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로틱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곧 시작된 오프닝 영상은 현태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새카만 화면 가득 울퉁불퉁한 글씨체로 쓰인 제목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악!”
“으으으으윽!”
카득! 우드득!
커다란 스크린을 가득 채운 좀비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밖으로 흐르는 장기를 파스타처럼 흡입하는 좀비들을 보며 현태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마음으로 이런 영화를 고른 걸까. 설마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 살짝 안기고 싶은 건가?
하지만 현태는 이 또한 자신의 착각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팝콘 통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끊임없이 팝콘을 입에 넣는 희우의 눈빛이 빛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수영장으로 날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피 칠갑인 화면을 보면서 팝콘을 입으로 넣는 희우의 모습이 스크린 속 좀비와 겹쳐 보였다.
이 여자와는 영화 취향도 맞지 않았다.
왜 팝콘을 저렇게 한꺼번에 많이 넣는 거지?
팝콘으로 가득 찬 여자의 볼은 몇 번 우물우물 움직인 후 본래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만 먹을 법도 한데 팝콘을 움켜쥐고 입으로 나르는 손은 천천히, 끊임없이 움직였다. 입 안의 공백을 한 치도 허락하지 않는 부지런함이었다.
약간은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던 현태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갑자기 나타난 턱이 날아간 좀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억!”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놀랐는지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희우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슬쩍 눈길을 돌렸다.
아뿔싸.
희우가 잔뜩 볼을 부풀린 채 저를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좀비처럼 살벌한 미소였다.
“잠깐 놀라서 그런 겁니다.”
상영관을 나오자마자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현태를 보며 희우가 피식 웃었다.
“네. 알겠어요.”
순순히 알겠다고 답하는 게 더 약 올랐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알아요. 누가 뭐래요?”
몇 개 남지 않은 팝콘을 하나씩 날름날름 씹어 삼키며 이죽대는 희우가 몹시 얄미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위생적인 장면을 보면서 잘도 먹더군요.”
현태는 내장이 사방으로 튀던 장면이 다시 떠올라 인상을 쓰며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비위생적이라는 말 대신 무서운 장면이나 끔찍한 장면이라고 하던데.”
희우는 현태의 정신세계가 무척 궁금했다.
“그런 거로 무서워하진 않습니다.”
“무섭지 않은 사람치곤 비명이 제법 찰지던데.”
“아까도 말했지만 놀라서…….”
현태가 걸음을 멈추고 거듭 강조했다.
귀까지 빨개진 현태를 보니 희우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알겠어요. 놀랄 수도 있죠. 뭐.”
그러곤 다시 또 히죽 웃으며 팝콘을 냠냠 먹었다. 현태는 오늘 이 기억이 왠지 오랫동안 회자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취향이 이런 쪽입니까?”
“두루두루 좋아해요. SF도 좋아하고 좀비 물도 좋아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군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기가 막힌 이야기는 뉴스에서도 충분하니까요.”
대답하는 희우의 목소리가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져서 현태는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우는 여전히 팝콘을 야금야금 먹으며 걷고 있었지만 왠지 아까와는 다른 냉소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자라면서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궁금해졌으나, 현태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정도로 친해진 것 같지 않아서였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희우가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출근은 언제부터 해요?”
잠시 말없이 걷던 희우가 불쑥 돌아보며 물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희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현태는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는지 희우의 표정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내일부터 합니다.”
“그렇구나.”
국어책을 읽듯 무미건조하게 대답을 하는 희우는 말투만큼이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없는 대답이네요.”
“리액션에 영혼을 담을 만큼 놀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영혼을 담은 리액션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호들갑을 떨면서 박수를 짝짝 쳐 주려나? 어쩐지 그런 장면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사이 희우는 깨끗하게 비운 팝콘 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저렇게 많은 것을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부를까 싶었지만 그건 현태의 착각이었다.
“저녁 뭐 먹을래요?”
팝콘 통을 버리자마자 희우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현태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희우가 슬쩍 눈길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밥 배는 따로 있는 거예요.”
학교에 출근하는 최고의 기쁨이 바로 급식이었다. 팝콘을 먹었다고 저녁을 건너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만 보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밥 안 먹겠다고요?”
“약속 있습니다.”
“헐.”
희우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연히 밥도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현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영화 보자고 했지, 밥 먹자고는 안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건 좀…….
“그래요 그럼. 여기서 찢어져요.”
옅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사라진 희우의 말투는 빠르고 건조했다.
“혹시 화난 겁니까?”
“누가 화를 냈다고. 약속 있다고 하니까 가라는 거지.”
“화난 것 같은데?”
“아닌데요? 가세요. 약속 지키러. 나 혼자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갈 테니까.”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내뱉는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태의 입술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굉장히 거슬리는 미소였다. 희우는 그의 밉살스러운 미소를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인사도 하지 않고 홱 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쪽은 상영관입니다.”
