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슴 속의 나비2016.03.24.
반나절 정도가 흐르자 벌써 산중턱이었다. 길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온데다 말을 탄 것처럼 빠른 속도 덕분이었다.
여울은 해가 중천에 걸리자 걸음을 멈추고 서란을 내려 주었다.
그녀가 내려서다가 비틀거리며 순간 그의 옷깃을 쥐고 균형을 잡았다.
“어지러울 정도구나. 이무기는 다 이리 빠른 것이냐?”
“제가 무공에 집중해서 그렇습니다.”
“무공이 재미있었느냐?”
여울은 그녀를 앉히고 보자기를 펼쳤다. 자드락의 거처에서 만들어 온 주먹밥이 종이에 싸여 있었다.
그는 수통과 함께 주먹밥을 그녀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적성에 맞았습니다.”
“어떤 점이?”
“배우기 쉬웠습니다.”
“언제부터 배웠느냐?”
“첫 탈피를 끝낸 후부터입니다.”
“무공도 종류가 여럿이지 않느냐? 너는 검이 마음에 들었느냐?”
“그러합니다. 식사하시지요.”
서란이 주먹밥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여울이 계속 종이를 받쳐 들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면 충분하단다.”
그는 군말 없이 남은 것을 도로 싸서 챙겼다. 그녀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앉은 그가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서란은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했다. 시간이 급박하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야외에서 맨손으로 주먹밥을 먹는다는 상황이 내심 신기하기도 했다. 이끼가 낀 바위 위에는 개미가 기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지켜보며 손끝에 묻은 밥풀을 입에 넣었다.
궁이었다면 나인들이 기절할 듯 놀라고 상궁이 경을 쳤을 행동이었다. 어쩐지 즐거웠다.
“너는 안 먹느냐?”
“괜찮습니다.”
“교룡들이 식사를 잘 안 한다고 듣긴 했는데. 왜 그런 것이냐?”
“인간처럼 자주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덤덤하게 대꾸하며 눈을 뜬 여울은 약간 놀랐다.
그를 보고 있는 서란은 어린아이처럼 입가에 밥풀을 붙인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 너울을 벗어 놔서 훤히 보이는 주홍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둠이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빛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른 물음을 그대로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죽을 날을 받아 놓으신 분이 어찌 이리 밝으십니까?”
뱉어 놓고 보니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이었다. 여울은 내심 혀를 차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이번에도 웃음이었다.
“맞는 말을 해 놓고 왜 기가 죽느냐?”
“…….”
“여울.”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느새 일어나 그에게 다가온 그녀가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으냐.”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은 푸르렀다. 햇빛은 사납지도, 여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먹밥이 맛있었다. 물은 시원했고. 이래라 저래라 주의를 주며 지켜보는 사람들도 없구나. 밖에서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니라. 이러니 즐거울 법도 하지 않느냐.”
여울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서란은 눈까지 웃고 있었다.
“게다가 바다를 보러 가고 있으니. 그것이 기대가 되어 가슴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단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기쁜데 굳이 우울해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진심으로 웃는 얼굴에는 심장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여전히 입가엔 하얀 밥풀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여울은 조금 웃고 말았다.
서란은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며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짧게 보였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서 밥풀을 떼어 냈다.
그녀가 그것을 눈치 채고 한쪽 뺨을 감싸며 살짝 물러섰다.
창피한 꼴을 보였다. 귓가가 발그스름해졌다.
“봤으면 진작 말을 해 주지 그랬느냐.”
“무엇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저는 모르겠으나, 이리도 기대하고 계시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손을 당겨 쥐었다.
그는 움찔 놀라는 서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을 꺼내 수통의 물을 적시더니 그녀의 손을 닦아 주었다. 드러난 손목에 감겨 있는 흰 붕대가 거슬렸다.
“명하신 대로 반드시 바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어딘지 모르게 복종이 아니라 다짐처럼 들렸다. 서란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직 손이 닿아 있다. 그것을 자각한 그녀는 손을 놓고 물러나며 미소를 얼굴에 덮었다.
“그래, 고맙구나. 이왕이면 앞으로는 대답도 길게 해 다오. 너는 꼭 네 서간처럼 재미없이 말을 하느니라.”
