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54)

“아버지. 이놈들이 감히 신영의 무사인 척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을 보면 아버지 휘하의 무사 중 이런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건 일단-.”

“이것이 아마도 놈들의 표식인 듯한데 다른 주가 무사들의 몸에도 이 문양이 있는지를 당장 확인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감히 신영의 무사로 숨어들어 있었다니. 이놈들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군요. 오늘 소가주를 노린 것처럼, 언제 또 돌변하여 신영을 노릴지 모릅니다. 신영의 안위가 환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바, 당장이라도 색출하셔야 합니다!”

백가 재상이 모처럼 짧은 말로 맞장구쳤다.

분개한 주경현이 사냥터를 지키는 주가의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여봐라! 지금부터 그 누구도 이 사냥터를 빠져나갈 수 없게 해라! 감히 신영의 안위를 위협한 놈들이 이 안에 있다!”

‘아니, 이놈들이. 이 미친놈들이!’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의 얼굴이 그야말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저 문양은 자신이 오래도록 키워 내고 고독(蠱毒)을 사용해 세뇌까지 완벽하게 마쳐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그의 소유물이라는 표시였던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사냥터 봉쇄를 명령한 소가주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제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버지! 일단 이곳에 있는 신영의 호위 무사 백 명부터 전원 조사해 보십시오! 감히 신영의 호위 무사로 위장해 숨어들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장 제 아들의 입을 찢어서라도 그만 좀 지껄이라고 말하고 싶어 노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헌데 어떻게 주세화의 집에 보냈던 무사들에게까지 저 표식이 있는 것일까.

혹시나 붙잡힐 경우를 대비해 인장을 찍지 않은 놈들로만 보냈었는데. 대체 어떻게?

그 공방을 지켜보고 있는 백기하의 입술이 비릿하게 위로 솟았다.

제 팔을 잡아끄는 듯하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연했다.

“일이 끝나면 일일이 인장도 찍어야 하는데 그것도 좀 도와줘요. 칼보다 바람으로 새기는 게 더 세밀할 테니.”

세화가 어떻게 저 인장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백기하가 추측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소가주의 혼약자이자 주가 수석 원로의 여식이었으니.

그녀를 구하려는 이들의 위협에도 눌리지 않고 회유에도 응하지 않을,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 그녀를 고문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밀실에 갇혀 있던 오 년 동안. 바로 저 신영의 호위들이.

그걸 생각하니 백기하의 피도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세화의 행방을 조사하던 중 백기하도 저들에 대해서 낱낱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뇌와 고독으로 신영의 지배를 받는 저놈들은, 목줄이 완벽히 틀어 잡힌 자신들의 울분을 다른 곳에 푸는 듯 보이기도 했다. 손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는 얘기였다.

‘그런 놈들의 손안에서, 오 년이나…….’

있는 힘껏 틀어쥔 주먹 사이로 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피가 맺히며 손안이 축축해졌다.

“아버지! 시간을 주면 어떤 핑계로 빠져나갈지 모르니 지금 여기서 당장 조사하셔야 합니다!”

“주가 소가주께서 아주 영민하십니다. 맞습니다! 이런 일은 속전속결이 생명 아니겠습니까. 저는 비록 백가의 재상이지만 감히 신영의 안위를 위협한 이들을 이 자리에서 즉결 처단해 일벌백계하시라 청을 올립니다. 다른 그 누구도 다시는 이런 무도한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반드시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백가 재상의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 뭘 망설이십니까. 제 목이 오늘 떨어질 뻔했는데도 주가 혈족들이 잔인한 광경에 놀랄 것만을 걱정하십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희가 비록 우연이지만 백가 기마단을 모두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기꺼이 저희 무사들을 빌려드리겠으니 일을 진행하시지요!”

백기하의 눈짓을 받은 백만용이 번번이 끼어들자 노인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필이면, 하필이면 오늘 백 명을…….’

