꼴을 보며 자드락이 킬킬 웃었다.
“전에도 별로 맘에 안 들었는데, 좀 나아지나 싶었더니만. 진짜 볼수록 맘에 안 드네.”
자드락은 비척거리며 상체를 세웠다. 동굴 벽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무서운 기세로 여울에게 다가왔다. 자드락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볼 때마다 주인을 팽개치고 돌아다녀? 이러고도 네가 교룡이야? 아주, 팔자가 늘어졌어, 응? 내가 내 마니 죽는 거 못 봤다니까, 네 마니 죽는 꼴이라도 대신 보여 주려는 거야? 이 따위로 굴 거면 명령이고 뭐고 때려치워!”
번들거리는 눈에 광기가 돌았다. 으르렁거리며 쏟아진 말에 여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 더 화가 난 자드락이 이를 드러내다가 푹 고개를 꺾었다.
여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그가 휘청 쓰러졌다. 여울이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잡아 준 덕에 바닥에 얼굴을 찧는 꼴은 가까스로 피했다.
“아, 죽겠네.”
자드락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여울의 손을 밀어내며 그대로 대자로 드러누웠다. 멍하니 서 있는 여울에게 그가 턱짓을 했다.
“야, 저기 마니 옆에 호리병 좀 가져와.”
호리병은 피에 절은 붕대 무더기와 함께 놓여 있었다. 얼결에 그것을 집어 든 여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출렁거리는 액체나 입구에 묻어 있는 붉은색 덕에 내용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네 주인이 흘린 피다. 아까워서 좀 받아 놨지.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덕분에 아주 넘쳐흐르게 얻었어.”
“…….”
“뭐. 왜. 눈빛 한번 불손하네. 너 지금 마니가 살아 있는 게 누구 덕인지나 알아?”
“이걸 어디다 쓰는 건가?”
자드락이 누운 채 비실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낑낑거리며 상체를 세우더니 여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울은 잠시 침묵하다 그 손에 호리병을 쥐여 주었다.
“보여?”
자드락은 호리병을 든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걷어올린 소매 아래로 짙은 피부에 비늘이 돋아 있는 게 보였다.
자드락이 킬킬거리며 호리병을 열고 피를 몇 모금 들이켰다. 팔뚝에 돋아났던 비늘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트림을 하고는 으쓱였다.
“이런 데 쓰는 거야, 후배야.”
“…….”
“뱀 되는 거 막는 데 아주 효과가 좋거든. 나쁜 짓 할 때 필수품이지.”
“도망 다닐 때 알아낸 방법인가?”
“그렇지. 잘 아네.”
자드락은 호리병을 내려놓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여울을 응시했다.
“마니를 지키려면 나쁜 짓이 필요하거든. 안 그래?”
그 시선을 마주하던 여울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는 서란에게로 다가가 곁에 앉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다,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멈췄다. 이무기들의 피였다.
여울은 일어나 피투성이인 손과 얼굴을 닦았다. 자드락이 그 모습을 보다 콧방귀를 끼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대강 엉망이던 꼴을 정돈한 여울이 서란의 창백한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체온. 손끝에 닿은 관자놀이에서 가늘게 뛰는 맥박.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아직 인사하긴 이른데.”
“위험한가?”
“당연하지. 간신히 출혈만 막아 논 건데. 누가 살을 쏜 거야?”
대답하기가 힘이 들었다. 여울은 울컥 끓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한때 아꼈었던 소년의 이름을 댔다.
“야로.”
“어? 그 꼬마 교룡?”
자드락은 둥그렇게 뜬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끼가 낀 암벽을 가만 보던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곧 그는 요란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 사이로 횡설수설하는 말이 섞여 나왔다.
“와, 그런 꼬마가, 살을 쐈다고? 살을? 으힉, 힉, 미쳐 돌아가네, 걔도, 지금쯤 상태가, 가관이겠어, 힉.”
그는 웃음을 참지도 않았다. 자드락의 온몸이 들썩였다.
여울은 광인처럼 구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대신 세심하게 서란의 상태를 살폈다. 체온이 낮았다. 안색이 파리했다.
그는 모닥불을 뒤적여 불을 키우고 모아 둔 나뭇가지를 꺼내 모닥불을 하나 더 피웠다. 제 몸이 차가워서 그녀에게 온기를 나눠 줄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그래서, 넌 뭐 하느라 보주 옆에 없었어? 꼴을 보아하니 어디서 한바탕 싸웠나.”
자드락이 물었다. 여울이 흘깃 그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여기에 왔지?”
“나? 비늘에 축지를 걸어 놨었지.”
“축지로 결계를 넘을 수 있나?”
“결계?”
“이 근처는 전부 결계로 막혀 있다. 느끼지 못했나?”
“아,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니.”
자드락이 누운 채 머리를 긁적였다.
여울은 깨끗한 수건을 꺼내 물을 적셨다. 그것으로 서란에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그녀의 입술은 깨물렸는지, 터져 있었다. 그녀가 느꼈을 지독한 고통이 짐작되었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갇힌 거냐, 너희?”
“그래. 수색을 늦추려다 교룡과 마찰이 있었다.”
답하는 목소리 끝이 분노로 떨렸다. 확 타오른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했다.
막지 못했다.
제웅이 베이던 순간을 떠올리자 끔찍한 추락감이 느껴졌다. 시커먼 절망과 새빨간 공포가 입을 벌려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던.