“말이 적은 것이 살가운 것보다 좋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먼저 말을 붙이는 건 기대도 않을 테니 물으면 답이라도 자세히 해 주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여울이 수통을 챙기고 그녀에게 다시 등을 보였다. 서란은 길게 한숨을 쉬고 그의 등에 몸을 실었다.
“네가 말도 아닌데 이리 업혀 다니니 미안하구나. 내가 걸으면 많이 느릴 것 같으냐?”
“산을 내려가면 어차피 시선 탓에 이렇게 달리지도 못합니다. 말을 구해야겠지요. 탈 줄은 아십니까?”
“타 본 적이 없다.”
승마는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왕녀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말을 타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마니였기 때문에…….
여울은 잠시 멈칫했으나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차를 구해야겠군요. 도하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수로를 이용할 것입니다.”
수도 예경을 끼고 흐르는 흑룡강은 예락에서 가장 크고 넓은 강이었다. 그 강을 타고 수많은 배들이 오갔다.
도하는 소서촌에서 제일 가까운 강가의 대도시였다. 수도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예경은 와호산맥과 흑룡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강을 타고 입성해야 했고, 그러려면 도하를 거치는 것이 필수였다.
그렇게 도하에서부터 흑룡강을 타고 내려가면 서해에 닿는다. 여울은 그 뱃길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말이 더 빠르지 않느냐? 배우는 게 오래 걸릴까?”
그녀에게서 미세하게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여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리입니다.”
“그렇구나. 미안하다.”
그녀의 말끝이 처졌다. 그는 그녀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도록 속도를 높이며 작게 대꾸했다.
“보주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
자드락은 얼큰하게 술에 취한 채 동굴로 돌아왔다.
갈지자로 비틀리는 걸음이 영락없는 술주정뱅이였다. 풀어헤친 머리는 결이 좋았던 덕에 용케 엉키지는 않았다.
동굴 앞에서 야로와 온이 죽치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 가까운 밤중에 소서촌에 도착하여 자고 있던 주민을 깨워 자드락의 거처를 알아냈다. 하지만 동굴 안이 비어 있었던 터라, 내내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자드락을 본 야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이무기 꼴이 저게 뭐야! 완전 거지꼴, 아! 아파!”
온이 야로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바로 제 손을 빤히 보았다. 야로의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던 것이다.
야로가 씩씩거리는 얼굴로 온을 올려다보았다. 사과하기도 뭣하여 온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자드락이 소란한 그들을 보더니 비실비실 웃었다. 술 냄새가 그들에게까지 훅 끼쳐 왔다.
“너무 마셨나, 이무기들이 보이네?”
“자드락 선배, 처음 뵙겠습니다.”
온이 앞으로 나서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는 보주 외에는 존대를 잘 하지 않는 이무기들 중에서 꽤 공손한 편이었다.
자드락이 어린애처럼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었다.
“누구냐, 넌?”
“제녕교룡, 온이라 합니다. 이쪽은 야로, 화련교룡입니다.”
야로는 심통이 났는지 고개만 까닥였다. 자드락이 옷자락 사이로 배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했다.
“교룡? 교룡들이 이 유배지까지 무슨 일로 왔지?”
“마니와 마니의 교룡을 보았습니까?”
온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무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돌려 묻거나 탐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드락은 입을 헤 벌렸다.
“마니? 웬 마니? 내 마니는 죽었는데.”
그가 키들키들 웃었다. 흔들리는 어깨나 머리카락 사이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면 광인이 따로 없었다.
야로는 질색하는 얼굴이 되어 슬그머니 온 뒤쪽으로 피했다. 온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번 대의 마니를 교룡이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교룡은 저보다 약간 큰 키의 남성 이무기입니다. 머리가 짧고 오른쪽 손등에 흉터가 있습니다. 마니는 이 정도 되는 키의 여인입니다. 본 적, 있습니까?”
자드락은 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이로 물었다. 그는 부러 더 크게 뜬 눈으로 그들을 직시했다.
“아니, 본 적 없다.”
그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내내 발음이 꼬이고 있던 터라 이상하지는 않았다.
