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0)화 (20/75)

20화

“데리고 올라가세요. 선생님.”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됐는지 교감의 목소리는 전화로 자신을 불렀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교감까지 희우의 편을 들자 상우는 단번에 눈빛에서 공격성을 지우고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모두 상우를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더 난동을 피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상우는 교실로 잘 따라왔고 형식적으로나마 민호와 화해도 했다. 망가졌다던 샤프도 작동이 잘 됐다. 민호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안심한 듯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희우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교무 부장이 경고를 주긴 했지만 영 실속 없진 않았다.

-괜히 싫은 소리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니까. 독고 선생 생각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야.

전학 온 날부터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다니. 앞으로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상우의 행동을 봐선 그 애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우의 전화기는 집으로 오는 내내 잠잠했다.

막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할 때였다. 어딘가에서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응?”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텅 빈 복도엔 인기척은 없었다.

“아닌가?”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기분에 희우는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후 재빨리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삑삑 소리가 날 때마다 뒷머리가 괜히 쭈뼛 섰다.

“거기 누구 있어요?”

희우는 당장에라도 현관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텅 빈 공간을 보며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아아옹!”

그 순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희우는 현관문을 닫으려다 말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다가갔다. 그곳엔 새카만 털을 가진 고양이가 바둑알처럼 동그란 눈을 빛내며 희우를 빤히 쳐다보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어머! 너 여기 어떻게 있는 거야? 집이 어디니?”

희우가 고양이에게 손을 뻗으며 물었지만 고양이는 한 번 더 짧게 운 다음 다른 곳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안녕! 엄마 잘 찾아가!”

희우는 쫄랑쫄랑 달려가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든 후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고양이가 사라진 계단 아래에서 커다란 인영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들고 위를 살피는 모습엔 묘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까만 야구 모자 아래 호선을 그린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찾았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는 희우가 들어간 현관을 향하고 있었다.

* * *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현태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일어섰다.

-덕분에 아침 잘 먹었어요. 저녁은 제가 준비할게요.

희우가 했던 말이 미간 사이에 콕 박힌 것처럼 하루 종일 거슬렸다. 후 불어 떼어내고 싶었지만 끈덕지게 달라붙어 잊을 만하면 신경을 건드렸다.

귀찮아 죽겠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분주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빼꼼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사람은 수정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바빠서 아침에 인사한 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퇴근하고 한 잔 어때?”

수정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선약이 있어.”

현태가 컴퓨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수정이 문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을 짚으며 물었다.

수정이 아는 한 회식은 없었고, 현태의 성격상 사적 만남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슨 선약?

“우리 첫 출근인데 환영회 해야지!”

“다음에.”

“기현태 본부장님, 정말 서운합니다! 설마 아내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야?”

“약속했어.”

심장이 발끝으로 쿵 떨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수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서두르는 현태의 모습을 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자 중 현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저였다.

하기 싫은 숙제처럼 해치워 버린 결혼은 현태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그런데 왜?

“우와! 결혼하더니 이제 친구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남편 없는 사람은 서운해서 살겠나!”

책상 정리를 하는 현태를 보며 수정이 부러 우는소리를 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음에.”

수정이 징징대도 현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밖으로 사라지는 현태의 걸음엔 망설임 따위 없었다.

현태는 꽂히는 게 있을 때마다 거침없이 달려갔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가리지 않았고, 가지고 싶은 건 망가뜨려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현태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수정에게 저런 현태의 모습은 썩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귀국할 때만 하더라도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라곤 없는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변해 버린 태도에 예감이 좋지 않았다.

힘없이 떨어뜨린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수정의 공허한 목소리가 이미 닫힌 문에 부딪혀 힘없이 바스러졌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현태의 후각을 자극했다.

“왔어요?”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희우가 현관 쪽으로 마중 나와 어색하게 인사했다.

“네.”

인사를 받는 사람도 어색하긴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가 짧은 침묵 후 서둘러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현태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고, 희우는 저녁 준비를 마저 끝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이상한데…….”

마치 평범한 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희우는 괜히 앞치마에 손을 문질렀다. 혼자 있을 땐 입지 않던 앞치마였다. 이걸 왜 주워 입었는지 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칫국물 튈까 봐 입었지, 뭐.”

듣는 사람도 없는 변명을 중얼중얼하며 희우는 다시 싱크대 앞에 섰다.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풀던 현태도 기분이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몇 년 동안 텅 빈 집으로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본가에서 나와 혼자 살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상황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현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가니 식탁 위엔 제법 그럴싸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걸 다 차린 겁니까?”

