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54)

* * *

초대장을 정리하다 말고, 하얀 손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 보면.’

멍한 세화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시간이 돌아와 생각해 본 것이지만,

‘백가에서의 시간, 나쁘지 않았지.’

붓대 끝이 그녀의 입술 부근을 꾹꾹 눌렀다.

마음이라는 건 어찌나 간사한지.

백가에서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주가에서 가지는 원로의 여식이라는 위치가 백가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 백가에서 머무는 그 시간이 그리 힘들게 느껴졌었을 것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면 전쟁의 승자니 육가 연합이니 해도 그들은 여전히 주가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모욕적인 언행과 실종자들을 찾아내라는 다그침 정도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육체적으로 제압했다거나 살해 위협을 남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백기하가 알아채고 바로잡아 주기 전까지 식사 때마다 쉰 음식을 준다거나 실수인 척 오물을 뒤집어씌운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벌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제 뭐.’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비참하고 참기 힘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돌아와서는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매 같던 아이들을 모두 잃고.

아버지가 신영에게 반기를 들게 할 목적으로, 밀실 감옥에 갇힌 채 생으로 손발톱부터 뽑히는 등 갖은 고문을 받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

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게 아마 누군가가 또 나한테 오물을 뒤집어씌운 후의 일이었지?’

그날은 사정이 있어 세 자매는 모두 다른 곳에 잠시 보낸 참이었다.

특별히 볼일이 있지 않고서야 방에서 잘 나오지 않던 그녀였지만 그날은 또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밖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예정되어 있던 일처럼 걸레라도 빨았는지 역겨운 냄새가 나는 물을 뒤집어쓰고, 누군가에게 떠밀려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거지 같은 몰골이 되어 간신히 방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백기하가 나타났었다.

“누가 이랬지? 혼자 넘어진 게 아니지?”

혼자 넘어져? 이게 혼자 넘어져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이면 눈을 뽑아야지. 쓸모도 없는 걸 달고 다닐 필요는 없을 테니까.

기가 차서 대꾸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바닥을 구르면서 발목을 다친 상태였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백씨 따위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쳤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억지로 괜찮은 척 힘주어 걷고 있었다.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신수의 눈에는 통하지 않았는지 곧 두텁고 단단한 팔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의 몸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내려 달라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방까지 데려다준 이후에는 손수 목욕통을 가져다주고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 주었다.

‘병 주고 약 준다며, 속으로 욕을 엄청나게 했었지 아마?’

뭐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그에게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백기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내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통하게 덧붙였다.

“미안해.”

그때 처음으로 백기하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던 것 같다.

주경현보다 만 배는 수려한 용모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우리 소가주님보다 아주 조금 더 잘생기긴 했네.’라고 생각했던 얼굴을.

새까만 눈동자에 담긴 진심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시킨 것은 아니었구나.’

그 생각을 하게 되고부터 백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전보다는 조금 편하게 느껴졌었다.

그것 말고도 그날 이후로 전과 같은 지저분한 괴롭힘이 조금 줄어든 것을 보면 백기하가 제 혈족들에게 무언가를 당부했음이 분명하기도 했고.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이 무려 십이 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한결같이 다가와 준 그에게, 백가라면 이를 갈던 주세화의 마음도 조금쯤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없던 그녀에게, 그는 어떻게 보면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었으니.

‘어디까지 왔을까?’

그런 그가 주가의 영지로 오고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어찌나 그것이 신경 쓰이던지.

‘이제 불사도 아니면서 혼자 여기 와서 뭘 어쩌겠다고. 혹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건 아니겠지?’

가문의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하루가 즐거우면 그만인 주가 혈족들에 의해 모임은 매일매일 쉬지 않고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색없이 하루살이 같은 생을 즐기는 어린 주씨들은 어지러운 환계를 피해 인간계로 넘어와 여전히 방탕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딱히 기다리지 않아도 초대 서신은 늘 그득그득 날아와 쌓였다.

초대장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백기하에 대해 생각하느라 일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끝났다.”

마지막 서명을 끝으로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자 사영무가 깜짝 놀라 돌아봤다.

“헉. 이 많은 곳에 정말 모두 가시게요?”

답신이 끝난 서신들을 들어 올리던 영채도 만류했다.

“아가씨, 여길 다 가시다가는 과로보다 먼저 화병으로 쓰러지실걸요.”

“화병?”

“아가씨께서 연회를 많이 안 가보셔서 모르시는 거예요.”

“네. 무릇 탈피 못 한 주씨 혈족들이 판치는 연회란 독사와 전갈들이 모여 지가 잘났네, 아니 내가 잘났네를 떠드는 아비규환의 현장이랄까요.”

“…….”

“저도 주가 혈족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꼬투리 잡는 일이 얼마나 심한데요.”

