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7화 (17/70)

17. 이미 늦었습니다2016.04.28.

서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내내 궁금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마니전의 궁녀들은 그녀를 감시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안에서 지내다 보면 눈치가 없어도 길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서란은 여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화가 난 걸까? 그녀는 초조하게 양손을 맞잡았다.

“괜찮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잖느냐.”

여울은 손등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들여다보았던 흉터는 그림자 속에서도 뚜렷했다. 그는 그것을 할퀴듯 쥐었다.

그것에 얽혀 있는 기억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환멸과 공포와 피로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 근원은 연정이다. 연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그것이 연정이었던가?

“상관없습니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 없는 얼굴 속에서 격랑이 인다.

스스로가 잘 통제되지 않았다. 무엇을 원해 이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토록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은 처음이었다.

서란이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여울이 왜 이러는지 추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으니, 그가 먼저 예전에 답하지 않았던 걸 말해서 대답을 끌어내려는 걸까.

서란은 몇 번이고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 건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니라. 그러니까,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말하기 싫은 일 정도는 있는 것이 아니냐?”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여울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보주께선 말하고 싶은데도 말하지 않는 것이잖습니까. 답서를 써 놓고도 보내지 않았듯이.”

서란은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는 그녀가 처음 보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처진 눈꼬리와 비틀린 입매. 그것은 자괴감이었다.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제게는 아무것도 알리려 하지 않으십니까?”

“…….”

“제가 보주 곁을 떠나서입니까? 그래서 제게 거리를 두십니까?”

담담하던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속에서 끓어 오른 물음을 토해 내었다.

“저를 꺼리십니까? 제가, 비정상적인 이무기라서.”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왜 그런 생각을 해.”

서란이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너는 이상하지 않아. 너를 꺼렸던 적도 없다. 나는 그저, 너를 아껴서…….”

그녀의 말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전신을 적신다. 여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작 옷자락을 잡는 손놀림과 호소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피가 끓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혈액이 아니라 용암처럼 느껴졌다.

이무기는 처음으로 깨달은 제 안의 욕망 어린 짐승에 아연해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뗐다. 그저 눈동자를 굴리고 머리를 돌리는 일이 이렇게 힘겨울 줄은 몰랐다. 그가 그녀의 어깨 어림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왜 답서를 보내지 않으셨는지는 알고 싶습니다.”

가는 어깨가 떨렸다. 감싸안고 싶다.

여울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어깨에서도 시선을 돌렸다. 그늘진 구석을 응시했다.

서란은 여울의 내부에서 어떤 충동이 이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표정 없이 굳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놓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내리깐다.

“……나는 너를 알아야 하지만, 너는 나를 몰랐으면 했다.”

“어째서입니까.”

“너를 자드락처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서란은 웃었다.

“나를 쉬이 잊길 원했느니라.”

왜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마니였으니까.

어느 정도 짐작했던 답이었으나 실제로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울컥 무언가가 치받아 올랐다.

여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의 무한한 어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속을 태우고 입 밖으로 재를 토해 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느냐.”

서란은 그 말이 기뻤다. 그리고 기쁘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왜, 사과를 하십니까.”

여울은 고통스럽게 되물었다.

서란은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타고 어깨로 쏟아진다.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서란이 일어났다. 그녀는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털고 다듬은 후에 반듯하게 섰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 있으면 상처에 좋지 않다. 일어나렴.”

여울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마 아래로 설핏 보이는 온혜. 그 옛날 떠나기 직전에 스란치마 아래로 보였던 조그만 당혜가 떠올랐다.

그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긴 이야기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에 관한 이야기냐?”

“예.”

“말하기 싫은 일이 아니더냐.”

“저를 알고자 하셨잖습니까.”

“너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괴롭지 않습니다.”

서란은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무척이나 알고 싶었기에 사실은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우물거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일단 편히 앉거라.”

“괜찮습니다.”

“보는 내가 괜찮지 않느니. 부상자가 뭘 하는 겐지 모르겠구나.”

그녀의 말에 그가 겨우 일어났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위에 올린 손등 위에 긴 흉터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깊게 파인 칼날 자국.

서란의 시선이 그 곳에 머물자 여울 또한 그것을 보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는 오랜 기억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

이무기는 약 15년마다 탈피를 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은 그 정도의 기간이 걸렸다.

평소에는 전혀 외모가 변하지 않다가 탈피를 할 때마다 자라, 네 번의 탈피를 거치면 성인의 외모가 된다. 정신 연령도 그와 비슷하게 성장했고 이무기로써의 능력이나 육체적인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무기 기준이었으므로 첫 탈피를 마친 어린 이무기라 해도 보통 인간보다는 영리하고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세 번 탈피한 여울은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반듯한 얼굴이나 단정한 차림은 그를 물정 모르는 도령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갓 세상에 나온 이무기는 순진했다.

그는 용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진 돈을 모조리 털렸다. 도둑맞은 게 아니라 속임수에 넘어가 가난을 가장한 자에게 전부 주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겪어 본 적이 없으니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빈털터리가 된 여울은 일을 해서 돈을 벌려 했다.