“그 꼬마는 뭐로 살을 쏜 거야?”
“제웅.”
“하. 고작 제웅? 그런 간단한 걸 못 막아서.”
자드락이 비웃었다. 적신 수건을 쥔 여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자드락은 낑낑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거슬린다는 듯 대충 쓸어 넘겼다.
“근데 제웅이면 용케 살았네. 뭔가 중간에 액막이가 있었나?”
“무슨 뜻이지?”
“아까 붙어 있는 재액 상태가, 보통이라면 살 맞은 직후에 이미……아니,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자드락은 양반다리를 한 채 상체를 흔들거렸다. 무언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홱 고개를 틀어 여울 쪽을 보았다.
“이틀.”
여울이 눈만 들어 자드락을 보았다. 자드락이 빙긋 웃었다.
“이틀 안에 제대로 된 치료 환경을 마련해야 해.”
“어떤?”
“약재나, 침구나, 침이랑, 바늘까지. 이딴 곳에 있다간 아슬아슬하게 붙여 둔 숨 끊긴다? 지금 상태 유지시킬 부적 만들 도구도 없다고.”
여울의 손이 멈췄다.
막막한 산중이었다. 수색하는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것을 구할 수도 없고, 치료할 환경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결계 밖으로 나가 임천으로 갈 수 있다면 모를까.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결계를 넘어서 여기에 나타난 자드락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버석버석한 목소리가 겨우 입 밖으로 나왔다.
“자드락.”
“왜?”
“도와다오.”
자드락의 눈매가 접혔다. 그는 끌어올린 무릎에 턱을 괴고 가볍게 대꾸했다.
“나 지금도 엄청 무리하고 있는데? 유배지 밖에 있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매순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근데 뭘 또?”
“내겐 저 결계를 벗어날 능력이 없다.”
여울은 수건을 내려놓았다. 돌아선 그가 자드락을 향해 깊게 몸을 숙였다. 곧은 자세였다. 자드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이든 하겠다. 그러니, 제발.”
“이야, 살다 보니 이무기가 비는 꼴도 다 보네.”
자드락이 고개를 모로 꼬더니 실실 웃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끌며 여울 앞까지 다가온 그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럼 대신 네 보주, 나한테 줄래? 어차피 내가 살리는 거잖아?”
여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이 흔들렸다. 자드락은 그 눈을 파헤칠 듯이 들여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날선 긴장이 돋아났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그 찰나에 휘몰아쳤다. 그녀를 살리는 것이 가장 중했다. 여울은 어지러운 가운데 그 생각을 붙들었다.
잃을 수는 없다. 견딜 자신이 없다.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자드락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곧이어 배를 잡고 웃어 대기 시작했다. 웃다 못해 캑캑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여울은 망연히 그 광태를 지켜보았다. 한참을 웃던 그가 머리를 들었다.
“야, 너는 마니보다 놀리는 맛이 있네. 걔는 안 속던데.”
“…….”
“농이야, 농. 교룡 자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맹약이 뻔히 있잖아. 그냥 해 본 소리다.”
여울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수습했다. 자드락은 기묘한 미소를 띠었다. 곱상하여 여울보다 어려 보이는 그를 생이 마모된 노인처럼 보이게 하는 미소였다.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뭐, 마니한테 고르라고 해 봤자 널 택하겠지. 네 주인이니까.”
“나는…….”
여울은 확신하지 못했다. 지키겠다고 해 놓고서 이리 다치게 만들었는데 그가 그녀의 교룡이라 할 자격이 있을까. 선득한 자괴감이 가슴을 헤집었다. 굳은 얼굴 위에 저며진 고통이 스쳤다.
자드락은 여울의 상태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처음부터 도와줄 생각이었어. 안 그러면 축지를 건 비늘을 주지도 않았겠지. 야, 이리 와 봐.”
그가 아랫것을 부르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여울은 묵묵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자드락은 어린아이처럼 팔을 벌렸다.
“나, 부축 좀 해 줘.”
“못 일어나겠나?”
여울의 눈이 그를 훑었다. 폐인 같은 꼴이긴 했지만 사지 멀쩡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가 자신을 살펴보는 것을 알아챈 자드락이 입술을 비틀었다.
“네 주인 살리느라 진을 쏙 뺐거든.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이야. 빨리 안 해? 뭐든 하겠다며?”
“알았다.”
여울이 그의 팔을 잡았다. 휙 들어올려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 의지해서 일어난 자드락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나가자. 결계 상태를 봐야 뭘 하지.”
그들은 넝쿨을 헤치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자드락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여울에게 손짓을 했다.
“넌 가서 망 봐. 잠깐 견적 좀 내야겠으니.”
여울은 언뜻 동굴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을 본 자드락이 비웃음을 띠었다.
“잘만 두고 돌아다니더니, 이제 와서 신경 쓰기는.”
“보주를 혼자 두어도 되는 건가? 상태가…….”
“지금 붙어 있어 봤자 마니한테 도움 안 돼. 오래 안 걸리니까 누구 못 오게 망이나 봐라.”
“……부탁하지.”
자드락은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돌멩이를 주워 바닥에 무언가를 끼적거렸다. 주술과 관련된 계산인 모양이었다.
여울은 다시 한 번 동굴 안쪽을 돌아보았다. 잘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시선을 떼어 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검을 꺼내 쥐고 수풀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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