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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16)화 (16/75)

16화

수정이 슬쩍 떠본 말에 현태가 메마른 얼굴로 답했다. 밀어 두었던 위스키 잔에 손을 뻗고 바텐더에게 빈 잔을 청했다.

수정의 예리한 눈빛이 현태의 손과 표정을 부지런히 좇았다.

“무슨 일 있어? 4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울 거야. 게다가 신혼이잖아. 매 순간이 뜨거울 텐데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짓궂은 표정까지 지어가며 팔꿈치로 현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자, 이제 별로라고 말해. 수정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현태를 응시했다.

“할 말이 그거야?”

기어이 나오고 말았다. 현태의 마지막 질문.

수정은 본능적으로 마지노선을 감지했다.

수정은 우정이라는 명목하에 현태와의 선을 꾸역꾸역 지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정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거대한 벽을 코앞에 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수정은 이내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입 안이 쓴 건 위스키가 혀끝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나 너희 회사 출근한다.”

“뭐?”

처음으로 현태의 표정이 다이나믹하게 변했다. 이 정도 뉴스는 되어야 반응하는 현태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말했잖아. 스카웃 제의받았다고.”

수정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현태는 눈치채지 못했다.

“안 할 거라며.”

“맘이 바뀌었어.”

“왜?”

“연봉이 높아.”

수정은 다시 채워진 위스키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날카롭던 신경이 조금 무뎌졌다.

“잘됐네.”

여전히 무심한 말투. 수정은 쓰게 웃으며 현태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잘 부탁해요, 본부장님.”

지금이라도 당장 현태의 너른 가슴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수정이 말갛게 미소 지었다.

* * *

주말이 지난 교실은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희우가 교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하느라 이야기를 멈춘 아이들도 있었지만, 절반은 희우가 교실에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희우는 시간을 확인한 후 교사 연구실로 향했다.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한 탓에 커피 한 잔 타서 올 여유가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5층 복도 중앙에 자리 잡은 연구실 문을 열며 희우가 우렁차게 인사했다.

“독고 샘 왔어요?”

“굿모닝입니다.”

희우가 학년 실에 들어서자 먼저 출근한 교사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들 중엔 희우의 열렬한 추종자인 이슬도 있었다. 커피 향이 좁은 교사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희우는 유독 얼굴이 하얀 이슬을 보며 매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희우도 하얀 편에 속했지만 이슬은 완전 다른 인종 같았다. 백인 옆에 서도 더 하얄 거라고 희우는 확신했다.

“우와. 커피 향 죽인다. 얼른 가지고 교실로 갑시다. 주말 지나서 그런지 애들이 난리네요.”

이슬이 따라주는 커피를 받아 들고 희우가 말했다. 아침 시간에 연구실에 모여 있지 말고 교실로 어서 흩어지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6학년 교사 중 희우의 나이가 가장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피를 쥔 교사들이 각 반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하지만 2반 옥혜정 선생은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걸 몰라? 아침에 커피 마실 시간까지 부담스럽게 하면 어쩌라는 건지…….”

혜정은 희우와 동기였는데 묘하게 부딪힐 때가 많았다.

혼잣말인 듯, 혼잣말이 아닌 것 같은 오묘한 뉘앙스에 희우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아침부터 쓸데없는 일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희우는 못 들은 척 커피잔을 들고 연구실을 나왔다.

“아침부터 고단하네.”

희우가 복도까지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들리는 교실로 걸어가며 중얼댔다.

희우가 교실로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정신없이 올라가 있던 소음 데시벨이 한 꺼풀 꺾였다. 아침 활동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꾸물꾸물 자리로 돌아가 마지못해 책을 펼쳤다.

“월요일은 독서 활동하는 날인 거 알지? 읽고 싶은 책 들고 왔어?”

“네!”

“선생님! 만화책도 돼요?”

“야! 선생님이 안 된다고 했잖아!”

민호의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희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반장이 얼른 답했다. 민호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지만 희우는 반장의 민첩한 행동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 반 반장.

웅성대던 아이들이 억지로 책에 시선을 돌리자 희우는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어제 새벽 늦게 들어왔지?’

타인과 같이 살게 된 탓인지, 잠귀가 밝아졌다.

불면증을 치료한 후론 한 번 자면 다음 날 아침까지 죽은 것처럼 잤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밖에 나가 보고 싶었지만 괜한 참견을 하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참견을 해도 되는 사이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현태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민호! Why책 집어넣자. 만화책 안 된다고 했지?”

그사이를 못 참고 만화책을 펼쳤던 민호가 시무룩하게 책을 덮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만큼 평화로운 곳도 없었다.

희우는 전쟁 같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밀린 공문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왜 지난번에 보고했던 거랑 똑같은 내용이 또 왔지?”