그러나 사미국 출신의 곱상한 소년이란 일을 맡기기엔 영 못미더워 보이는 존재였다. 막노동을 시키려니 몸이 가늘어 보이고 잔심부름을 시키자니 타국인이라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는 넉살이 좋거나 말을 매끄럽게 잘하는 편도 아니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들이댈 요령도 없었다.

요마를 처리해 현상금을 받는 방법도 있으나, 용미는 워낙 큰 대도시여서 근처에 요마라곤 보이지 않았다. 궐이나 관아에 교룡으로서 자금을 요청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여울은 별수 없이 노숙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하루 정도는 자지 않아도 괜찮은 몸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해가 뜨면 다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늘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느슨해지던 그의 감각에 인기척이 걸렸다.

“다가오지 마!”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였다.

여울은 부스스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골목 안쪽에서 사내 몇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소녀가 소리를 쳤다.

“지금 큰일 날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고! 후회하게 될걸! 너희, 내가 누군지 알아?”

“알지, 알고말고. 아니까 이러는 거지.”

사내 중 하나가 킬킬 웃었다. 그들 근처에는 소녀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소녀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사내가 칼을 소녀에게 겨누고 손을 뻗었다.

“얌전히 따라오면 다치게는 하지 않으마.”

“으…….”

소녀는 파랗게 질리더니 빽 고함을 질렀다.

“누구 없어요? 구해 줘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이 계집애가!”

소녀의 비명에 기겁한 사내들이 덤벼들었다. 소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억센 손아귀에 붙들릴 것을 각오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에게 닿는 손은 없었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내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여울이 검집째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긴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은 소년은 소녀의 또래로 보였다.

소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여울이 고개를 돌렸다.

이국적인 갈색 피부. 노을빛이 역광으로 비쳐 들었다. 소녀가 보아 온 소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는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나?”

그 순간 벽씨 상단의 금지옥엽인 벽미향(碧美香)은 정체불명의 소년에게 한눈에 반했다.

호위무사를 발로 차 깨운 다음 미향은 여울을 데리고 벽씨 상단 본부로 돌아갔다. 대문 앞에서 외동딸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던 상단주 벽경환은 무사히 돌아온 딸을 보고 겨우 안도했다.

“미향아, 이 아비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아느냐?”

“아빠.”

미향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벽경환은 딸을 안고 한숨을 쉬다가 뒤쪽에 멍하니 서 있는 여울을 발견했다.

“너는 누구냐?”

“나를 구해 준 사람이야, 아빠. 이름은 여울.”

미향이 여울을 소개했다.

“구해 줬다니?”

“딸내미 큰일 날 뻔했거든.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녀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벽경환은 여울을 귀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처음에는 하룻밤만 머물고 떠날 생각이었다. 미향이 그를 붙잡았다. 미향은 아버지에게 여울의 무공을 강조하며 그를 자신의 호위무사로 삼고 싶다고 졸랐다.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호위무사로 받아들인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딸의 끈질긴 조름과,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게 틀림없는 여울의 몸가짐을 보고 경환은 반쯤 허락하고 말았다. 조건은 기존 호위무사들과의 결투였다.

여울은 내키지 않았다.

“왜? 있을 곳도 없다면서? 돈도 없다며? 우리 상단 엄청 커. 여기 호위무사 자리 경쟁 되게 치열해. 넌 굉장한 기회를 잡은 거라니까?”

“가 보고 싶은 곳이 많다.”

묵묵히 여장을 챙기는 여울을 미향은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녀가 여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여울, 불쌍한 사람들한테 줘서 여비가 하나도 안 남았다고 했지?”

까만 눈이 흘깃 돌아본다. 미향은 언뜻 세로로 길쭉한 동공을 보았다. 그녀는 착각이려니 치부했다.

“그거, 속은 거야. 동해 객잔에서 밥 먹다 만났댔잖아? 거기 고급 객잔이야. 진짜 가난한 사람이면 거기 들어가지도 못해.”

미향이 붉은 입술을 휘었다. 그녀는 상인의 딸이다. 자식이라곤 그녀뿐인 경환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 것도 그 과정에 있었다. 불과 며칠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여울은 곱게 자란 도련님에 가까웠다.

어디 오지의 산속에서 수련만 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 점은 그녀의 아비도 동의하는 바였다.

“너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잖아. 그런 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라니. 익숙해질 때까지만 호위무사로 지내는 건 어때?”

“익숙해질 때까지라니, 무엇에?”

“뭐긴, 세상살이지. 좀 물정을 깨우칠 때까지만, 응? 내가 도와줄게.”

여울은 그 말에 설득되었다. 소룡전에서만 살아 왔던 그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거짓말이나 탐욕도 익숙하지 않았다.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한동안만이라면.”

그는 당분간 호위무사로 일하기로 결정했다.

경환이 내걸었던 조건은 쉬웠다. 호리호리한 소년은 덩치 좋은 무사들을 아주 간단하게 쓰러트렸다. 그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탁월한 검술이었고 놀라운 무공이었다.

