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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8)화 (8/75)

8화

현태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옆에 자리 잡고 앉는 희우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경악했다. 누나들도 군말이 없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할아버지 옆자리는 저도 앉아 보지 못한 자리였다. 옹졸한 질투심이 살짝 올라왔지만 그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기 회장과 식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소화불량은커녕 식탁 위 음식을 모두 먹어 치울 것처럼 맹렬하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경외심을 담아 희우를 바라보던 현태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도련님 좋아하시는 조기구이랑 도미찜도 준비했어요. 맛있게 드세요, 도련님.”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은 김말녀 여사였다.

현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안의 식단을 관리한 사람이었다. 4년 전보다 턱이 동그래졌지만 너그럽고 온화한 미소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김말녀 여사를 보자 현태는 비로소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현태가 한 말에 김 여사의 광대 양쪽이 둥글게 뭉쳤다.

지독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말투였다. 그러나 김 여사는 멋대가리 없는 이 표현이 현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주 며느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회장님이 음식을 칭찬할 리 없었고, 입만 열면 불평불만을 뱉기 바쁜 이 집 딸들이 김 여사의 요리를 그리워했을 리도 없었다.

그나마 셋 다 이 집에 살지 않아 김 여사의 스트레스가 덜하달까.

“많이 드세요. 도련님. 그리고 작은 사모님도요.”

김 여사의 곱게 접은 눈매가 야무지게 자리 잡고 앉은 희우에게 향했다. 현태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김 여사님까지?

깐깐하기로 할아버지 못지않은 사람이 바로 김말녀 여사였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이고 이 집에서 평생을 일해 온 자긍심 또한 기업의 임원 못지않았다. 현태의 부친에게 잔소리를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웬만한 손님이 와도 저자세를 보이지 않는 사람인데.

“네, 여사님 요리는 정말 최고라 여기 오고 나면 자다가도 자꾸 생각나요.”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

김 여가가 겸양을 떨며 다이닝룸에서 멀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여자 도대체 뭐지?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 김 여사가 아니었다. 10년 동안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든 수정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분이었다.

풀 수 없는 문제를 직면한 현태는 희우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현태는 몇 번이나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할아버지의 손주 며느리 사랑이 지극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희우야, 소고기가 아주 부드럽다. 먹어봐라.”

좀 멀리 있는 반찬을 앞으로 옮겨 주기도 하고.

“희우야, 갈비찜 양념이 아주 잘 되었구나. 먹어봐라.”

희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며.

“희우야, 국이 식지 않았니?”

식어 버린 국을 데워 오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독고운 선생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다. 즉, 할아버지에게 독고운 선생의 피가 흐르는 손주를 반드시 대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꿀꺽.

음식을 앞에 두고 현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해리슨 빌딩을 매입하기로 결심했던 날보다 비장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대단한 결혼을 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이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음식의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 * *

“벌써 가려고?”

현태와 희우가 일어서자 기 회장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경주에도 가야 해서요.”

꿀이 떨어질 것 같은 기 회장의 눈을 보며 현태가 희우 대신 대답했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라. 당연히 사돈댁에도 가야지. 잠시만 기다려라.”

기 회장은 뭔가 잊은 게 있는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기 회장이 사라진 자리는 적막만 감돌았다.

형식적으로 나누던 덕담 따위 사라지고 없었다. 시기와 질투로 물든 눈동자는 기름 바른 구슬처럼 번들댔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편해 보이는 건 독고희우 한 사람뿐이었다.

현태는 다른 의미로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서슬 퍼런 세 사람 사이에서 기가 죽기는커녕 초연한 모습이라니.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애정을 등에 업고 있다 해도 놀랄 만한 멘탈이었다.

현태는 처음으로 희우가 저보다 강인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현태라도 누나들과의 마찰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피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랄까?

희우는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날 선 눈빛을 제 일이 아닌 듯 담담하고, 느긋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그것도 복숭아를 와삭와삭 베어 물면서 말이다. 희우 근처에서 달콤한 복숭아 향이 진동했다.

“와…… 복숭아가 정말 달아요. 현태 씨도 먹어봐요.”

갑작스레 다정한 척 구는 연기까지 일품이었다.

현태는 희우를 멍하게 보다 얼른 복숭아를 찌른 포크를 받아 들었다. 기계적으로 입에 넣은 복숭아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에 문제가 생긴 건가?

맞은편에 앉은 누나들도 복숭아엔 입도 대지 않았지만 희우는 권하지 않았다.