“알거든요.”
현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우가 다시 뒤를 돌아 현태가 있는 쪽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고소한 팝콘 냄새가 훅 지나갔다. 처음으로 팝콘도 먹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태는 희우가 잠들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희우는 침대에 누워 현관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솟아오르는 짜증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들어오거나 말거나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신경 꺼라. 독고야.”
자꾸만 귀를 쫑긋대는 자신이 못마땅해 희우가 툴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 * *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데 부엌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희우는 부엌 쪽으로 가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현태가 간단하게 토스트를 해서 먹고 있었다.
현태가 서 있는 모습에서 이질감이라곤 없었다. 얼마 전까지 혼자 지내던 장소라 기분이 이상했다. 영역을 침범당한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객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선 고소한 버터 향이 났고, 커피 향은 그윽하고 향기로웠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대다 고개를 든 현태와 눈이 마주쳤다.
뻘쭘해라.
“와서 같이 먹죠.”
아침이라 그런지 몰라도 현태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고 까칠했다. 왠지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우는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만 채로 부엌으로 쭈뼛쭈뼛 다가가 현태의 맞은편에 얌전하게 앉았다.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항상 고마운 사람이라는 게 희우의 인생철학이었다.
“냄새가 좋네요.”
희우가 잘 구워진 식빵을 와삭 베어 물며 감탄했다.
현태는 식빵을 오물대는 희우 앞으로 방금 내린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하얀 머그컵에 담긴 커피가 먹음직스러웠다.
희우는 현태가 내미는 잔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도 맛있어요.”
진심으로 감탄하는 희우를 보며 현태가 물었다.
“영혼이 담긴 리액션입니까?”
“그렇죠. 전 지금 진심입니다.”
어제저녁을 혼자 먹었다는 사실은 이미 희우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바쁜 사람이니 사정이 있었을 거라 빠르게 합리화를 시켰다. 어느새 희우에게 현태는 바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현태는 토스트 두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희우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혼자 먹기가 뭣해서 여분으로 준비한 건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기현태 씨도 오늘부터 출근이라고 했죠?”
현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 후 첫 출근이라 긴장되시겠어요.”
“전혀.”
“…….”
고민도 없이 냉큼 답하는 모양새가 퍽 얄미웠지만 이번에도 그냥 넘겼다. 식빵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 하죠?”
희우가 토스트를 베어 물며 물었다. 고소한 토스트와 향긋한 커피를 같이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좀 늦을 겁니다.”
“그럼 집에서 저녁 먹죠.”
미루기 싫었다. 어쨌든 50시간을 채워야 했고 조금씩이라도 없애 나가야 말일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안 늦었습니까?”
현태가 시계를 흘깃 쳐다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고 화장하는데 십오 분이면 충분해요.”
순식간에 커피까지 다 마신 희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커피가 아직 뜨거울 텐데 어떻게 다 마셨는지 불가사의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할게요.”
“그러죠.”
희우가 준비해 주는 저녁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겉으로 봐선 요리를 잘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맛없어도 맛있는 척해야 하나?
현태는 짧게 고민한 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앗뜨!”
현태는 얼른 컵을 입에서 떼어냈다. 혓바닥을 사포로 문지른 기분이었다.
희우가 쉽게 호로록 마시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뜨거운 음식을 유난히 못 먹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켜는 건 거의 차력 쇼에 가깝지 않나?
진짜 이상한 여자다.
현태는 김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방으로 들어간 희우는 십오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출근 준비를 다 마치고 아침을 먹었던 현태와 동시에 집을 나서게 됐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여자였다.
현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멀끔한 모습으로 서 있는 희우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패션 센스는 뛰어난 편은 아닌 듯했다. 아래, 위 맞춰서 입은 것 같은데. 그래도 체크무늬 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는 좀 아니지 않나?
게다가 가방은 블랙과 화이트로 되어 있어서 마치…… 바둑판 세트 같았다.
피식.
말도 안 되는 희우의 패션 센스에 저절로 웃음이 샜다. 희우가 살짝 흘겨보는 봤지만 왜 그러냐고 따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희우는 현태가 알아 왔던 그 어떤 여자와도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추측하기도 쉽지 않았다.
뭐든지 빨리 먹고 무서운 속도로 소화를 시키며 초 스피드로 단장을 끝냈다. 깔맞춤으로 입지만 기묘하게 안 어울린다.
진실된 사랑을 추구하는데 물질만능주의 사상에 젖어 있고, 설명하는 걸 즐기지만 논리적인 허점이 수두룩하다.
내장이 흐르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를 보면서 해맑게 웃는다.
강아지도 아닌데 먹을 것을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며칠 동안 현태가 파악한 독고희우에 관한 정보였다.
하아…….
출구 없는 미로를 마주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