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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2)화 (42/75)

52화

출구를 나오자마자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보는 눈이 있어 여전히 팔짱은 끼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는 확실히 어색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는!”

“내일은.”

아까 일을 변명하려던 희우와 현태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민망함으로 살짝 붉어진 희우와 다르게 현태의 얼굴은 편안하기만 했다. 조금 전의 일은 그의 기억에서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아까는?”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현태가 희우의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높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려던 말이 뭐예요? 내일은 뭐요?”

현태는 희우를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전히 높낮이 없이 건조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희우는 예전보다는 덜 거슬린다 생각했다.

“내일은 독고희우 씨가 데이트 장소를 정하는 날이야.”

업무 전달하는 상사 같았다. 말의 내용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희우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풉!”

“왜 웃지?”

“결재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결재 라인은 어떻게 되나요?”

“가고 싶은 곳이 결재를 받아야 하는 곳인가?”

현태의 진지한 질문에 웃음을 참는 것을 포기한 희우가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깔깔 넘어가는 희우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현태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도무지 희우가 저렇게까지 웃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웃는 이유가 저라서 꽤 기분이 괜찮았다. 다른 사람이 저 때문에 이렇게 웃었다면 분명히 화를 냈을 테지.

한참을 배를 움켜쥐고 부르르 떨고 있던 희우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아쿠아리움 가요.”

거기가 결재가 필요한 곳은 아닐 텐데. 특수한 아쿠아리움인가?

현태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뒤늦게 희우가 자신의 말투를 놀린 거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말투를 가지고 놀렸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물고기 좋아해요?”

“아니.”

“그럼 동물이 더 좋아요? 포유류?”

“글쎄.”

희우의 질문을 들으면서 자기가 뭘 좋아하긴 하나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돈 불리는 일뿐이었다. 다른 대상을 좋아한다거나 흥미를 가지고 바라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나?

현태의 시선이 희우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긴 했다. 예상했던 대로 움직였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예상이 불가능한 여자였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희우를 제일 먼저 반긴 건 고소한 빵 냄새와 향긋한 커피 냄새였다. 준비하지 않은 음식 냄새가 맡아질 때면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새삼 크게 다가왔다.

희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에는 잔뜩 부풀려진 갈색 곱슬머리와 퉁퉁 부은 눈을 한 여자가 있었다.

“마카롱이여?”

희우가 눈두덩이 위아래가 퉁퉁 부은 자신의 눈을 어루만지며 중얼댔다.

당장 부어버린 눈은 손쓸 방법이 없었지만 헝클어진 머리는 그래도 수습이 가능했다.

“그래도 머리는 빗자.”

희우가 화장대 위의 빗을 들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천연 곱슬인 희우의 머리카락은 아침마다 서로 엉키고 뭉쳐서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가 쥐어뜯기는 것 같았다. 머리를 다 빗고 나면 뜯겨 나온 머리카락이 빗에 가득했다.

머리숱이 많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드드득.

오늘도 여전히 빗질과 동시에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매직을 할까?”

희우는 곧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직을 하려면 미용실에 몇 시간은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아침마다 머리카락이 뜯기는 게 나았다.

대충 머리카락을 정리한 희우는 그대로 일어서려다 거울을 보며 눈곱을 떼어냈다.

“더러운 건 좀 그러니까.”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침 자국은 없는지, 베개 눌린 자국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상대방이 혐오감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지.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며 희우는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빵과 커피 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대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피 냄새에 반응하는 좀비가 떠오르는 건 왜지?

아니나 다를까, 현태가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주말 아침인데도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와이셔츠 대신 편한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정도?

반팔 티셔츠라도 비싼 건 다른지 운동으로 다져진 현태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흘러내렸다. 옷 아래 있는 잘 쪼개진 그의 근육이 저절로 상상이 되는 모습이었다.

희우는 경주에서 보았던 현태의 헐벗은 몸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억지로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빵 냄새가 너무 좋아요. 커피 마셔도 돼요?”

희우의 질문과 동시에 현태가 하얀 머그컵에 커피를 따랐다. 쪼르륵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커피가 컵 안에 담겼다.

하얀 컵은 곧 희우 앞에 올려졌다.

“벌써 나갈 준비 다 한 거예요?”