노인이 이를 물었다.

백기하가 사냥터에 백가 무사 쉰두 명을 모두 끌고 왔다고 하기에, 그는 이 사냥터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가장 충실한 무사들을 백여 명이나 끌고 온 것이다.

전부 문양이 있는 자들인데, 그놈들을 다 처벌하라고?

그놈들을 여기까지 세뇌하느라 얼마나 시간과 공이 들었는데.

게다가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

언제 다시 육가 연합이 주가를 급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 손으로 키운 무사 백여 명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백가 역시 공격받았다 이야기가 나온 이상 이 일은 따로 알아보겠다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대체 어찌하면…….’

노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보는 이들의 시선에도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자신의 안위를 끔찍이 여기시던 신영께서 어찌하여 저리 망설이시는 걸까.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신영이 간신히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하나 아무리 압박이 심해질지언정 저 백 명을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되는 말을 제 입으로 꺼낼 순 없었다.

결코 그럴 순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지만 누군가가 주가의 소가주를 습격한 일로 여기 모인 이들이 벌써 많이 놀란 듯한데 이곳에서 또 피를 보는 것은 마땅치 않은 것 같군. 그러니 일단-.”

“그 무슨 말씀입니까, 신영! 저희 백가 역시도 공격당했는데 이놈들의 배후를 지금 바로 캐내어 저희가 받은 위협에 대한 공포를 종식시켜 주시진 못할망정 저놈들에게 시간을 주시겠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내 아들도 많이 다쳤으니 이놈도 어서 치료를 받아야 하고-.”

“아닙니다, 아버지! 어찌 제 몸의 안위가 신영의 안위보다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노인이 애써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아. 주가의 소가주로서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네가 먼저 이곳에 모인 혈족들을 배려해야지. 이들에게 또 험한 꼴을 보이란 말이냐.”

“아버지께선 너무 자상하십니다. 하지만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주가의 혈족들은 그리 나약하지 않은 데다, 주씨들에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의 지도자이신 신영께서 무사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 만큼은 저희를 배려치 마시고 오직 아버지의 안위만 생각하고 챙기십시오.”

‘이, 이 새끼가.’

저 몸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저놈의 입을 가장 먼저 찢어 놓았을 텐데.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사이 내내 시선을 내린 채 그 공방을 외면하고 있던 주명윤이 조용히 일어났다.

그가 소매에서 영단을 하나 꺼내 들었다. 배상을 위해 마련해 뒀던 그의 영단이었다.

천천히 걸어온 그가 여태 소가주의 옆에서 차갑게 식어 가고 있던 천령의 몸을 안아 올려 입안에 영단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손톱으로 손목을 강하게 베어 내고는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천령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시체 같던 얼굴에 조금 핏기가 돌았다.

그런 천령을 눕히고 제 장포를 벗어 덮어 준 주명윤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신영. 소가주님의 말씀대로 이건 가볍게 보실 일이 아닙니다. 어찌 이리 오래도록 망설이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저놈들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주가의 무사들이 아니니 이곳에서 곧장 처리하셔야 합니다.”

“아니다. 내 그것을 더 알아보고-.”

“의도가 없고서야 어찌하여 저 무사들은 소가주님을 공격한 놈들까지 살려 왔으면서 제 여식은 구해 오지 않는 것입니까.”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말을 이어가는 주명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신영의 무사들이 신영과 소가주님의 안위를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 그 이외에도 그들은 신영이 하시듯 주가의 일원들을 챙겨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주명윤이 먹먹한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헌데 이런 큰일이 생겼음에도 주가의 여식을 수색조차 하지 않고 외면한 채 돌아왔다니요. 그 행동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명윤. 그것은-.”

“아니라면 혹 신영께서 저 호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까? 제 여식은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

주명윤의 강렬한 시선이 위를 향하며 신영의 것과 마주쳤다.