선거철만 되면 국회의원 누구누구 이름으로 오는 현황보고 공문은 형식만 다를 뿐 매번 같은 비슷비슷한 내용을 요구했다.

“교육청에 물어보면 바로 나올 텐데 왜 매번 이러는지 모르겠네.”

희우는 짜증을 내면서도 공문에 첨부파일로 딸려온 양식을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저 공문을 다 처리하고 나서 내일 수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남길 바랄 뿐이었다.

희우가 구시렁대며 자판을 두들기는데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누구지?”

습관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흘깃 쳐다보던 희우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퇴근 시간이 언젭니까? 지금 주차장입니다.

현태에게서 온 문자였다. 희우는 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하려면 아직 30분은 넘게 남아 있었다.

“뭐야…….”

희우는 휴대폰이 현태라도 되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휴대폰을 잠시 노려보던 희우는 한숨을 짧게 쉰 다음 간결한 답장을 재빨리 적어 보냈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한참 기다려야 하니 그냥 가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희우가 다시 모니터에 눈을 돌릴 때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기다리겠습니다.

“헉! 진짜 왜 이래?”

“뭐가?”

“악! 깜짝이야!”

휴대폰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희우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질겁했다.

“뭘 그리 놀래?”

혜정이었다. 이미 퇴근 준비를 다 끝냈는지 핸드백까지 메고 있었다. 희우의 눈살이 찌푸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척도 없이 오니까 그렇지. 무슨 일이야?”

별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물었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워서 사이라도 확 나빠지면 좋을 텐데 혜정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열쇠 좀 맡기려고.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빨리 나가야 하거든.”

혜정이 찡긋 웃으며 교실 열쇠를 희우의 책상 위에 올렸다.

“조퇴 신청했어?”

“아니, 이제 곧 퇴근 시간인데 뭘.”

“곧 퇴근 시간인데 뭐 하러 지금 나가. 조금 있다가 나가지.”

“바쁜 일이 있다니까 그러네. 부탁할게!”

열쇠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막 몸을 돌리는 혜정을 희우가 불러 세웠다.

“혜정 샘. 내 말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왜 또!”

희우가 가슴 앞으로 팔짱까지 끼고 목소리를 깔자 혜정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잔뜩 퍼졌다. 나이도 같은데 자꾸 꼰대 짓 하는 게 짜증 났다.

“자꾸 퇴근 시간 되기 전에 나가는 건 별로 안 좋아 보여. 조퇴 신청도 안 했다며? 아직 퇴근 시간 30분 넘게 남았어.”

“그러니까 자기한테 열쇠 맡기는 거잖아.”

“왜? 당당하게 걸고 나가지.”

“그거야!”

“들키기 싫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들키기 싫은 짓을 왜 해?”

“됐어! 갖다주기 싫으면 관둬.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걸 잔소리는 왜 해? 교장이야, 뭐야?”

혜정이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의 열쇠를 낚아챘다. 희우는 혜정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분명 거절하지 못할 이슬 샘한테 가려는 거겠지.

마음 같아선 이슬에게도 받아주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슬은 남은 학기 내내 혜정에게 시달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탕!

앞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저러다가 진짜 큰일 나지. 난 분명히 말렸어.”

사실 혜정의 무단 조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학교 규모가 크고 5~6학년 교실이 별관에 따로 있어서 교무실을 근처를 지나지 않았고 바로 주차장으로 퇴근이 가능한 구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숨을 푹 쉬던 희우의 눈이 교실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로 향했다.

째깍째깍.

유난히 초침이 많이 털렁거리는 벽시계는 정시보다 2~3분 느리게 갔다. 시계도, 동료 교사도 마음에 들지 않는 오후였다. 하지만 지금 희우의 기분이 찜찜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왜 기다리고 있지?”

희우의 시선이 다시 휴대폰으로 옮겨졌다. 아무래도 공문은 오늘 발송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곤란한 표정을 한 이슬에게 억지로 열쇠를 맡긴 혜정은 재빠르게 주차장으로 나왔다. 빨리 퇴근하기 위해 일부러 출구 근처에 주차했다. 신나게 내려갔던 혜정은 자신의 차 앞에 이중 주차를 한 차를 보고 인상을 확 구겼다.

신경질적으로 다가간 혜정이 운전석 쪽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저기요! 차 좀 빼 주세요. 여기다 주차하면 어떡해요?”

여기서 뭉그적거리다 빨리 나온 보람이 없어질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승용차는 곧바로 자리를 이동했고 혜영은 무사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까는 마음이 바빠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앞을 막고 있던 건 꽤 비싼 차였다.

“누구지? 헙!”

혜정은 출발하지 않고 잠시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차에서 내린 남자의 놀라운 외모 때문이었다.

“대박. 연예인이야?”

그동안 남자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저런 외모의 남자는 한 번도 없었다. 몰고 다니는 차를 보아하니 돈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헉! 이리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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