희우가 연달아 내온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 물며 물었다. 잘 구워진 빵에서 바사삭 소리가 났다. 희우는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희우가 반을 먹어 치울 동안 현태는 이제 한 입 먹고 우물우물 씹는 중이었다.

같은 빵을 먹는데도 분위기가 참 달랐다. 희우는 문득 빵을 우적우적 씹다 입가를 손끝으로 살살 닦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빵 부스러기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현태의 우아한 모습에 살짝 동경심이 느껴져 천천히 먹어봤다. 적어도 열 번은 씹자.

갑자기 먹는 속도가 느려진 희우를 흘깃 본 현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귀엽기는.

희우는 빵을 우물우물 씹다가 답답해서 우적우적 씹어 넘겼다.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한다.

늘 그렇듯 희우는 나갈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워낙 늦게 일어난 탓도 있었지만 꾸미는 데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걸을지도 몰라서 희우는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점검을 하던 희우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너무 좀 그런가?”

당장 화보를 찍어도 손색이 없던 현태의 모습을 떠올렸다. 옆에 서면 초라해 보일 게 뻔했다.

“기현태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희우가 옷장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작년 생일에 기우돌 회장님이 준 백화점 상품권으로 샀던 옷이 걸려 있었다.

매장의 옷을 이것저것 매치하던 저를 본 직원이 기겁하며 다가와 추천해 준 옷이었다.

잘 어울리라고 위아래 큰 꽃무늬 작은 꽃무늬로 맞췄었는데 직원이 한사코 반대해서 산 옷이었다.

지금 보니 이 옷도 꽤 괜찮은걸?

잠시 망설이던 희우가 옷장으로 손을 뻗었다.

치장까진 아니어도 나름 신경 써서 입었기에 현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희우는 내심 긴장됐다. 하지만 현태는 다른 날과 무덤덤한 표정으로 희우를 바라보더니…….

“나가지.”

하고 짧게 한 마디 할 뿐이었다.

희우는 무릎 아래서 화사하게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보면서 짧게 한숨을 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한숨을 쉬고 난리야? 옷은 내 자존감을 위해서 입은 거라고.

생각을 가다듬은 희우가 신발장 안에서 하얀색 캔버스를 꺼내 신었다. 구두까지는 오바다, 나름 정한 선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아쿠아리움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가족 단위나 커플들이 대부분이었다.

“와~ 엄마, 저거 봐!”

지나가던 아이가 천장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뱉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 위로 제법 큰 상어가 유유히 헤엄을 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희우의 눈도 저절로 상어를 따라 움직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이들 통솔하느라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여유 있게 둘러보다니! 희우는 새삼 기분이 들떴다.

사방이 물과 생선으로 가득한 곳에서 현태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딱히 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희우는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 손을 뿌리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몇 번 와 봤다고 하지 않았나?

현태는 신기한 반응을 보이는 희우가 신기했다.

“우오오오오! 저 물고기는 엄청 희한하게 생겼네요.”

현태가 보기엔 다 비슷비슷한 물고기였다.

하지만 희우는 자리를 옮겨갈 때마다 매번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물고기보다 희우를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이 물고기는 이름 부르는 것도 쉽지 않겠어요. 그런데 좀 불쌍하긴 하다. 평생을 여기 갇혀 있어야 하니까.”

조금 전까지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것과는 살짝 달라진 눈빛이었다. 더 팔딱거리는 느낌이었다.

저 여자는 알까? 자신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걸.

현태 주변엔 저렇게 많은 표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가장 다채로운 표정을 가진 사람이 수정이었는데 희우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수정은 웃는 모습 말고는 보여준 적이 없었다. 싫은 소리도 한 번 하지 않았었지.

수정에 비하면 많이 웃지도 않는 여자였다. 그런데 왜 저 여자가 웃을 땐 반짝반짝 빛이 날까. 왜 따라 웃고 싶어질까.

현태는 수족관 유리에 이마를 딱 붙이고 있는 희우를 보며 상념에 빠졌다.

넓게 벌린 양팔만큼이나 커다란 가오리가 머리 위를 유유자적 지나갔다. 이름을 모르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은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다녔다.

물고기가 내달리는 속도에 맞춰 희우의 시선이 빠르게도 느리게도 움직였다.

“기현태 씨, 이 물고기 이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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