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54)

* * *

번개같이 사냥터로 뛰어든 신영의 무사들에 의해 주경현과 천령이 빠르게 구출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몸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주경현의 짙은 녹빛 의복마저도 피에 흠뻑 젖어 갈색으로 보였다.

채 흡수되지 못한 붉은 피가 늘어진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본 신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 된다! 경현아!!”

노인이 서둘러 달려와 제 아들의 몸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생명에 지장은 없는지.

영력의 손실은 없는지 빠짐없이 확인한 뒤에야 비틀거리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머쓱해진 소가주가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자 그가 역정을 냈다.

“곧장 달아났어야지! 어찌 거기서 신호탄을 쓸 정도로 버텨.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딜 얼마나 다친 것이냐.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상처가 있느냐? 내상은 어떠하냐. 이 바보 같은 녀석! 어떻게 이 몸에 상처를 내. 누누이 이르지 않았더냐. 몸을 조심해야 한다고. 상처 하나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손을 떨 정도로 당황한 노인이 시종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어째서 약을 아직 가지고 오지 않는 거야! 어서 약을 가져와라!”

시종들이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둔 회복약을 가지고 황급히 달려왔다.

창백해진 신영은 제 아들을 단상 뒤에 마련해 둔 사적인 공간으로 데리고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윗옷을 벗기고 가져온 약들을 소가주의 몸에 들이부었다. 몇 병은 곧바로 마시게 했다.

“그래도 상처가 많지 않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막상 소가주의 몸에 난 상처들은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천령이 온몸으로 막아섰기에 그의 피가 튀어 의복이 붉게 젖어 들었을 뿐.

노인은 옷을 온통 적신 피가 제 아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도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저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 몸 간수를 잘해야 한다. 이 몸은 정말 중요한 몸이야.”

노인의 진심 어린 말에 주경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순 없었는지 감격한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네, 아버지. 앞으로는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돌아왔으면 되었다. 혹시 모르니 어서 돌아가 약탕에 몸을 담그고 눕거라.”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 그 전에 너. 남은 약이 있다면 한 병 가지고 오거라.”

제 옆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천령을 의식한 주경현이 손을 내밀었다.

약을 들고 왔던 시종이 난색을 표했다.

“오늘 가져온 것은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조금 전 그 병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뭐야? 그럼 당장 가서 더 가지고 오면 될 것이 아니냐. 우리 주가에 약이 고작 이것뿐이더냐?!”

“하지만…….”

시종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금 이 근처에 감히 신영의 외아들을 급습할 정도로 무도한 이들이 깔려 있다는데 어떻게 홀로 달려가 저택에서 약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이걸 쓰시지요.”

그때 어떤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백가의 재상이 품 안에서 작은 자기 병 하나를 꺼내어 주경현을 향해 던졌다.

날아온 것을 반사적으로 움켜잡긴 했으나 누가 이것을 던졌는지 확인한 주경현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감히……. 감히 주가의 영역에서 주가의 소가주를 습격한 주제에 이따위 약으로 나를 농락하려 해?’

“효과가 퍽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저희 쪽 무사가 약의 효능을 증명할 터이니 괜찮으시다면 일단 그 약을 사용하-.”

챙강!

“!”

“헉.”

이어진 소가주의 행동에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숨을 삼켰다.

주경현이 병을 그대로 땅에 내던져 깨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까짓 약 몇 병으로 너희가 한 짓을 지울 수 있을 줄 아느냐! 주가의 무사들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주경현의 고함에 신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주경현이 분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곳에서 저 백가 놈들을 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셔선 안 됩니다. 오늘 저를 공격했던 놈들이 백가의 결계를 사용했습니다.”

“뭐야?!”

“그저 궁지로 모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천령의 상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로 절 죽이려 했던 겁니다.”

주경현이 울분을 참지 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주가의 영지에서 주가의 소가주를 살해하려 한 놈들을 모두 잡아 엄히 처벌해 주십시오. 육가 연합에까지 이 일을 알리고 책임을 물으셔야 합니다.”

“…….”

당황한 노인이 상황을 되짚었다.

‘백가의 습격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들이 종전한 이후 주가의 영지 안으로 들어온 인원은 이 장소에 몰려 있는 저 쉰네 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이곳에 자리한 이후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 사냥터 안에서 백가의 무사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백가 재상이 분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소가주께서는 입을 조심하십시오. 감히 이런 일에 백가를 끼워 넣으실 생각이라면 그 뒷감당을 하실 각오까지 하셨어야 할 겁니다.”

“양심도 없이 그딴 소리를! 게다가 지금 너 따위가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시선에 노기를 그대로 드러낸 노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백가 재상.”

“예. 신영.”

“주가의 영역에 들어올 때 기마단의 인원을 정확히 신고한 것이 맞는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소가주께서 어떤 연유로 저희 백가에게 이 같은 무도한 사건을 뒤집어씌우시려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영께선 종전 때에도 주가를 더 압박할 수 있었던 저희가 신의를 지켜, 신영께서 실종 사건의 해결을 약속하시자마자 연이은 승전으로 사기가 가득하여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무사들을 다독이며 조금의 지체없이 물러났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긴 목소리를 꺼내놓은 백가 재상은 누군가가 그 말에 첨언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주가에 위협이 되지 않고자 고작 쉰세 명의 인원으로 방문한 사절단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 하시다니요. 이곳, 여기 사냥터뿐 아니라 주가의 영역 전체에 걸쳐 백가의 무사가 단 한 명이라도 더 발견된다면 이번에 저희가 가져갈 배상품뿐 아니라 지난 기간 받아 갔던 배상 영력까지 모두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갑자기 겪어야 했던 주경현은 백가 재상의 길고 몹시 빠른 말들을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아니라 잡아떼고 있다는 것만은 정확히 파악했다.

