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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10)화 (10/75)

10화

딸깍.

사과를 끝낸 후 희우는 들고 있던 봉지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현태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희우의 뒷모습에 뒤늦게 난감한 감정이 몰려왔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물을 바라보듯 희우를 보던 기우돌 회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저 여자의 모습을 노인네가 본다면 당장 멱살을 잡히고도 남겠지. 현태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차 문을 열었다.

귀찮아 죽겠군.

자존심이 강한 저 같았으면 보란 듯이 들고 있는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 안에 넣고 말았을 것이다.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 자동차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희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 상한 희우가 다른 차를 타고 가 버린 건 아닌가 살짝 걱정됐다.

하지만 현태는 곧 희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테이블에 자리 잡은 희우가 봉지 안에 든 것을 꺼내고 있었다.

“하아…….”

희우는 알감자를 하나를 야무지게 입 안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맛있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걱정했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저 여자 뭐지?

독고희우라는 여자의 멘탈은 어느 정도일까, 현태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운전석에 앉은 현태는 마음이 복잡했다.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현태에겐 썩 달갑지 않은 감정이었다.

다 먹고 올 건가.

알감자가 들어 있던 통을 쓰레기통에 비우고 난 희우가 다시 봉투를 뒤적이는 게 보였다.

“하아…….”

현태의 미간 사이에 주름 몇 개가 세로로 파였다.

망할 노인네.

한울 전자 따위 포기해 버릴까?

안 돼.

다른 것도 아니고, 한울 전자였다. 몇 년 전부터 말단으로라도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던.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번번이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그 한울 전자.

현태의 눈동자가 핫바를 두 개째 꺼내고 있는 희우에게 고정됐다. 이 와중에 먹기는 엄청 잘 먹었다.

희우는 현태가 차에서 나와 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무안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 따위도 대충 기대했었다.

하지만 싸가지가 바가지인데다 성질도 더러운 기현태는 와 보기는커녕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차하고 천년만년 잘 살아라. 나하고 이혼하고 차랑 재혼하면 되겠네.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유치한 감정이 울툭불툭 솟았다.

하긴, 재벌 2세 나부랭이 주제에 남이 자기 차 핸들 만지는 것도 싫어서 운전사도 고용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 성질이 오죽할까.

현태의 더러운 성질을 욕하며 먹다 보니 알감자와 핫바 두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늦게 포만감이 몰려왔다.

“너무 많이 먹었나?”

살짝 후회하며 자리에 일어선 희우가 부른 배를 쓱쓱 문지르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현태를 발견했다.

희우가 선 곳에서 현태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어떤 얼굴일지 짐작이 갔다.

재벌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알감자를 무시해? 평생 이 맛있는 거 못 먹어 보고 죽어라.

해도 소용없는 욕을 속으로 퍼부으며 희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트 매요.”

희우가 차에 타자마자 현태가 툭 뱉듯 말했다. 무심하게 한 말이었지만 일단 현태에게 싫은 감정이 앞서 있는 희우에겐 그마저도 악의가 담긴 말투처럼 느껴졌다.

딸깍.

대꾸하기 싫어 조용히 벨트를 맨 희우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 안 방향제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어쩐지 현태에게서 나는 향기와 비슷한 것 같아 별로였다.

싫은 감정은 도미노처럼 그와 관련된 모든 말과 행동에 빠르게 적용됐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은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앞을 곧장 응시하는 시선은 너하고는 절대 말을 섞지 않겠다는 옹졸함으로,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옷차림은 융통성이라곤 없는 답답한 인간으로.

그가 미국에 4년 동안 지내면서 떨어져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희우는 늘 그렇듯 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다.

그래, 4년 동안 기현태가 한국에 있었으면 4일 만에 이혼했을지도 몰라. 그러면 수연제는 꿈도 못 꿨겠지. 이제 일 년만 참으면 돼. 일 년! 기현태가 무려 4년을 벌어줬잖아. 나에게 수연제를 안겨줄 고마운 사람이다. 욕하지 말자.

