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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32)화 (32/75)

32화

영운이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갖다 대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아들이 이런저런 말썽을 피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사춘기의 흔한 반항쯤으로 여겼다.

아이들이 크면서 그 정도 말썽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와이프의 말에 의하면 새파랗게 젊은 선생이 편견을 가지고 아들을 대한다고 했다.

“아니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에요.”

“뭐? 그걸 그대로 뒀어?”

평온하던 늘어져 있던 영운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순해 보이기만 하던 그의 인상이 순식간에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설마요. 이미 김 기자랑 연락도 했고, 교육청에도 민원 넣었어요. 변호사 말로는 정서적 아동학대로 몰아갈 수 있대요.”

“잘했네.”

상우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어디 가서 기가 죽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파티장 입구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누가 왔나 봐요!”

와이프가 고개를 쭉 내밀고 파티장 입구를 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잠잠하던 파티장이 시끄러워지는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덩달아 고개를 돌렸던 영운은 사람들 무리 가운데 머리 하나는 삐죽 솟아 있는 현태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공들여 차려입은 옷매무시를 급하게 가다듬었다.

“본부장이야.”

“헉! 그 회장님 손자분이요?”

남편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인물이라 덩달아 긴장이 됐다. 비싼 돈 주고 차려입었으니 부유하고 여유 있어 보여야 했다.

“잘 보여야 하니까 가서 사모님께도 인사 잘하고. 알겠지.”

“나보다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데.”

멀리서 봐도 본부장 부부는 저보다 한참은 더 어려 보였다.

막내 동생뻘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가서 비굴하게 굴어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의 회사 생활이 저 본부장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와이프가 목소리로 툴툴거리자 영운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철딱서니 없기는. 우리랑 레벨이 다른 사람들이야. 나이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무조건 잘 보여야 해. 알겠어?”

영운이 입고 있는 옷을 가다듬으며 거듭 강조했다.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남편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온갖 더러운 꼴을 견디며 이 자리에 올라온 남편이었다. 그래,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알겠어요. 잘할게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의 승진이 무엇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본부장 부부는 이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 앞으로 잘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본부장 부부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선영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열심히 잘 따라 걸어오던 아내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 버리자 잔뜩 긴장해 있던 영운이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안 그래도 차례가 밀릴까 봐 마음이 바빠 죽겠는데 아내까지 굼뜨게 행동하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물론 화장을 진하게 해서 얼굴이 하얗긴 했지만 평소의 안색과는 달랐다. 느낌이 싸했다.

“저기…… 본부장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예요?”

선영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면 몰라? 사모님이겠지. 왜?”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당신이 저분을 어디서 봐? 지금까지 회장님이 꼭꼭 숨겨 두고 있던 며느리라고. 기자들도 오늘 처음 보는 걸 텐데.”

영운은 괜한 소리 말라며 아내를 끌었다. 선영은 본부장 부부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도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그래. 재벌가 사모가 왜 초등학교 선생 같은 걸 하고 있겠어.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아닐 거야.

선영은 속으로 거듭 생각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부장 부부 앞에 섰다.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먼저 아는 척을 해 온 사람은 바로 희우였다.

“상우 어머니?”

선영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니, 저 여자가 여기서 왜 나와?

선영이 당황해하는 만큼 남편도 어찌 된 영문인 줄 몰라 눈만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멋대로 생각하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 사모님하고 아는 사이였어? 왜 말을 안 했어? 허허허! 본부장님, 안 사람들끼리 원래 알던 사이였나 봅니다. 전 전혀 몰랐는데. 하하하!”

근처에 있는 사람들 들으라는 듯 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남편 때문에 선영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내의 속도 모르는 영운은 기분이 좋아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자고로 이런 건 널리 널리 자랑을 해 줘야 했다.

“여보, 목소리 좀 낮춰요.”

선영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조용히 말했지만 눈치 없는 영운은 계속 껄껄대며 크게 웃느라 바빴다.

현태야말로 희우가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리라 예상치 못하고 있던 터라 깜짝 놀란 참이었다. 희우가 이런 방면으로 발이 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서 안심을 했지만 현태의 생각은 곧 바뀌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희우의 눈빛에 반가움이라고는 일절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랄까?

현태는 부러 희우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물었다.

순간 스킨십에 대한 조항이 번쩍 떠올랐지만 장소와 상황 때문에 희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즉시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뱀 같은 조항. 이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는 현태의 교활함에 희우는 혀를 내둘렀다.

언젠가 저도 그 조항을 역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현태의 질문에 영운도 궁금한지 싱글벙글 웃으며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돌아본 것과 다른 아내의 표정에 영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선영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운의 시선은 빠르게 맞은편에 서 있는 본부장의 와이프에게 돌아갔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서 있는 아내와 달리 본부장의 와이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눈치만 살살 살피고 있는데 본부장 와이프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학부모님이세요.”

“예?”

목소리가 크게 튀어 나간 건 영운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모일 만큼 제법 큰 목소리라 영운은 뒤늦게 잔뜩 몸을 웅크리며 아내를 쳐다봤다.

학부모라니? 누구의 학부모라는 말이지?

모든 사고가 뻣뻣하면서도 느리게 흘러갔다.

“상운이 담임 선생님이셔.”

쭈뼛대던 선영이 눈을 질끈 감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손까지 공손하게 모았지만 이 난관을 벗어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오지 말걸.

“뭐? 상운이 담임? 그 싸……!”

하마터면 그 싸가지 없다던, 이라는 말을 끝에 붙일 뻔했다. 영운은 특유의 노련함으로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머리를 팽팽 굴렸다.

시작은 정말 엉망진창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을 해야 했다.

계산을 끝낸 영운이 최대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선생님 말이라면 끔뻑 죽는 학부모처럼 말이다.

“아이고, 이런 인연이 다 있습니까? 사모님께서 우리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시라니요. 정말 보통 인연은 아닌 모양입니다. 하하하.”

억지로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목소리가 작았다.

딱 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데 몰랐다고? 이런 눈치 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아내를 파티장 밖으로 끌고 나가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꼭 참았다. 지금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상운이 담임과 아들, 그리고 아내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본부장이 알고 있느냐, 없느냐가 제일 큰 문제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봐선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하긴, 우리가 상우 부모라는 것도 방금 알았으니 본부장이 알고 있을 리도 없지.

빠르게 머리를 회전한 영운은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초조해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우리 아들이 졸업 전에 담임 복이 터졌나 봅니다. 사모님처럼 훌륭한 분을 다 만나다니요. 그렇지 않아도 상운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선생님 자랑을 합니다. 너무 좋으신 분이라고요.”

영운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현태의 얼굴에 가 있었다.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아내와 희우의 사이를 왔다 갔다 했지만 다행히도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다행이군요. 전 또 아내의 교육방식에 불만이 있으신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높낮이 없이 기사를 읽듯 뱉어낸 현태의 말에 영운은 눈앞이 아찔했다. 본부장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놀라긴 희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현태에게 이런저런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학생 이름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만 보고 그 진상 학부모가 두 사람이라는 걸 알아낸 것이다. 눈치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 왜 하수정 마음은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작은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오는 수정의 존재감이 거슬렸다.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잊을 만하면 툭툭 튀어나왔다.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들도 아내도 사모님, 아니, 선생님께 무척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학 온 아들이 적응 잘 할 수 있게 얼마나 신경을 써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그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작아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있는 아내를 씩씩대며 노려봤다.

아무래도 집에서 부부싸움 나겠군.

희우는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럼 교장실에서 하셨던 말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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