“다 거짓말입니다, 아버지! 분명 백가의 결계였습니다.”

주경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저놈의 말을 들으실 게 아닙니다. 주가의 무사들이 그놈들의 시신을 끌고 오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 마침 소가주를 구하기 위해 사냥터 안으로 뛰어들었던 무사들이 돌아왔다.

모두가 한 구씩 시신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 잔인한 손속을 드러내며 적의 머리 가죽을 잡아끌고 다니던 그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시체들을 어깨에 메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쿨럭.”

작은 신음과 기침 소릴 내는 것을 보아하니 기절해 의식을 잃은 상태긴 했으나 시신조차 아닌 이가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주경현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놈들! 감히 소가주를 습격한 이 역적 놈들을 이리 멀쩡히 살려 데려오느냐?! 그 자리에서 목을 땄어야지! 배후를 캐기 위해 살려 둔 거라면 사지를 잘라 내기라도 했어야지! 소가주를 알아보지 못한 눈을 뽑았어야지!”

그 사이 신영의 눈빛은 잔뜩 흔들렸다.

‘저놈들이 경현이를 습격했다고?!! 그럴 리가! 저놈들은 내가 경현이를 위해 붙여 둔 호위가 아닌가!’

조금 전까지 제 아들을 공격한 그 누구도 살려 두지 않겠다 이를 갈고 있던 그였다.

허나 지금 와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머지 다섯 역시도 주세화를 족치라고 보낸 놈들인데 왜 저놈들이 모두 뜬금없이 경현이를 공격했다는 것이지?’

일단 뭔가가 예기치 않게 잘못됐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놈들이 범인이라면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갔던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 허니 일단 이 자리를 어떻게든 수습해서…….’

그때였다. 갑자기 백가 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다가온 그가, 주가 무사들이 땅에 내려놓는 이 중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옷을 조금 찢었다.

찌이익-!

칼에 베여 너덜거리는 부분을 찢어 내자 모두의 눈앞에 작고 동그란 어떤 문양이 나타났다.

얼굴이 단단히 굳어진 백가 재상이 낮은 목소리로 이를 갈 듯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군요. 여봐라. 너희들은 가서 내가 오늘 신영께 드리려 하였던 그것을 가져오거라!”

백가 무사 중 몇이 그 명령에 빠르게 움직여 포가 덮여 있는 거대한 수레 하나를 끌고 왔다.

단상 앞으로 다가와 멈추는 그것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백가 무사들이 그 안에 들어 있던 무언가를 바닥에 던지듯 쏟아부었다.

“!”

“헉!”

“저, 저게 다 지금…….”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온통 시체뿐이었다.

몸에 꽂힌 화살마저 뽑지 않고 그대로 얼린 채 호수 밑바닥에 던져두었다가 오늘 꺼내 온 침입자들의 시신이었다.

호수의 진흙과 뒤엉켜 온몸에 화살을 꽂고 있는 시신의 모습은 그 자체로 흉측하고 두려운 모양새였다.

백가 재상이 신호하자 백가 무사 하나가 그 중 팔을 그대로 드러낸 시체 하나를 질질 끌고 다가왔다.

“이걸 보십시오, 신영.”

“……이게, 무엇이냐.”

“얼마 전 밤중에, 자고 있던 저를 죽이려 암살자들이 습격해왔습니다. 인원이 적지 않아 손속에 사정을 둘 수가 없어 이리 벌집을 만들 수밖에 없던 놈들인데, 이후 살펴보니 하나같이 몸에 이런 문양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놀란 주경현이 먼저 달려와 시신에 있는 문양과 호위에게 있는 문양을 살펴보았으나 완전히 동일했다.

‘이, 이놈들이 백가도 공격했다고? 어째서?’

“처음엔 주가에서 보내셨을까 의심하였으나, 공명정대하고 자비로우신 신영께서 소수의 인원으로 영역에 들어온 저희를 암습하진 않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파렴치하고 격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지배자의 방법이라고는 믿기 힘든 치졸한 짓이 아닙니까. 하여 저는 오늘 신영께, 감히 신영의 영지에서 신영께서 허가하신 백가의 사절단이 공격당했던 이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고 백가 재상을 급습하는 것으로 다시 전쟁을 발발시키려 한 후안무치하고 무도한 작자들을 한 놈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발본색원해 주십사 청을 올리려 했습니다. 한데 오늘 소가주를 공격한 이들도 똑같은 문양을 몸에 지니고 있다니요. 이는 주가와 백가를 이간질하려 한 이놈들의 계략을 더욱 확실하게 만드는 증좌가 아니겠습니까!”

‘……대체 이놈은 아까부터 말을 왜 이리 길게 하는 것이냐.’

긴 혀를 나불대는 백가 재상의 단호한 낯짝을 질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주경현이 정신을 차렸다.

요약하자면 어쨌거나 이 문양을 지닌 이들이 그들을 동시에 급습해 암습하려 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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