미향은 점점 더 여울이 마음에 들었다. 반듯한 외모, 뛰어난 실력, 우아한 태도, 의외의 순진함까지. 그녀는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경환도 시간이 갈수록 여울을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벽씨 상단을 딸에게 물려 줄 생각인지라 남편감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여울은 뒷배가 없고 약지 못해서 미향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데다 그녀를 지켜 줄 무력까지 있다. 미향을 대행수로 만들 거라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사미국 출신이라는 게 좀 걸리긴 했다. 하지만 벽씨 상단은 동해를 통해 들어오는 무역품을 유통하는 것을 주력 사업으로 삼는 곳이었다.

사미국은 예락에 들어오는 향신료의 대부분을 수출하는 나라다. 상단에 사미국 출신이 있는 것도 나름대로 유리한 일이었다.

물론 여울은 제 입으로 자신이 사미국 출신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지만 다들 당연히 그럴 거라 취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가진 자가 있었다.

젊은 부행수는 오래 전부터 벽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상단을 물려받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는 경환이 먼저 점찍어 둔 사위 후보였다. 집안은 한미하지만 천민 출신은 아닌데다, 일처리가 뛰어나고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부행수는 그것을 알고 예전부터 벽미향에게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미향은 부행수를 친근하게는 여겼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단 나이가 그녀보다 너무 많았다. 그녀에게 그는 삼촌처럼 느껴졌다.

벽경환도 부행수를 사위로 맞기에는 꺼려지는 점이 있었다.

나이차도 나이차거니와 그와 결혼한다면 벽씨 상단이 완전히 부행수에게로 넘어가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미향에게 부행수는 너무 노련한 상대였다.

여울은 이런 사정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하며 인간들 사이에서 적응하고 있었다. 상대의 말을 의심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을 적당히 감추는 법을 익혔다.

미향은 약삭빠르고 손익 계산에 밝았다. 어릴 때부터 부유한 상인의 금지옥엽으로서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던 덕이다. 그녀는 여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네가 일부러 그럴 리가 없지.”

“무엇을?”

“방금 말한 거 말이야.”

미향이 짐짓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울을 흉내 내어 딱딱하게 말을 뱉었다.

“딱히 이 자리에 연연하진 않는다. 너를 호위무사로 삼아 달라고 말해 줄까? 그걸 원해서 이러는 것이 아닌가?”

성인도 안 된 것 같은 소년이 최측근 호위무사로 일하고 있으니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여울은 빙빙 돌려 가며 시비를 건 남자에게 방금 저런 말을 한 참이었다. 남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이를 갈고 사라졌다.

그걸 지켜보고 있었던 미향은 한숨을 쉬었다. 여울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쟤는 지금 너한테 질투를 한 거야. 거기에 대고 그렇게 불을 더 지르면 어떡해. 적을 늘리는 게 취미야?”

“내가 적을 늘렸다고?”

“알고 하는 말이었으면 귀찮은 놈 처리하기에 그만이긴 한데, 넌 모르고 한 것 같으니까. 너 그냥 진심으로 말한 거지?”

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향은 이마를 짚었다.

“솔직한 건 좋지만 적당한 거짓말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어떤?”

“저 사람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었으면 대충, 저도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란 말이야.”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네가 거짓말하기 싫어하는 건 알아. 그럼 침묵이나 돌려 말하는 걸로 때워.”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길다. 미향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이는 세로로 긴 동공이 신기했다. 이질적이다. 그녀는 그것이 무척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상상력은 다행히 이무기에게까지 닿진 않았다.

대부분의 이무기는 소룡전에서 태어나 왕족의 곁에 붙어 살다가 왕족이 죽으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밖의 사람들이 이무기를 볼 일은 없었다.

미향은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있잖아, 여울. 날 어떻게 생각해?”

“고용주.”

미향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그녀가 칭얼거리듯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여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고용주라고 생각하는데 감히 반말을 해?”

“존대가 익숙하지 않다.”

이무기는 보주 외의 존재에겐 존대를 잘 하지 않는다. 일국의 왕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미향은 그런 사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울이 보통 사람이 아닐 거란 생각은 들었다. 몇 번 출신을 물었지만 부모는 없다고 했고, 그 외에는 대답을 피했다.

아직 꿈 많은 소녀에겐 그런 그가 이국의 숨겨진 왕자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설레서 그녀는 뺨을 붉혔다.

미향이 우물거리다가 물었다.

“……날 싫어해?”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 좋아하느냐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대체로 거칠 게 없이 구는 그녀였지만 첫사랑은 수줍었다.

미향은 고민하다 다르게 물었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여울은 그녀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소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고 도와주고 있는 소녀였다. 그녀 덕에 많은 것을 배웠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고마웠다. 정도 들었다.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래.”

미향의 얼굴이 들떴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저기, 나와 있는 게 좋아?”

가끔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긴 해도 그녀와 함께 있는 건 편했다. 그녀는 여울이 당연한 것을 모르거나 이상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며 가르쳐 주곤 했기 때문이다.

여울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향은 벌어지는 입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여울의 손을 잡았다. 소녀는 생긋 웃었다.

“그럼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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