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254)

* * *

성익권은 성심성의껏 그들을 대접했다.

정신을 잃은 여인을 보필하는 천인의 기세가 대단히 흉포하여 어제는 감히 그에게 무얼 더 권하지 못했다.

하여 성익권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들이 머무는 전각 주변에서 모든 이를 물렸고, 시중을 들 궁인 몇만을 멀지 않은 곳에 대기시켜 두었다.

그 궁인들에게서 천인이 기상하신 듯하다는 소식이 이른 아침에 전해져 왔다.

성익권은 밤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느라 조금도 잠을 이루지 못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갈아입을 옷과 목욕물, 소셋물, 아침 식사를 친히 진두지휘하며 준비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조반을 들이라는 말이 있자마자 커다란 상을 직접 가지고 들어갔다.

임금으로서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나 나라를 구해 준 은인들에게 그는 못 할 일이 없었다.

하늘엔 여태 비구름이 남아 있었다.

하여 창을 열어 두었음에도 초를 켜지 않은 방 안은 어슴푸레했다.

그럼에도 목욕을 마치고 새 옷을 정갈하게 걸친 두 천인의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라.

이미 그들의 용모를 자세히 본 성익권마저도 상을 들고 들어가다 멈칫할 정도였다.

‘……게다가 어쩐지. ……어제보다 두 분이 더 다정해 보이는 듯한데. ……내 착각인가?’

성익권은 제가 너무 뚫어지게 그들을 응시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들 앞에 들고 온 상을 내려두었다.

비록 상 위에 차려진 것들은 양이 넉넉하거나 그리 빼어나게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한 줌의 곡식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상차림이었다.

그러고도 혹 대접이 소홀하다고 느끼기라도 할까 봐, 궁 살림이 넉넉지 못해 이것밖에 올릴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목소리가 스스로가 듣기에도 절박했다.

세화는 식욕이 없다고 뒤로 물러나 있었기에, 괜찮다고 손을 내저은 백기하만 상 앞에 앉아있었따.

“그대도 와 봐. 응?”

다정한 목소리가 세화에게 날아갔다.

“맛이 괜찮아. 오래 식사를 하지 않았잖아. 조금만 먹어 봐, 응?”

권유하는 음성이 어찌나 부드럽고 달콤한지.

제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성익권의 귓가가 붉어질 정도였다.

“별로 입맛이 없어요. 당신 먹어요.”

“그래도. 조금만. 응?”

그가 한 번 더 그녀를 향해 물었다.

눈이 부시도록 수려한 외모는 오늘따라 더욱 빛나고 있었고 얼굴 가득 들어찬 훈풍과 미소 덕에 결국 세화의 눈가마저 붉어졌다.

“알았어요.”

그의 얼굴에 홀린 것인지. 반복된 권유에 이기지 못한 것인지.

딱히 식사 생각이 없던 그녀도 어쩐지 조금 식욕이 돌았다.

그녀가 조금씩 다가와 상 앞으로 가까워지자 백기하가 제 자리를 내주며 사용하지 않은 수저와 젓가락을 앞에 놓아 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육포를 물에 불려 만든 육전 하나를 집어 세화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왜 이래요. 누가 있잖아요.”

“누가 있으면 뭐 어때.”

“…….”

“하나만 먹어 봐. 이게 제일 괜찮았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가 된 성익권은 지금이라도 제가 등을 돌려 이 방을 나서야 하나, 심각할 정도로 신중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전, 전하.”

몇 겹이나 되는 문밖에서 내관이 성익권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내 방해하지 말라 미리 일렀거늘.”

“그것이. 저……. 천인분들께서 또 궁에 방문하셨습니다.”

“……뭐라?”

천인이라는 말에 성익권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재앙을 일으킨 짐승의 일족이 또다시 궁에 찾아온 것인가 염려한 탓이었다.

날카로운 침묵이 스치고 지나간 틈새로 내관의 목소리가 다시금 흘러들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열 분 정도가 같이 오셨습니다. 그중 책임자이신 듯한 분께서 지금 궁에 계신 두 분의 귀인들을 뵙고자 하시는데, 어찌할까요.”

두 분의 귀인을 뵙고자 한다고?

눈만 껌뻑거린 성익권의 시선이 세화와 백기하에게 슬쩍 닿았다. 허나 그는 감히 그들에게 먼저 답을 종용하지 못했다.

그사이 세화와 백기하의 시선 역시도 서로의 것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으로 통하는 문은 주가의 초소에만 있었다.

하여 초소병들에게서 기척을 감출 수 있는 백기하와 세화만 인계에서 움직였던 것이고.

교룡과의 싸움에서도 주가에 알려지지 않도록 애써 결계로 문을 막으며 상황을 감췄던 것인데.

혹 그 주가 초소병들이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돌아간 교룡에 의해 명받아 인계로 넘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날카로운 긴장이 방 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뜬 백기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그간 궁에 개입하던 이들이 찾아온 것이냐.”

“아닙니다. 처음 뵙는 분이셨고, 자신을 백가 재상 백만용이라 하시며 가주를 만나 뵈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

“?!”