온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야로가 대놓고 짜증을 냈다.
“뭐야, 꽝이네. 희나리 쪽으로 가야 하나.”
“꼬마 교룡아, 그거 물어보러 온 거야?”
자드락이 비실비실 웃으며 다가와 야로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 했다. 야로가 잽싸게 피하는 바람에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온이 휘청 무너지는 자드락을 잡아 세워 주었다. 술독에 빠졌다 왔는지, 닿은 손에서까지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자드락은 제자리에서 몸을 흔들다가 나무를 잡고 기대듯이 주저앉았다. 온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흰 가 보겠습니다.”
“술 좀 줄여, 선배. 아무리 이무기라도 그러다 큰일 난다.”
야로가 흙바닥에 퍼져 앉은 자드락을 흘겨보며 말했다. 자드락은 듣는 둥 마는 둥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앉은 자세 그대로 웩하고 참았던 피를 토해 냈다.
“아, 빌어먹을. 진짜 더 했다간 뱀 되겠네.”
자드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흐른 피를 대충 훔쳤다. 손등에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뱉은 거짓말의 반동이었다.
그는 나무를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동굴 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갔다.
목덜미를 타고 비늘이 두두둑 일어났다. 중간중간 멈추어 숨을 고르고서야 그는 바라던 물건에 닿았다.
부적과 진을 둘둘 둘러놓은 것을 찢어발기고 목갑을 열었다. 서란의 피가 담긴 호리병이 그 안에 있었다.
자드락은 더듬더듬 호리병을 열고 피를 몇 모금 들이켰다. 그대로 축 처진 채 한참을 늘어져 있으니 피부에 돋았던 비늘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거칠던 호흡도 조금씩 안정되었다.
자드락은 호리병을 닫아 목갑 안에 던져 넣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온몸이 작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그는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냈다.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잘 좀 해 봐라.”
자드락은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고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
해가 저물며 노을이 드리웠다. 산을 두 개나 타 넘으니 슬슬 평지에 가까워졌다.
야숙을 하는 편이 안전했지만, 여울은 제 보주가 걱정되었다. 몸살기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예민한 후각으로 장작이 타는 냄새를 잡아냈다. 근처에 화전민촌이나 민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 보니 야트막한 숲 속의 공터에 옹기종기 붙은 너와집이 셋 정도 있었다.
집들 사이에 텃밭이 있고 벽과 울타리에는 말린 약초나 토끼, 꿩 등이 걸려 있었다. 텃밭 근처에서 비쩍 마른 닭이 병아리 몇 마리를 데리고 지렁이를 잡아먹는 중이었다. 사냥꾼의 집인 듯했다.
여울은 민가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에서 서란을 내려 주었다.
“하룻밤 머물기를 청해 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서란이 너와집들 쪽을 보았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려는 여울의 옷깃을 잡았다.
“집 안에서까지 면사를 쓰고 있으면 이상할 것이다.”
서란이 면사를 벗어 곱게 접어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짓했다.
“교룡의 띠, 가지고 있지? 그것을 빌려 다오.”
“이것 말이십니까?”
여울이 품에서 띠를 꺼냈다. 무늬가 없는 검은 천이었다. 뒷면에 ‘화예’라는 글자가 수놓인 그것은 여울이 그녀의 교룡임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서란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그것으로 제 눈을 꽁꽁 싸매 완전히 가렸다.
“보주?”
“장님이라 하자. 관계는, 음, 부부라고 하는 게 좋겠구나.”
“말도 안 됩니다!”
“너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니라. 너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라. 내 알아서 하마.”
댕기를 땋지 않아 흐트러져 있던 검은 머리를 서란이 손으로 헤집었다.
눈을 완전히 가린 그녀가 여울을 찾듯이 허공에 팔을 저었다.
기가 막혀 굳어 있던 여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목에 감긴 붕대가 손끝에 걸렸다.
검은 천 아래에서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가자꾸나. 내 눈이 되어 주렴.”
여울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눈을 가린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는 몸은 온전히 그의 인도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그녀가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노을을 받은 뺨이 붉었다.