이 강직한 원로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눈빛에, 노인이 저도 모르게 주춤 한발 물러섰다.

“아무도 제 여식에 대해선 신경 쓰시지 않는 듯하니 저는 지금 곧 저 숲으로 제 여식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허니 신영께서도 소가주의 말씀처럼 저 호위들이 무슨 목적으로 습격자들을 저리 온전하게 데려온 것인지 밝혀 주시지요.”

그때였다.

작은 목소리 하나가 사냥터를 빠져나왔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깜짝 놀란 주명윤이 벌떡 일어섰다.

“세화야!”

붉은 옷을 입은 그녀는 힘이 빠진 모습으로 말에 매달리듯 기대 있었다.

주명윤이 서둘러 달려가 그런 딸을 안아 들었다.

“왜 이러는 것이냐. 저 습격자들이 너도 공격하였어?”

“그건 아닙니다. 한데 저 숲속에 온통 덫과 약이 가득합니다. 영력이 흐트러지고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제야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뭐야?! 약과 덫?! 지금은, 지금은 좀 괜찮은 것이냐!”

“네. 신호탄의 소리를 듣고 이건 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판단해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주명윤의 팔에서 내려온 세화가 노인의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힘없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는 그 가련한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차거나 숨을 삼켰다.

“신영, 저 숲을 조사해 보십시오. 온갖 지독한 약과 덫들이 저희가 가는 길목마다 뿌려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그것에 당해 쓰러졌기에 망정이지,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었다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화가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주가의 중심부, 신영의 사냥터에서 일어났느냐며 신영의 앞에 고두했다.

“이것은 저 같은 일개 주가 혈족을 노린 덫일 리가 없습니다. 분명 소가주님을 해치려 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영과 소가주님의 안위만큼은 주가의 모두가 지켜 내야 한다고.

그러니 소가주님의 앞으로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 일을 분명히 하셔야 한다고 덧붙이며 읍소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영과 소가주님 아니십니까. 그러니 신영께서 이곳에서 어떤 일을 벌이셔도 결코 주가의 누구도 그것을 비난하거나 신영께서 자비롭지 않다 흠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햇빛을 똑바로 받은 세화의 적자줏빛 눈이 똑바로 신영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러십니까.”

이 너른 사냥터는 현재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져 있었다.

사냥터를 가득 메운 이들의 모든 시선과 주의가 노인에게 쏠려 있었다.

“…….”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이 어린것을 당장이라도 쳐 죽이지 못해 원통한 것과는 별개로.

노인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암담함에 눈이 한번 감겨들었다.

백 명이나 되는 수족의 목숨이 걸렸음에도, 제가 더 버틸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건 틀렸다. 이건 여기서 할 수밖에 없어.’

“…….”

노인의 고개가 나직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듯 하자 주경현이 제일 먼저 화색이 되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아버지!”

움켜쥔 주먹을 소매 안으로 감추던 노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만은 동일하다. 인장이 있는 이들은 모두 색출해 낼 것이나 배후를 알아내야 하니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놈들만을 여기서 죽이고 나머지는-.”

“신영, 배후를 알아내시는 데는 입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세화의 목소리가 그사이를 끼어들었다.

“하, 저년 그냥 살려만 놓으면 되는 것 아닌가? 어째서 사지를 모두 멀쩡히 두시는 거지? 명령만 하시면 내가 당장 잘라 낼 수 있는데 말이야.”

“웃기지 마. 인원이 이렇게 많은데 나눠야지. 내가 저 하얀 오른쪽 팔뚝을 자를 테니 하나씩 하자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새 톱을 사지 않았겠어? 오랜만에 약 기운을 빼 제정신으로 만들어 두고 저 허벅지에 톱질을 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 댈까.”

밀실을 가득 메우던 비열한 웃음소리가 여태 선명했다.

“그러니 당장 죽일 수 없는 놈들도 결코 달아날 수 없게, 여기서 모두 사지를 자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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