와삭와삭.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2대 3으로 마주 앉은 다섯 사람 사이에서 희우 혼자 복숭아 씹는 소리만 들렸다.

농밀한 복숭아 향이 현태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잠시 후.

“자, 이거 받아라.”

기우돌 회장이 희우에게 내민 건 봉투였다. 누가 봐도 돈이 들어 있을 것 같은 봉투의 겉면은 금박으로 반짝였다.

“헉! 지난번에 주신 것도 아직 남아 있어요!”

희우가 손사래를 치며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할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무랐다. 사양하는 모습도 예쁜지 희우를 바라보는 눈매가 흡족함으로 그득했다.

“그거 몇 푼 된다고 아직도 못 썼어? 옷 사 입고, 맛난 거 사 먹고 하면 금방 사라질걸!”

“너무 많았어요.”

현태는 이쯤 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독고희우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를 이렇게까지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지.

독고운 선생의 자손이라는 게 한몫했겠지만, 할아버지의 녹아내릴 듯한 표정을 보아하니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게 확실했다.

약점이라도 잡혔나? 하지만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는 약점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드러냈을 리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실랑이는 계속됐다.

“가져가. 네 월급 얼마나 된다고. 가져가서 여름옷도 좀 사 입고 그래. 얼굴에 살도 많이 내렸네. 현태 왔으니까 이제 둘이서 맛난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고. 현태, 너!”

갑자기 불똥이 현태에게 튀었다.

현태는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우리 희우한테 잘해라. 응?”

“…….”

현태는 물론이고 누나들의 얼굴이 썩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체하는 법이다. 현태의 눈에는 희우를 예뻐하는 기 회장의 태도가 딱 그랬다.

뭔가 있는데…….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가 약점 같은 걸 드러낼 리 없었다.

* * *

돈 봉투를 사양할 땐 언제고 희우는 차에 타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어깨까지 들썩였다.

독고희우는 돈을 좋아한다. 그것도 매우. 이거 하나는 저와 비슷했다.

현태는 희우가 성북동에 가자고 했을 때 좋아했던 게 이제야 이해됐다.

이러면 일이 더 쉬워지려나?

괜히 마음이 담긴 선물이니, 진심이니 하는 말들로 피곤하게 하는 것보다 나았다. 적어도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헉!”

봉투를 열고 신나 하던 희우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현태는 다급한 일이 생긴 줄 알고 대문을 나서기 전 급하게 차를 세웠다.

“뭡니까?”

“돈이…….”

희우는 여전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돈이?”

“많아요.”

희우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봉투에서 천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흔들었다. 기우돌 회장님에게는 별것 아닌 돈이겠지만 희우는 올 때마다 용돈으로 쥐여 주는 시할아버지 덕분에 살맛이 났다.

이렇게 모은 돈도 지금까지 꽤 됐다. 할아버지만 생각하면 현태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기현태였다.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기현태. 다른 여자와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살다 온 기현태.

잘생기고, 키도 크고, 똑똑하고 돈도 많지만 결정적으로 희우가 싫어하는 요소는 다 가지고 있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극복이 불가능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와 묘하게 사람을 얕잡아 보는 거만한 눈빛. 깔끔하지 못한 여자관계.

예의 없고 허세 있는 사람도 지독하게 싫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후다닥 미국으로 갔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현태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싸가지를 야무지게 밥 말아 먹은.

게다가 아이를 낳아달라고?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아들을 강요하는 할아버지와 겹쳐 보였다.

이런 사람과 살면서 평생 스트레스받느니 깔끔하게 이혼하고 혼자 사는 게 나았다.

희우는 갑자기 든 생각에 들고 있던 봉투를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저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현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이 안 가. 어쩌지?

* * *

“경주에는 잠시 후에 출발합시다.”

현태가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놓는 희우를 보며 말했다.

끝까지 보고 있었지만 희우는 구두를 그대로 벗어 놓고 현관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정리벽이 있는 현태에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정말 이 여자와 아이까지 낳고 살 수 있을까?

결국 참지 못한 현태는 구두를 정리하고 뒤늦게 뒤따라 들어왔다.

“알았어요.”

시할아버님께 용돈을 두둑하다 못해 묵직하게 받은 희우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경주에 가는 건 싫었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았다.

“이야기 좀 합시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던 희우는 현태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현태는 벌써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는 저 오만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요?”

“누나들하고 따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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