“맞아요. 팥을 팥이라 했을 뿐인데 다음 날이 되면 ‘저년이 콩을 팥이라고 했네.’, ‘쌀도 팥이라고 했네.’, ‘정말? 나는 길바닥의 돌멩이를 팥이라고 하는 걸 들었어.’, ‘뭐야? 나는 자기 집 마당의 개똥을 팥이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말이 이런 식으로 와전되더라니까요.”

“…….”

세화가 대답 없이 피식 웃자 영무가 거들었다.

“거짓말 같으시죠? 절대 아니에요. 쌀까지는 그렇다 쳐도 완전 생뚱맞은 돌멩이와 개똥까지 나오는 거요. 그게 진짜예요. 별 희한한 것까지 가져다 엮어서 소문을 만들어 내니 완전히 질려 버릴 수밖에요.”

“……너희, 쌓인 게 많은 것 같다.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렇게 힘들었어?”

‘그, 그런 것도 모르고 나만 편하게 인간계에서 지냈었구나.’

그녀는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면 연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서신만으로 거절할 수 없는 행사에는 세 자매에게 선물을 들려 보내거나 하는 편이었고.

“힘들 건 없었지만 환멸을 느낀 적은 많았죠.”

“네. 하나만 말씀드려 보자면 그 서흥 원로님 댁 따님 장현 아가씨 있잖아요. 탈피도 혼약도 안 했는데 임신하셨었던.”

“저희가 선물을 전달 드리고 나오는 중에 보게 된 것인데, 그분이 전각 한쪽 구석에서 친한 동무들에게 처지를 상담하면서 우셨거든요?”

“함께 정을 통했던 남자가 전쟁을 빌미로 도망쳐서는 연락을 끊었었나 봐요.”

“얼마나 서럽게 우시던지. 본의는 아니지만 엿듣는 상황이 된 저희조차 어떡하냐고 정말 걱정했어요.”

“아가씨의 동무들도 장현 아가씨를 끌어안고 화를 내다가 함께 눈물을 보이다가 하며 열성적으로 편을 들어주고 있었고요.”

“그래도 친구는 잘 사귀었구나, 좀 안심했지요. 한데 너무 중요한 일이다 보니 저희가 바로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했거든요. 들었단 걸 들킬까 봐서요.”

“어서 저분들이 자리를 파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세상에…….”

“세상에?”

“장현 아가씨가 울어서 엉망이 된 화장을 고치고 오겠다며 자리를 뜨자마자 그 사람들이 깔깔 웃더라고요. 저럴 줄 알았다나 뭐라나.”

“……뭐?”

“거짓말 같으시죠? 그런데 진짜라니까요. 장현 아가씨 정도면 품성도 무난하고 나쁜 분은 아니었는데, 다들 어찌나 비웃고 통쾌해하던지.”

“한데 그런 일이 비단 장현 아가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거. 저런 식의 뒷담과 안면몰수가 어린 주가 혈족 사이에선 비일비재하다는 거.”

“…….”

“우리 아가씨야 그런 일들을 굳이 아실 필요 없으니 지금껏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앞으로 연회에 가실 거라면 무조건 알아 두셔야 해요. 보이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면 안 된다는 걸요.”

영무와 영채의 열성적인 의견을 들으며 세화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보면 백가에서의 괴롭힘에 너희가 그다지 반응하지 않는다 싶었더니. 이미 더한 꼴들을 보고 와서 그런 거였구나.’

탈피를 마치지 못한 종족들도 연회에는 어렸을 때부터 참석했다.

인맥을 넓히고 향락을 즐기는 법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세화는 아직 그런 모임에 제대로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모두 전장에서 목숨 걸고 가문을 지키고 계시지 않나.

권역에서 안온하게 지내는 제가, 술과 노래에 둘러싸여 연회까지 즐기는 건 안 될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 결정이 너무나 한 치 앞만 내다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안다.

아비와 오라비가 목숨조차 돌보지 않은 채 영지 경계선을 누비고 있었던 것처럼, 제 전장은 이곳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연주는?”

“사촌 아가씨께선 지금 안가(安家)에 계세요. 거길 들어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결계도 풀어놓고. 의원도 오늘만 벌써 세 차례나 불렀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홀로 환계로 통하는 문을 넘을 수 없는 사연주는 그들이 인간계에 머무는 동안 따로 지낼 생각인지 허락도 없이 안가에 들어가 있었다.

안가란 갑작스러운 탈피나 영력의 뒤틀림 등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갖은 보호막으로 둘러 놓은 장소를 말했다.

위치를 개방하지 않는 곳임에도 사연주는 지금 그곳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돌아오셨음에도 원로의 허락도 없이 저러는 것을 보면 평소 사연주가 그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한 영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끌고 올까요?”

“아니. 그대로 둬.”

세화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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