그 모습에 그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순간 이무기가 느껴서는 안 될 감정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다가 사그라들었다.
*
“뉘시오?”
인기척에 사립문을 열고 초췌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검은 옷에 검을 찬 커다란 키의 여울을 보고 경계하다가,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는 눈을 가린 작은 여인을 보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룻밤 묵어 갈 수 있겠소? 사례는 하겠소. 야숙을 하기엔 걱정이 되어.”
여울은 말끝을 흐리며 서란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가 닿았다.
“낭인이오? 사미국 출신? 그 여자는.”
“낭군님, 여기가 어디이옵니까?”
불안을 담고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가 났다. 서란이 겁에 질린 듯이 여울의 품에 파고들었다. 여울은 얼결에 그녀를 감싸안았다.
그 친밀한 모양새를 보고 남자가 알 만하다는 듯 픽 웃었다.
“부부요?”
“그래서, 머물 곳이 있겠소?”
부부냐는 물음에 확답을 할 수 없는 여울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은전을 꺼내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맞은편의 집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가마니 몇이 쌓여 있는 어수선한 방이었다.
“창고로 쓰고 있는데, 괜찮다면 묵어 가소.”
“고맙소.”
여울이 남자의 손에 은전 다섯 닢을 쥐여 주었다. 남자가 반색하며 받아 들었다.
“통이 크시구먼. 식사는 했소?”
“아직이오.”
“그럼 한 끼 대접하리다. 적당히 짐 풀어 두고 오시오.”
남자가 멀어졌다. 그때까지 그에게 딱 붙어 있던 서란이 슬쩍 떨어졌다. 그녀가 속삭였다.
“갔느냐?”
“예.”
“제법 괜찮지 않았느냐?”
짓궂은 미소가 서란의 입가에 떠올랐다. 여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수통과 장옷 등의 몇 안 되는 짐을 방에 던져 놓고 그녀를 이끌었다.
남자의 집으로 가자 주름진 얼굴의 아낙이 상을 들여놓고 있었다.
낡고 좁은 방은 네 사람이 들어가자 꽉 찬 듯이 느껴졌다. 나무상 위에는 삶은 감자와 나물반찬이 몇 있었다.
아낙은 인사를 던진 후 내내 조용했고 남자만 간간히 입을 열어 소소한 것을 물었다. 주로 어디를 다녀 보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울은 단답으로 대꾸하며 서란의 손에 수저를 쥐여 주고 감자를 잘라 반찬과 함께 올려 주었다. 눈을 가린 그녀가 서툴게 숟가락질을 하는 것을 가만 보던 남자가 물었다.
“눈은 어쩌다 그리 되었소? 보아하니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구먼.”
여울은 대답할 수 없었다. 서란이 조용히 답했다.
“사고를 당했어요.”
“저런, 젊은 처자가 어쩌다가.”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남자가 혀를 차며 물었다.
“혹시 요마한테 당했소?”
“네.”
“에잉, 망할 놈의 요마들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니. 이 근처에는 요마가 없어 그나마 안심이우.”
“요마가 없어도 이런 산중에 둘이 살면 위험하지 않나요?”
“굶어 죽는 것보단 낫소이다. 방납인이 여기까진 안 오거든. 이래 뵈도, 어이쿠, 처자는 안 보이겠지만, 내가 덫 놓는 재주는 좋아서 살 만하지.”
예락에는 조세와 군역 외에도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 상납 제도가 있었다. 평민이 특산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서 방납인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돈을 받고 공물을 대신 구해 주곤 했다.
방납인은 누구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 대 전의 임금인 중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며 자신의 공신들에게 방납을 독점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 특혜가 문제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공신 가문 방납인들의 수탈이 심각하여 마을에서 도망쳐 산에 숨어드는 백성이 흔해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한이 쌓였는지 침을 튀겨 가며 제 마을에 있던 방납인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읊었다. 서란과 여울은 별 대꾸 없이 그의 푸념을 들어 주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건너편 창고방으로 돌아왔다.
여울이 대강 바닥을 정리하고 남자가 내준 한 채뿐인 이불을 깔았다.
서란은 문을 단단히 걸어 닫고는 눈에서 천을 풀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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