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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6)화 (73/75)

46화

운동을 가거나 마사지를 받으러 갈 시간이었지만 수정이 서 있는 곳은 S모텔 503호 앞이었다. 어두운 카펫이 깔린 바닥 위에서 수정의 아이보리색 구두가 유난히 반짝였다.

3년 전, 현태가 생일 선물로 사 준 구두였다.

한참을 서서 망설이던 수정이 막 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안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

“앗!”

깜짝 놀란 수정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객실 안에 서 있던 사람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야구 모자 아래 드러난 눈빛이 유난히 번들댄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침한 분위기와 달리 꽤 다정한 목소리였다.

수정이 복도 좌우를 살핀 후 객실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자 열려 있던 문이 텁!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객실은 무척 좁았다.

슈퍼 싱글 사이즈 침대 하나와 싸구려 테이블이 전부인 방 안에서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 방 안에서 피운 것 같진 않으니, 남자의 몸과 그의 소지품에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철제로 만들어진 의자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고, 낡은 카펫에는 지워지지 않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뚜껑 없는 플라스틱 휴지통 주변엔 둘둘 말린 휴지 뭉치가 굴러다녔다.

수정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을 흘깃 쳐다본 남자가 이죽댔다.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의자에 앉은 수정은 최대한 인상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쿠션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은 의자에서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저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먼저 연락해서 좀 놀랐어요.”

남자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쓰고 있던 까만 야구 모자를 벗었다. 수정은 생각보다 앳된 목소리와 선해 보이는 인상에 내심 놀랐다.

겉모습만 본다면 법 없이도 살 사람 같았다.

소를 닮은 커다란 눈망울은 눈꼬리가 축 처졌고, 숱이 없는 눈썹은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었다. 동그란 코와 웃을 때마다 움푹 파이는 보조개까지 남자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맞아?

수정은 기현아가 잘못된 정보를 저에게 넘겨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의 혼란은 곧 이어진 그의 말에 가볍게 부서졌다.

“우리 희우가 날 두고 결혼을 했지 뭐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희우는 아직도 날 사랑하고, 나도 희우를 사랑하니까. 우리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었는지 기현태는, 몰라요.”

남자는 현태의 이름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수정은 팔에 돋은 소름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것 같네요.”

수정은 마주 앉은 남자 못지않게 순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남자의 손은 마치 양서류의 것처럼 말랑하고 축축했다. 당장에라도 떨쳐 버리고 싶었지만 수정은 오히려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를 응시했다.

착한 척하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눈앞에 앉은 사이코패스 새끼보다 훨씬 더.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과 독고희우 씨 사랑이 이어지도록. 내가 알기론 독고희우 씨도 집안의 강요로 억지로 한 결혼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그의 동공이 광기를 입고 더 번들댔다.

“그렇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우리 희우가 나를 떠날 리가 없지.”

해맑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망상하는 그를 보며 수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나도 그 여자한테서 얻을 게 좀 있어요. 우리 서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김남후 씨?”

수정의 말에 남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출근 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지만 혜정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여유롭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던 혜정은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거 그 남자 차 아니야?”

저를 보러 온 건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비슷한 차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유심히 보는데 차창 안으로 그의 실루엣이 언뜻 비쳤다.

“맞잖아?”

혜정은 반가운 마음에 현태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살포시 어여쁜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에 공들여 드라이를 한 보람이 있었다. 탱글탱글 잘 말린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현태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다 저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지난번 주차장에서 봤던 사람이었다. 여기 선생이라고 했었지.

희우의 직장 동료였기에 현태는 차를 몰아 나가면서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외조를 잘하는 착실한 남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 좋게 교실로 들어선 혜정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을 열어 연예 가십 기사를 검색하는데 아이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혜정은 익숙하게 화면을 내리고 대신 어제 바탕화면에 다운받아 놓은 학습지 파일을 클릭했다.

“선생님.”

“응? 무슨 일이니?”

혜정이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이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6학년인데도 잘 씻지 않는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저 역할 활동 다 했어요.”

“그래, 상희야, 수고했어.”

다른 아이 같으면 잘했다고 머리라도 쓱쓱 쓰다듬어 줬을 텐데 기름이 앉은 아이의 머리를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상희는 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우물쭈물 자리로 돌아갔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물어보기 귀찮았다. 급한 일이면 말하겠지. 뭐. 혜정은 다시 인터넷 화면을 열었다. 그때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르르-

교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경험상 아침에 오는 교실 전화는 안 좋은 일일 가능성이 80프로였다. 혜정은 받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6학년 2반입니다.”

-옥혜정 선생님, 교감 선생님께서 찾으십니다.

교무 행정원이었다. 혜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저절로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무슨 일로요?”

싸한 기분에 혜정은 살짝 긴장됐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내려오라고만 하시네요.

“교감 샘 기분은 어때 보여요?”

-아하하, 글쎄요. 빨리 오세요.

교감이 옆에 있는지 교무 행정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침부터 왜 오라 가라야. 바빠 죽겠는데.”

혜정이 전화를 끊은 후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무실로 내려가던 혜정은 마침 계단을 오르던 희우와 마주쳤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희우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혜정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우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혜정을 발견했다. 혜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희우는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를 싸악 지웠다.

이젠 반가운 척도 안 하네.

희우가 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 자격지심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저보다 더 잘살고, 더 예쁘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으니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거라고.

“아니. 그런데 어디 가?”

희우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어디 가는지 궁금했다.

“교감이 부르네.”

“왜?”

“모르지. 또 뭔 잔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너도 교무실에서 오는 길이야?”

“응.”

아침부터 교장실로 불려가 온갖 칭찬은 다 듣고 왔지만 교무실에도 잠깐 들렀다 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칭찬이라 달갑지도 않았고.

“그래? 교무실 분위기 어때? 교감 기분은 괜찮아? 나도 지금 불려가는 길이거든.”

희우도 불렀다니 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아 혜정은 안심이 됐다.

“별일 없던데?”

교무실 분위기를 살필 시간도 없었다.

“그래? 별거 아니면서 꼭 사람을 오라 가라 귀찮게 하더라. 그냥 메신저 보내거나 전화로 말하면 될걸, 사람을 불러다 세워 놓고 말해야 뭐라도 된 것처럼 느끼나 봐. 짜증 나. 아, 가다가 우리 반 시끄러운지 한 번만 봐줘.”

영문을 몰라 살짝 걱정이 됐지만 희우의 말을 듣고 별일 아니라는 생각에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혜정은 일부러 밝게 인사하며 교무실로 들어왔다. 안 좋은 일이 있다 한들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기는 힘든 법이니까. 게다가 정환이 저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뻔뻔하기도 하지.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가끔 이용해 먹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만난 교감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사소한 일은 아니겠구나 짐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찌그러진 토마토처럼 생긴 사람이 인상까지 쓰고 있으니 분위기가 더 험악했다.

옆에는 교무가 얼굴을 찡그린 채 팔짱까지 끼고 서 있다가 혜정을 발견하곤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었다.

“옥 선생님 오셨어요? 교감 선생님이 아까부터 기다리셨어요. 오늘 좀 늦으셨나 보다.”

지각한 걸 알았나? 그런데 그게 뭐? 이렇게 부를 일인가?

혜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교감 선생님 자리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교통체증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옥혜정 선생님. 근무 시간에 백화점에 간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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