초인적인 힘으로 희우가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이 현태가 운전하는 차가 조용히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서운하고 날 선 감정과는 별개로 희우는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알감자에 핫바 두 개까지 야무지게 먹고 적당하게 부른 배도 졸음에 한몫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떠 보려 안간힘을 썼다. 곁눈질로 희우를 흘깃 본 현태가 한숨을 옅게 쉬며 말했다.

“자도 됩니다.”

희우는 대답 대신 고집스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정전처럼 순식간에 암흑이 되어 버리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을 줬다. 하지만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조그마한 머리통이 옆으로 톡 떨어졌다.

차 안에 한참 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곁눈질로 흘깃 보니 희우가 의자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모습은 아이처럼 무방비해 보였다.

“안 잔다 그러더니.”

현태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대자 거짓말처럼 희우가 눈을 번쩍 뜨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잤어요. 어? 언제 깜깜해졌지?”

아까도 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쯤이면 잠꼬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 뒤에도 희우는 눈을 부릅떴다가, 고개가 꺾어졌다가, 아닌 척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기를 반복했다.

복붙한 것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희우의 행동을 보며 현태는 어이없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게다가…….

“되게 신경 쓰이네.”

쉬지 않고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것보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여자의 고른 숨소리가 어쩐지 더 거슬렸다.

* * *

자동차는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을 회관 공터에 멈춰 섰다. 자동차 속도가 느려지자마자 희우는 눈을 번쩍 뜨곤 전혀 졸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샅으로 들어가야 해서 집 앞까지 차를 몰고 갈 수가 없어요.”

“고샅?”

현태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항마력에 이어 또다시 등장한 낯선 단어에 경계심도 함께 일었다.

스치듯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태에게서 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희우는 당황했다.

현태에게 기대한 게 많지 않아서 그런지 섭섭한 마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별것 아닌 걸 마음에 오래 담고 있는 것도 희우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결국 알감자와 핫바는 먹었으니 됐다 싶기도 했다.

“아……. 대문에 들어가기 전에 골목처럼 좁고 긴 길이요. 복이 쉽게 들어오라고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데 복이라고 쉽게 들어올까 싶어요.”

“그렇군요.”

운전하는 내내 희우의 안색을 살피고 차에서 내린 후에도 어떻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고민하던 현태는 어려운 숙제를 하나 해결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이토록 치열하게 살폈던 적이 있던가.

호감도 없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자신의 모습이 약간 측은해졌다. 현태는 나란히 걷는 희우의 곁눈질로 살폈다.

그새 마음이 풀린 건가?

희우의 말투에서 서운한 감정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현태는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날이 저물어 주변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뺨에 와 닿는 밤공기가 서울과는 달랐다.

얼마 안 가 희우가 말한 고샅에 도착했다. 좁은 길 양쪽으로 기와를 얹은 돌담이 죽 이어졌다. 정성 들여 쌓은 돌 위에 조르륵 올라간 기와가 꽤 정다웠다.

불과 몇 시간 떨어진 서울과는 다른 세상인 듯 고즈넉했다. 마음까지 여유로워지는 기분이라 현태의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해가 저물기는 했어도 한여름이라 공기가 훅훅 쪘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마저 텁텁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희우의 시선이 손목까지 내려온 현태의 슈트에 머물렀다.

‘덥지도 않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현태의 표정만으로는 더운지 추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 알 바 아니지만.

잠시 현태를 걱정했던 희우는 이내 생각을 털어 버리고 앞장섰다. 뒤에서 따라오는 현태의 발소리를 들으며 희우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래전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놀러 왔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남편이라 이건가? 살짝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역사책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집이니 대문부터 으리으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샅 끝에 등장한 솟을대문은 의외로 소박하고 정겨웠다.

처음 만난 솟을대문을 지나면서 현태는 한옥의 규모에 놀라는 중이었다.

솟을대문을 지나니 제법 너른 마당을 둘러싼 행랑들과 두 개의 광 사이에 자리 잡은 중문, 반대쪽에 또 다른 중문이 나타났다.

성북동 본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에 자꾸만 사방을 살피게 됐다.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날이 밝았으면 더 잘 보였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잘 따라와요. 길 잃어버리지 말고.”

희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현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막 첫 번째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통과했을 때였다.

“아버님! 희우랑 손주사위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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