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매장을 나온 후로 현태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평소보다 발걸음도 빨랐다.
“좀 천천히 걸어. 뭐가 그렇게 급해?”
수정이 현태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아이처럼 징징댔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지,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현태는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수정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다.
이러면 하는 수 없지,
수정은 멈춰 서서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현태야! 나 힘들어. 천천히 가! 다리 아파.”
거침없이 직진하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수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정지화면처럼 서 있는 현태 옆으로 다가갔다.
느리게, 느리게. 네가 나를 기다려 주나 안 기다려 주나 확인하면서.
끝까지 안 돌아보지.
수정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는 현태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그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가면 되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현태와의 거리를 좁혀가며 수정이 시리도록 예쁘게 웃었다.
* * *
집으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훌쩍 지나 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던 현태는 센서 등만 깜빡 들어오는 조용한 현관에 잠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제 쪽으로 잡아당기려 했는데 되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천하장사 납시셨어. 아주.
괜히 현관에서 방으로 가는 길에 쿵쿵 크게 발소리를 내며 걸었지만 희우의 방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결국 한참을 희우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현태는 아무 성과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짜증 나게 편안한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현태는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린 후 희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 서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나아졌다.
똑똑-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똑똑-
“일어났어?”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심지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한 현태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잠겨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방문은 쉽게 열렸다.
“출근했나?”
출근하기엔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문을 열었지만 방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 몸을 숨길 곳이라곤 없었지만 현태는 방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살짝 흐트러진 침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외투,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은은한 단내.
현태는 저도 모르게 킁킁 냄새를 맡다가 갑작스레 짜증이 솟아 문을 닫고 나왔다.
개도 아니고 뭐 하냐, 진짜.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 * *
희우는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도착하지 않은 학생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 성현이 어머니. 성현이 출발했나요? 네, 그러면 곧 도착하겠네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도 돼요?”
“안 돼! 어제 자리 정했잖아!”
희우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반장 말대로 어제 우리가 정한 자리에 앉자. 알겠지?”
혹시라도 자리 때문에 마음 상하는 아이가 있을까 봐 제비뽑기로 미리 자리를 정했다. 아이들의 불만은 조금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곧이어 성현이 헐레벌떡 버스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길 건너편에서 성현 엄마가 미안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희우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희우는 6학년 카톡 방에 학생 모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와! 출발한다!”
버스가 드디어 출발하자 아이들의 설레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희우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배웅을 나온 교감, 교무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안전벨트를 맸다.
“민호! 안전벨트 풀지 마.”
벨트 검사를 받자마자 다시 푸는 민호를 발견한 희우가 눈을 부릅뜨며 경고했다.
“벨트 하면 답답해요.”
“벨트 안 하면 출발 못 해.”
희우가 자리에서 일어설 기색으로 눈을 부라리자 민호는 하는 수 없이 까만색 벨트를 주욱 잡아당겼다. 볼록 나온 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까만 줄을 보며 희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희우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아침에 인사도 못 하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쯤이면 출발한 걸 알았을 텐데 잘 다녀오라는 문자 한 통 없었다.
서운해하지 말자.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희우는 현태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눈을 감았다.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났더니 눈꺼풀이 무거웠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주름치마 같은 커튼으로 막으니 시린 눈이 편해졌다.
왜 차만 타면 잠이 오는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희우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희우에게선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다. 어젯밤에 못 보고, 아침에 출근하는 모습을 못 봤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허전했다. 중요한 일정을 빼 먹은 기분이랄까.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현태를 본 비서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현태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닙니다. 어디까지 했죠?”
“네, 신제품 개발팀에서 올라온 기획안을 보시면…….”
김 비서가 빠르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잠시 희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럽던 현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집중했다.
* * *
하루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희우는 묵직한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아프세요?”
희우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이슬이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냥 몸살기가 좀 있나 봐. 심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요.”
희우는 괜히 이슬이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이슬은 걱정을 사서도 하는 사람이었다. 희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시에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헉! 쌤! 이마가 따끈따끈해요.”
어쩐지, 오한이 들더라니.
구급함에 있는 약이라도 꺼내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슬이 자기 가방을 뒤적여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이거 몸살감기약이에요. 드시고 일찍 주무세요. 내일 일정도 있는데 아프시면 어떡해요.”
“약도 가지고 다녀?”
희우는 이슬의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덕분에 편안하게 약을 먹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네, 혹시 몰라서요. 진통제랑 파스, 그리고 압박붕대도 챙겨 왔어요.”
“구급함에 다 있잖아. 그런데도 따로 챙겨 왔어요?”
보건 선생님이 출발 전에 각 반에 챙겨 준 구급함엔 웬만한 약품은 다 들어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많고 준비성이 철저한 이슬은 따로 비상약을 챙겨 왔다.
“네. 급하게 필요할까 봐요.”
부끄러운지 이슬은 양 볼이 살짝 붉어졌다. 이쯤에서 희우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설마 수저도 챙겨 온 건 아니죠?”
“헉! 어떻게 아셨어요? 저 제 수저 챙겨 왔어요.”
“김치 안 챙겨 온 게 다행이네요.”
“헤헤. 해외에 나가는 게 아니니까요.”
이슬은 민망한지 괜히 소리를 내며 웃고 나서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따라와 내밀었다.
이슬이 건네준 약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니 약 기운과 피로 때문에 잠이 쏟아졌다. 버스 안에서도 내내 잤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선생님, 남편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선보신 거예요?”
“으응. 비슷해요.”
희우가 느리게 답했다.
“그럼 언제 이 사람이 내 반쪽이다 확신하셨어요?”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슬보다 결혼에 대해 더 많이 알 것 같지 않았다. 저가 한 거라곤 준비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입장한 게 전부였으니까.
“글쎄.”
희우의 목소리가 더 늘어졌다. 이슬이 준 약이 효과가 있는지 아픈 건 덜했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졸음이 밀려왔다. 몸이 이불 속으로 혼곤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질문 몇 개가 이어졌다. 뭐라고 웅얼웅얼 답했던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질문에 한참 동안 답이 없는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슬이 조용히 일어나서 희우의 이마를 만졌다.
“다행이다.”
약을 챙겨 오길 잘했다고 뿌듯해하며 이슬은 조용히 일어나 불을 껐다. 희우가 깰까 봐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걷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 안은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캄캄했다.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간. 희우의 퇴근 시간은 벌써 지났다.
아무래도 전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띠이이이- 띠이이이이-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현태는 벌떡 일어나 인터폰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네”
-경비실입니다. 사장님, 504호에 꽃 배달이 왔어요.
경비원은 빌라에 사는 모든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현태는 몇 번이나 정정해 주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뭐가 왔다고?
“꽃 배달이요?”
문득 얼마 전 희우가 가지고 들어왔던 수국 꽃다발이 떠올랐다. 곧게 뻗어 있던 짙은 눈썹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네, 사모님 앞으로 온 것 같은데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하아!”
현태는 인터폰을 끊은 후 표정이 복잡해졌다.
학교로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에까지 꽃바구니를 보낸다는 건 집 주소를 알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태는 복잡한 심경으로 문을 열었다.
경비원이 가지고 온 건 탐스러운 수국이 가득 피어 있는 꽃바구니였다. 하지만 수국 보다 현태의 시선을 더 잡아끄는 건 꽃 사이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카드였다.
현태는 경비원에게 꽃바구니를 건네받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주욱 빠졌다.
현태는 잠시 바구니를 노려보다가 카드를 꺼내 겉봉투를 거칠게 뜯었다.
지이이익-
앙증맞은 분홍색 편지 봉투가 우악스러운 손에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