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2)화 (22/75)

22화

희우는 바구니 안에 카드라도 있나 싶어 열심히 뒤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꽃바구니를 보낼 사람은 기현태 말고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담기지 않은 꽃바구니라고 해도 일단 기분은 좋았다.

“받고 입 싹 닫는 건 실례겠지?”

희우는 수국 꽃바구니를 책상 위에 보기 좋게 올리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꽃바구니 고마워요. 이런 걸 보내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감사합니다? 너무 딱딱한가?”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희우가 적던 것을 멈추고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그렇다고 이모티콘을 보낸다거나, 감동했다거나 하는 내용을 적기엔 뭣했다.

잠시 고민 끝에 희우는 처음 작성했던 메시지와 방금 찍은 꽃바구니 사진을 함께 현태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한참이 지나도 카톡 옆에 붙은 숫자 1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그래도 고맙다고 했으니까 뭐 나중에라도 읽겠지.”

꽃바구니를 옆으로 스윽 치우며 중얼댔지만 희우의 입꼬리는 한참 동안 위로 올라가 있었다.

살짝 기특한 것 같기도 했다.

* * *

현태가 희우의 메시지를 확인한 건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처음 희우에게서 받은 연락에 부드럽게 휘어졌던 현태의 입술은 내용을 확인한 후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꽃바구니를 보낸 적이 없었다. 혹시 비서가 보냈나 싶어 확인했지만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아무리 비서라도 자신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리는 없었다.

곧바로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고 답장을 써 내려가던 현태의 손이 멈칫했다.

수국 꽃바구니였다.

혹시 할아버지가?

잠시 기우돌 회장을 떠올린 현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희우를 친손주보다 더 예뻐한다 해도 꽃바구니까지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꽃바구니는 기우돌 회장님의 취향이 아니었다. 차라리 돈으로 꽃을 만들어서 준다면 모를까.

톡, 톡.

책상을 두드리는 현태의 긴 손가락이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었다.

* * *

빈 교실에 멍하게 앉아 있던 혜정은 조금 전 복도에서 꽃 배달부와 마주쳤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친구가 있었나?”

희우가 퇴근 후에 데이트를 간다거나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난 2년간 혜정의 남자친구가 세 번 바뀌는 중에도 희우는 전혀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선이라도 봤나?”

혜정은 유독 탐스럽던 수국 바구니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 중에서도 학교로 꽃바구니를 보내준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꽃다발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자신은 받아보지 못한 걸 희우가 받으니 배가 아팠다.

복도에서 처음 꽃 배달부를 마주쳤을 때 저한테 온 꽃바구니인 줄 알고 반갑게 다가갔던 것이 떠올라 더 짜증 났다.

물어보지도 않고 덥석 받아 든 후에야 독고희우에게 온 꽃 배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분이 나빠 밀듯이 다시 건넸지만 상한 마음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도 학교로 꽃바구니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뭐든 희우에게 지는 건 싫었다. 발령받은 첫해부터 희우는 신규답지 않게 학급 경영도, 공문 처리도 곧잘 해 내서 혜정과 알게 모르게 비교되곤 했다.

그때의 기억이 안 좋았기 때문일까? 새로 전근한 학교에서 희우를 다시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보다 왜 또, 하는 마음이 컸다.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났던 남자에게 애교 섞인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혜정은 문득 실내화 바닥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자리에 앉아 슬리퍼 바닥을 살폈다.

“이게 뭐야?”

실내화 바닥에 붙어 있는 건 작은 엽서였다.

혜정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실내화에 붙어 있는 작은 엽서를 떼어냈다. 엽서는 이리저리 끌려다닌 탓인지 원래의 색을 잃고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게 왜 여기 붙어 있어. 짜증 나게.”

혜정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엽서를 떼어냈다. 꽃바구니 사이에 끼어 있어야 할 엽서가 왜 슬리퍼 바닥에 붙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엽서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찰나 겉봉투에 적힌 글자를 본 혜정은 조금 전보다 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 안 어울린다.”

엽서 겉봉투엔 ‘말랑이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혜정은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엽서를 던지며 중얼거렸다.

“말랑이는 무슨. 틱틱대고 따지기만 하는데. 말랑이 다 죽었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잠그고 교실을 나왔다.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근사한 그 남자가 또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답이 없지?”

숫자 1이 사라졌는데 답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희우는 답장을 쓰지 못할 정도로 바쁜가 보다 생각하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꽃바구니 때문에 들떠서 집중을 못 한 탓에 수업 준비가 늦어졌다.

* * *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자리를 박차고 나온 현태는 집에 와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희우가 벌써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집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넓은 집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유독 휑했다. 현태는 냉수 한잔을 따라 마시며 휴대폰을 다시 꺼내 희우가 보낸 카톡을 다시 확인했다.

“수국 꽃바구니라…….”

희우가 수국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희우는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저가 보낸 게 아니라고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옹졸한 마음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는가.

최소한 거짓말은 안 했다고 합리화하며 현태는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들어가도 머릿속은 개운해지지 않았고, 찜찜한 기분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이나 마무리하고 올 걸 후회하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우였다.

현태는 하던 것을 멈추고 스르륵 일어나 현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희우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한 손에는 문제의 수국 꽃바구니를 들고서.

현태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 * *

수정은 계속 저기압이었다.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표정을 잔뜩 굳힌 채 사나운 기세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수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공 대리가 그녀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수정은 민구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수정의 목소리는 까칠했지만 민구는 그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수정이 처음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오던 순간부터 민구는 수정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봐도 눈길이 갈 만한 미인이었다. 모델처럼 늘씬한 키와 호리호리하면서도 볼륨감이 살아 있는 몸매는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날 것이다.

게다가 티 하나 없이 말간 피부와 유독 까만 눈동자, 그리고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희고 가지런한 이. 길게 늘어지는 결 좋은 머리카락. 그 어느 것 하나 민구의 이상형이 아닌 곳이 없었다.

수정은 신이 민구를 위해 그의 이상형을 인간으로 만들어 보내준 천사 같았다. 수정에게 반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공 대리님도 바쁘시잖아요.”

민구의 말에 희우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바로 답했다.

이제 그만 좀 성가시게 했으면 싶었지만 민구는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 팀원들과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제 할 일은 다 끝냈어요. 그래서 시간 많습니다.”

“그래요?”

그제야 수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민구를 돌아봤다.

커다란 눈동자가 미소를 머금고 저를 보니 민구는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민구는 수정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그럼 이 자료들 정리 부탁해도 될까요?”

수정이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파일 위에 빨간색 UBS를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

아……. 손가락까지 예쁘시다니!

민구는 수정의 빛나는 미소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네, 넵! 얼른 해 드릴게요. 연도별로 정리해서 분석하면 되는 거죠?”

“2020년도 이후 자료만요.”

“네! 얼른 해서 보내드릴게요.”

민구가 쌓여 있는 파일과 함께 USB를 집으며 신나서 말했다.

“그럼 부탁드려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수정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멀어지는 민구의 뒷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민구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부족한 것이 있어도 나중에 추가로 손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판 위에서 수정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수정의 머릿속은 미련 없이 퇴근하던 현태의 뒷모습으로 가득했다.

“하아…….”

결국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댄 수정은 깊게 한숨을 쉰 후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첩을 열어 현태의 결혼식 사진을 열었다.

몸에 딱 맞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현태는 기가 막히게 멋졌다. 그림 같은 그의 곁에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희우가 마네킹처럼 텅 빈 얼굴로 서 있었다.

원래는 제 자리여야만 했을 그곳을 바라보는 수정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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