들려서는 안 될 이름이 내관의 입에서 언급된 순간 백기하와 세화가 잠시 멍하니 굳어졌다.

‘……지금 저 내관이 뭐라고 한…….’

제가 들은 말을 쉬이 믿을 수 없던 백기하가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

“백가 재상 백만용이라 하셨습니다.”

“…….”

성익권과 세화의 시선이 백기하에게 닿았다.

그 시선 속에서 백기하가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곳은 본디 주가의 관리 아래 있는 장소인데, 다른 변동 사항이 없는 상태에서 백만용이 인계로 넘어올 수 있는 방법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잔뜩 다친 신영에게 허락을 얻어 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신영의 명 없이 초소병들이 백만용과 백가 무사들을 통과시켰을 리도 없고.

“…….”

이마를 짚은 손 아래로 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밥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가 혼자 있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남자의 단단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우리…….”

“…….”

“우리 만용이가 또…….”

* * *

궁 앞이 온통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비는 하룻밤 정도만 이어지다가 오전 일찍 개었다.

하지만 그 밤 내내, 마치 별이 땅에 흩뿌려지듯 반짝반짝하게 빛나며 떨어져 내렸다.

그 물방울들을 흡수한 땅은 가뭄이 오기 전 상태가 아니라 가장 비옥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큰 기대는 없으나 한 줌의 희망을 품고서 마른 땅에 뿌려 두었던 곡식들 역시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자라고 영글었다. 풍성하게 매달린 낟알의 무게로 고개들이 이미 모두 휘었다.

푸른 잎이 무성한 식물들을 언제 보기 힘들었냐는 듯, 온 사방 천지에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모든 것이 눈이 아플 정도로 생생했다.

이 비의 존재를 쉬이 믿을 수 없어 하룻밤 꼬박 그 빗속에서 뛰어다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뿔은커녕 비쩍 말라 약해진 신체는 오히려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활력이 돌았고, 뽀얗게 혈색이 오르며 피부마저 희게 바뀐 듯했다.

어찌 이런 믿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이 이 기적을 만드신 천인들이 머무는 궁으로 쏠릴 수밖에.

비를 내리신 천인께서 쓰러지신 채 궁으로 가셨으니 깨어는 나셨는지.

몸은 괜찮으신 건지. 우리를 위해 애써 주신 그분께 감사의 인사라도 표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은 될지.

신비로운 비를 온밤 내내 환영한 이들은 아침이 되자 궁문 앞을 기웃거렸다.

궁문지기들이 돌아가라 일러도 조금 멀어지기만 할 뿐. 누구 하나 그 자리를 떠나가는 이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천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다각다각.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이들이 하나같이 굳어졌다.

말 위에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은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위로 흐르는 어떤 위압적이고 놀라운 기운은 그들을 감히 사람이라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물 또한 어찌나 뛰어난지.

빛나는 비를 맞은 이후, 배고픔과 목마름을 잊고 예전의 몸 상태를 회복한 사람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희망도 잃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는 기억마저 잊어버리고 그들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궁문지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궁을 향해 다가올 때부터 멍하니 굳어진 채 제 눈을 의심하던 병사들은 일행의 장인 듯한 이가 직접 다가와 말을 걸자 더욱 깜짝 놀랐다.

“이곳에 거하고 계실 내 가주를 만나 뵈러 왔다. 너희들은 속히 안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하거라.”

“가, 가주라니.”

궁 안으로 들어간 천인이라고는 딱 둘뿐이었으니 그분들 중 한 분을 일컬으심인가.

급히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던 궁문지기는 다행히 멀리 가기 전에 제가 새로 나타난 천인들의 신분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혹 이분들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하며 심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제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귀인께서 누구신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제가 감히 귀인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 정도가 뭐가 어렵겠나. 나야 우리 가주를 위해 준비된 영원한 백가의 재상. 뛰어난 학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천 년 만에 재림하신 신수의 최측근 자리를 맡아 그분을 보필하며 환계에 끝없는 번영과 풍요를 가져오기 위해 불철주야 이 한 몸 아끼지 않고 헌신하면서도 그 수고를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 겸손하고 사려 깊은 심성에 속이 꽉 차 있을뿐더러 외모 수려하고 무예 출중하고 그 명성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로…….”

“흠. 큼.”

백가 무사 하나가 그의 뒤에서 나직이 목을 울렸다.

“……? 뭐냐.”

“재상.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저희를 재촉하셨습니다. 빨리 가주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지금 빨리 내 이름을 말하고 소식을 넣으려는 중이 아니냐.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

“어디까지 했지? ……너 때문에 말이 끊어져 체통을 잃었구나. 너, 내가 반드시 기억해 둘 것이다.”

“!”

“어쨌거나. 어디까지 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백만용이다.”

뜬금없는 결론에 그의 목소리에 온통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궁문지기도 잠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백가 재상이 체면을 잃어버린 상황에 분노하며 참담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저 백가 무사는 환계로 돌아가는 대로 절대로, 반드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일에 저 인간 병사의 잘못은 없어, 백가 재상은 한 번 더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백만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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