겉보기와 달리 요리를 즐기는 타입인가 보다, 생각하며 현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내가 한 건 밥이랑 계란말이만요. 나머진 배달 요정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고 보니 퇴근하고 나서 뚝딱 차릴 수 있는 메뉴가 아니었다.

“이 동네에서 묵은지 찜을 제일 잘하는 곳이에요.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 맛있게 먹어요.”

희우가 입맛을 다시며 현태 맞은편에 앉았다. 김치찜을 바라보는 희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희우의 말대로 김치찜은 정말 맛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느껴본 건 오랜만이었다.

현태는 고개를 들고 희우가 먹는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맞은편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어먹었는지 양 볼을 햄스터처럼 불룩하게 부풀린 채 우물대고 있었다.

“혼자 먹을 때도 그렇게 먹습니까?”

“음?”

입 안에 음식이 있어 차마 똑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희우가 눈을 깜빡였다. 현태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먹는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뜻인가?

대답을 하기 위해 급히 음식을 씹는 걸 본 현태가 물컵을 희우 앞으로 스윽 내밀었다. 겨우 음식을 삼킨 희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그렇게 먹는 게 뭔데요?”

“급하게?”

“아……. 제가 빨리 먹는 게 습관이 돼서요.”

“왜죠?”

“급식소가 정신없고 시끄러워서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거든요.”

밥을 먹을 때조차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에서 먹는다는 건 어떨까. 현태는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현태에게 식사는 조용하고 느긋한 에너지 보충 시간이었다.

모든 면에서 희우와 현태는 정반대였다.

현태가 반쯤 먹었을 때 희우는 벌써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난 후였다. 소화는 제대로 시키는지 의문이었다. 현태의 표정에서 생각이 읽혔는지 희우가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한 번도 소화불량에 걸려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수능 보러 갔던 날에도 도시락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친구들이 내 도시락이 특별히 맛있는 건 줄 알고 한 숟갈씩 먹어봤다니까요. 전 맛없는 거 빼고 다 맛있어요.”

여전히 이상한 논리였다.

“맛없는 건 뭡니까.”

현태는 정보 수집 차원에서 물었다.

“음…… 꼼장어?”

“왜죠?”

“그거 알아요? 꼼장어는 갯지렁이 과라는 거? 지렁이 먹는 기분이라 별로예요.”

“맛이 없는 건 아니군요.”

“식감이 별로인 거죠.”

“그리고?”

“음……. 메뚜기?”

이번엔 현태의 눈썹이 왕창 찡그려졌다. 음식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음식 종류가 많은데 굳이 메뚜기까지 먹을 필요 있을까 싶었다.

“먹어봤습니까?”

“한 번요.”

현태의 눈이 희우의 입술로 향했다. 저 입속으로 곤충이 들어가는 상상을 하니 정말 별로였다.

“친구들이랑 중국에 갔다가 먹어봤어요. 그건 이에 껍질이 껴서 별로더라고요.”

“맛이 없었던 건 아니군요.”

“식감이…….”

피식.

또다시 식감 운운하는 희우의 대답을 들은 현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메뚜기의 맛을 떠올리느라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희우는 현태가 웃는 걸 보진 못했다.

“그러는 기현태 씨는 싫어하는 음식이나 못 먹는 건 없어요?”

“드디어 나한테 관심이 생깁니까?”

“형식상 하는 질문이에요. 나도 질문을 받았으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희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현태가 재빨리 대답했다.

“냄새가 많이 나는 걸 싫어합니다.”

“청국장이나 두리안 같은?”

현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냄새만 그렇지 맛있던데…….”

희우는 현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일어섰다.

먹성 좋은 희우의 대답은 기준이 확고했다. 이것저것 맛있게 먹는 희우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한 현태의 입술이 또다시 흐린 호선을 그렸다.

현태가 밥을 천천히 먹는 동안 희우는 커피를 한 잔 타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가 버리면 정 없으니까.”

“나하고 친해지기 싫은 사람치고는 적극적이군요.”

현태의 말에 희우가 커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가자미눈을 했다.

“인간관계의 기본이거든요.”

“그래요?”

희우가 맞은편에 앉아 편안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믹스 커피의 달달한 향이 현태에게까지 전해졌다.

희우가 커피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식탁 위에 올려둔 희우의 휴대폰이 부르르르 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희우의 휴대폰으로 옮겨갔다.

두 사람 다 아는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현태는 희우의 휴대폰에 뜬 발신인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희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셋째 누나가 자주 전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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